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순례길 탐방) "맑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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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순례길 탐방) "맑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 고현준
  • 승인 2022.04.1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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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를 찾아 떠나는 보시의 길, 장안사-보림사 구간은 정토를 찾는 돈오점수의 길

 

 

참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불교순례길 보시의 길 3구간은 9.9km에 이르는 조금은 긴 구간이었다.

일주일만에 그토록 화려했던 벚꽃이 모두 진 장안사 앞 도두봉 입구는 그렇게 푸른 빛이 완연한 봄이 이미 와 있었다.

지난 16일 절로 가는 길은 유채꽃 향기가 가득하고 짙푸른 빛이 감도는 ‘무지개 해안도로’에서 시작했다.

이 무지개 해안도로라는 이름은 관광객들이 붙인 것으로 요즘은 제주에 오는 젊은이들이 모두 찾아가야 하는 곳으로 유명해 졌다고 이날 우리를 태워준 기사님이 전해줬다.

그래서 그런지 간간히 유채꽃과 어우러진 푸르고 푸른 바다는 이날 제주도를 더욱 빛내고 있었다.

이날은 특히 하얀 파도까지 포말을 날리며 헐떡였다.

새하얀 파도는 제주바다를 상징하는 모습이다.

 

 

 

이날도 불교순례길은 길을 안내하는 리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절 입구에 도착했을 때야 비로소 하나씩 나타났다.

인생길에 무슨 안내가 있을 것인가.

우리는 아예 이 리본길을 포기하고 방향만 잡고 걸어보기로 했다.

우선 공항둘레길이라는 이름의 뒷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제주도를 오가는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 광경을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이날 함께 걸었던 고광언 선생은 “이 길은 처음 와 본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긴 하다,

그래서 그런지 공항 뒤편 텃밭 곳곳에 “이 땅은 국토교통부(제주지방항공청) 소관 국유지입니다. 국유지의 무단사용을 금지합니다..”라는 팻말이 여러 곳에 붙어 있었다.

공항 뒤편 땅도 거의 국유지라면 굳이 왜 다른 지역을 파괴해 가면서 제2공항을 지으려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지역 나머지 땅을 다 사버리면 적은 예산으로도 공항 확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길을 나와 다시 해안도로로 들어섰다.

이곳에서 보이는 바다도 여전히 포효하고 있었다.

이런 좋은 날씨 속에 낚시를 하는 사람들..

약간은 초여름 처럼도 느낄 수 있었던 완연한 봄날이었다.

용두암-도두봉을 잇는 제주시 해안도로는 제주시의 소중한 보물같은 곳이다.

제주를 처음 찾은 사람도 이 길은 모두 다 좋아한다,

제주바다가 주는 평안함 때문이다.

이날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차량도 사람도 만원이었다.

걸어가다 만난 용두암 아래 쪽에서는 해녀들이 잡아온 해산물 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그 자체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용두암을 지나 용연으로 걸어가는데, 노란 유채꽃이 화사한 거리가 나타났다.

이런 길은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 길이 된다.

용연다리를 지나 오늘의 첫 목적지인 용화사로 향했다.

한라산 미륵도량 용화사(주지 성홍스님)는 한국불교 태고종이었다.

서자복을 품고 있는 이 절에 들어섰을 때 보살님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서자복을 카메라에 담고 나오는데 한 보살님이 “음료수라도 드시고 가라”며 “오늘 산신제를 지냈다”며 우리를 편안히 맞이 해 주셨다.

우리는 “불교순례길을 걷고 있는데 스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했더니 성홍 스님이 나오셨다.

그리고 몇가지 대화를 나누게 됐다.

다음은 이날 잠시 나눈 용화사 성홍 스님과의 대화내용이다.

 

용화사 주지 성홍 스님
용화사 주지 성홍 스님

 

-용화사는 언제 생겼는지..

“이제 100년이 조금 넘은 절입니다만, 원래는 미륵보살님이 고려시대때 만들어졌으니 이 절의 부지는 고려시대때 창건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동자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자복이 있는 곳은 만덕사, 서자복이 있는 절은 원래 이름이 해륜사입니다. 지금은 그 만덕사 절이 없어져서 아쉽습니다. 이 용화사 절 주위도 또 동자복이 있는 그 주위도 모두 사찰부지였습니다. 지금은 너무 작아지고 말았지요.”

