[향토문화] 마을의 번영과 무사태평 기원..광령1리 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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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마을의 번영과 무사태평 기원..광령1리 포제단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4.09 07: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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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작물에 병충해가 심하거나 가축에 재해가 덮치면 포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광령1리 포제단

 

위치 ; 애월읍 광령1리 1088번지. 광령초등학교 남쪽, 인가에서 100m 가량 떨어진 언덕 위에 있다.

시대 ; 미상(조선시대 추정)
유형 ; 민속신앙

광령1리_포제단동산
광령1리_포제단

 


광령1리 포제단은 평화로로 가면 무수천사거리에서 서쪽으로 200여m 지점에있는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 300여m 가면 지성요양병원이 있고, 거기서 북쪽으로 200m 정도 가면 물탱크가 있다. 물탱크에서 서쪽 농로로 들가면 100m 정도 지점에 소나무가 우거진 동산 위에 포제단이 있다.


마을의 번영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유교식 제단이다. 제사의 명칭은 마을제 또는 포제이다. 「증보동국문헌비고」 예고의 제단조(祭壇條), 포제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면 포신은 사람에게 재해를 주는 귀신이라 했다. 그래서 농작물에 병충해가 심하거나 가축에 재해가 덮치면 포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설촌 이래 최초로 서적굴동산에 포제단을 설단하고, 봄과 가을 연 2회에 걸쳐 춘추포제를 봉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서낭동산으로 포제단을 이설하고 수년간 봉행하여 오다가, 인구 및 가구수가 급증함에 따라 다시 제단을 광대왓(廣大田)을 이설, 포제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968년 광령초등학교 교사증축계획으로 인해 포제단이 교사건축 위치에 저촉되어 불가피하게 제단을 다시 이설해야 될 처지에 놓였다. 이에 긴급 마을회의를 개최하여, 이설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자고왓동산(自高田童山)이 최적지임이 드러나 1968년 1월 13일 다시 포제단을 이설하였다.(마을 홈피)

포제단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시멘트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 돌담으로 울타리를 쌓고, 그 안에 다시 병풍처럼 장방형으로 돌담을 둘렀다. 돌담의 높이는 대략 1m 내외인데,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크기의 돌을 한 줄로 쌓았다. 돌담의 맨 위 부분은 시멘트 몰탈로 마감하였다. 제장의 규모는 대략 가로 12m, 세로 7m 정도 되어 보인다.


제단은 그 안의 북쪽에 두 개 마련되어 있다. 왼쪽에 놓인 것이 토신단이고, 오른쪽에 놓인 것이 포신단이다. 토신단이 포신단보다 조금 낮은 곳에 마련되어 있다. 토신단과 포신단의 크기도 같고 형태도 같다. 대상신은 토지신, 포신 둘이다. 토신은 마을 안 전체를 관장 보호하는 신이고, 포신은 주로 농업을 관장・보호한다고 믿는다. 토신단의 서쪽 옆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제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단은 제물을 진설 하는 상석으로 비석돌을 재료로 썼다. 하단은 향석으로 자연석을 재료로 썼다. 상석의 크기는 가로 106㎝, 세로 76㎝, 높이 24.5㎝로, 토신제단의 상석 받침은 자연석이고 포신제단의 상석 받침은 자연석에 시멘트를 발랐다. 향석의 크기는 가로 56㎝, 세로 38㎝, 높이 25㎝로 비교적 정교하게 다듬어 놓았다. 상석의 뒤에는 지방을 붙이는 돌이 있는데, 이 역시 자연석으로 잘 다듬어 놓았다. 상석 위로 드러난 높이가 25㎝ 가량 되는데, 토신제단의 것은 가로 18㎝, 세로 18㎝, 포신제단의 것은 가로 26㎝, 세로 16㎝로 조금 다르다.


그밖에 제장의 오른쪽 위 귀퉁이에 직육면체로 잘 다듬은 돌을 놓아 준소로 사용하고 있다. 그 크기는 가로 94㎝, 세로 58㎝, 높이 22㎝이다. 또한 제장의 왼쪽 귀퉁이에도 직육면체로 다듬은 돌을 박아 놓아 망료위로 삼고 있다.(제주도청 홈피)


이 마을에서는 포제를 정월, 7월 두 차례 지낸다. 또한 춘추2제를 봉행하던 것을 1979년 리민의 결의에 의해 춘제단일제만을 지내기로 합의, 현재는 봄에만 마을포제를 봉행하고 있다. 제일(祭日) 선택은 정일(丁日) 혹은 해일(亥日)로 매년 입춘 후 초정일을 위주로 하는데, 마을에 장사(葬事)나 부정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중정(中丁)이나 말정(末丁)으로 연기한다. 행제 시간은 자시가 원칙이다.


원래 포제는 매년 일정한 날에 지내지 않고 황연(蝗)이 있을 때만 지냈다. 그러던 것이 입춘후 정일이나 해일로 굳어진 듯하고, 농사에 관계가 깊으므로 거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변모한 듯하다.(마을 홈피)
희생은 돼지로 토신단과 포신단에 각각 1마리씩 준비한다. 행제 순서는 다른 마을과 같다. 먼저 토신단 앞에서 한 제차를 진행한 뒤에, 같은 제차를 포신단 앞에서 진행하는 식이다. 이 마을 포제는 4․3사건 때 잠깐 중단된 적이 있을 뿐,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제주도청 홈피)


제물(祭物)은 도(稻=쌀), 양(梁=서속), 서(黍=기장), 직(稷=피)의 메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지만, 현재는 양과 서·직이 없으므로 양 대신 도(稻=쌀메) 두 그릇, 서·직대신 노란좁쌀 메 한 그릇, 검은 좁쌀메 한 그릇을 올린다. 희생으로는 돼지 2마리를 사용하는데, 될 수 있으면 마을에서 구입하고 제물은 메를 제외하고는 날것으로 올린다.

폐백(幣帛)으로는 명주 석자, 백지 한권을 쓰며 과일은 오색 과일을 쓰는데 대추, 곶감, 밤, 유자, 비자를 말한다. 제주(祭酒)는 농주를 사용하며 포(脯)는 쇠고기와 어염을 , 채소류는 무우채와 미나리채 등을 사용한다. 이상의 제물과 제관의 식비는 제향비에서 충당한다.


제관 선정을 위하여 이장이 주관하에 제일(祭日) 3일전에 제향회를 개최하고 3헌관(三獻官)·9집사(九執事)를 선출한다. 이 때 제향회에는 마을의 각호(戶)에서 1인 이상이 참석하는데, 대부분 호주가 참석하며 호주가 부재시에는 20세 이상되는 대리인이 참석한다. 만약 불참하면 "궐"을 내는데 궐은 해방 이전에는 좁쌀 소두 1되를 내었으나 오늘날에는 돈으로 지불한다.


회의 주재는 이장이 한다. 과거에는 향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행정의 중추적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웃어른을 모시고 자문을 얻는다. 향회에서는 제관 선출과 더불어 제의 예산을 수립하고 사취(舍炊 : 제물준비장소)를 결정한다.


제관(祭官)은 입장(入丈, 어른)한 남자이면 될 수 있는데, 그 중 헌관은 보통 학식이 있고 나이가 든 유지를 선출한다. 12제관의 직무는 다음과 같다.


· 초헌관(初獻官) : 첫째 헌관
· 아헌관(亞獻官) : 둘째 헌관

· 종헌관(終獻官) : 막내 헌관
· 집례(執禮) : 예를 주장하는 사람(홀기)
· 대축(大祝) : 축문을 고하는 사람
· 알자(謁者) : 헌관을 인도하는 사람
· 봉향(奉香) : 향을 받드는 사람
· 봉로(奉爐) : 향로를 들어 받드는 사람
· 봉작(奉爵) : 술잔을 헌관에 드리는 사람
· 전작(尊爵) : 헌관의 술잔을 신위에 올리는 사람
· 사준(司樽) : 술을 부어주는 사람
· 찬자(贊者) : 홀기에 보조하는 사람
· 전사관(典祀官) : 제물의 준비, 진설, 철상 등 제물을 관리하는 사람,
전사관 까지 합하면 13제관이다.


선정된 제관은 제일 3일전부터 사취에서 합동숙식하며 목욕 등으로 몸을 깨끗이 하고, 조문과 문병을 가지 않는 등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 전사관(제물을 차리는 사람)은 집례, 초헌관 등과 의논하여 제례 3일전에 제례에 사용할 제용수(생수)를 밀봉하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 동시에 제단 청소를 말끔히 하고 출입구에 새끼줄을 메어 금하는 표시를 한다.


제물(祭物)로는 도(稻,쌀), 양(梁,서속), 서(黍,기장), 직(稷,피)의 메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지만, 현재는 양과 서·직이 없으므로 양 대신 도(稻, 쌀메) 두 그릇, 서·직 대신 노란좁쌀 메 한 그릇, 검은 좁쌀메 한 그릇을 올린다. 희생으로는 돼지 2마리를 사용하는데, 될 수 있으면 마을에서 구입하고 제물은 메를 제외하고는 날것으로 올린다. 폐백(幣帛)으로는 명주 석자, 백지 한권을 쓰며 과일은 오색 과일을 쓰는데 대추, 곶감, 밤, 유자, 비자를 말한다.


제주(祭酒)는 농주를 사용하며 포(脯)는 쇠고기와 어염을, 채소류는 무우채와 미나리채 등을 사용한다. 이상의 제물과 제관의 식비는 제향비에서 충당한다.


제사 전일 해시에 제단과 나가 자시(子時)가 되면 제관이 홀기에 적힌 대로 엄숙히 제사를 받든다. 포제가 끝나면 사취로 돌아와 음복한다.


참고로 「증보동국문헌비고」 예고의 제단조(祭壇條), 포제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면 포신은 사람에게 재해를 주는 귀신이라 했다. 그래서 농작물에 병충해가 심하거나 가축에 재해가 덮치면 포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원래 포제는 매년 일정한 날에 지내지 않고 황연(蝗)이 있을 때만 지냈다. 그러던 것이 입춘후 정일이나 해일로 굳어진 듯하고, 농사에 관계가 깊으므로 거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변모한 듯하다.(마을 홈피)
《작성 13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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