 

-언제 이 절로 오셨는지요..

“이 절에 온 지는 약 11년 정도 됩니다.”

 

-이 절만이 갖고 있는 특징은..

“제주도에는 옛날부터 폭우가 많이 내렸습니다. 당시 마을제를 지낼 때 이곳 서자복과 동자복에서 지냈고, 서자복이 동자복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옛날에는 바다에 나갈 때 풍랑을 막아 달라고 기도를 드렸고 자식을 낳지 못하시는 분들도 득남을 위해 기도를 드리기도 했던 곳입니다. 실제로 이곳에 와서 기도한 후 자식을 낳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예전에 제가 오기 전에 와서 보니 이곳이 쓰레기 천지였습니다. 제가 온 후 절을 이렇게 정비한 것입니다. 더욱이 이곳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라 건물을 신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뼈대가 되는 돌벽을 그대로 살려 지붕만 새롭게 한 것입니다."

 

-중생들이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해..

”마음을 비우면 됩니다. “

 

-어떻게 비우면 되는지..

”그게 어렵지요. 어려운 이유는 두뇌에서 전하는 집착 때문입니다. 그 집착에 의해 번뇌가 생기고 번뇌가 생기면 욕심이 생겨서 그걸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또 괴로운 것입니다. 뭔가를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하면 화가 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걸 못 이겨내면 번뇌가 생기고 행복이 불행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행복하려면 물 흐르듯이 살아야 합니다.“

 

-그게 참 어려운 일인데..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자꾸 수행을 하면 마음이 치유됩니다, 절에 오는 이유도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치유를 위해 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형상이지만 그 형상을 바라보면서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되는 마음을 자꾸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부처도 되고 깨달음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아직 미숙합니다만 오로지 내 버려 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은 스님들에게도 힘든 일입니다. ”

성홍스님과 함께 한 고광언 선생
성홍스님과 함께 한 고광언 선생

 

이날 용화사를 방문한 후 특별한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됐다.

서자복 미륵불 옆에 놓인 돌부처가 초창기 산방굴사에 원래 있던 석불이었다는 것.

산방굴사를 다시 조성할 때 이 불상을 누가 내다 버린 것인데.. 이 땅 주인의 과수원 밭에 굴러 다니는 것이 꿈에 나타나 송홍스님이 직접 모셔왔다고 한다,

이 석상의 이름은 약사여래부처님이라고 했다.

절에서 여러 보살님들과 인사를 나누는 중에 명함을 보더니 “고철주 과장을 아시느냐‘고 물어서 “아주 잘 아는 분”이라고 답해 드렸다.

고철주 전 제주도 환경정책과장의 부인도 이 절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는데 아까 보살님이 물을 종이컵에 들고 다시 다가와 “물 한잔 더 하시라”며 갖다 주셨다.

마음이 따뜻한 절이라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이제 길은 제주시 도심을 지나 사라봉으로 향한다.

산지천에 와서 물에서 노니는 숭어를 만났다.

그런데 여러 마리의 숭어 등에 상처가 있는 모습들이 많았다.

저 숭어들은 왜 등에 상처가 많은 것일까.

물에 무슨 문제가 있나 하는 걱정이 됐다.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물이 흐른다고는 하지만 이곳에는 여러번 공업용 화학폐기물을 몰래 버려 문제가 많았던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숭어들이 참 불쌍하게 보였다,

 

 

 

이어 건입동사무소 앞 동자복이 있는 곳에 다다르니 특별한 사진전이 바로 옆 건물에서 열리는 중이었다.

고영일이 만난 제주어머니들 ’우리 어멍, 어떵 살아시코예‘라는 제목의 사진전시회였다.

잠시 들러 사진전을 감상하고 나오는데 제주여민회에서 4.3체험 여성구술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의 전단도 하나 얻었다.

바로 옆 동자복이 있는 곳은 용화사와 달리 미륵불만 홀로 외로이 서 있었다.

위로 올라 바라 보니..

이곳에 작은 절 하나가 있었다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골목을 막혀 있었고..

옛날 옛적에 절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은 그런 지역이었다.

 

 

 

 

그곳을 지나 아파트 단지와 동대무들이라는 지역을 지나 사라봉등대쪽으로 향했다.

사라봉에 오르니 사라사가 있고 그 앞에 펼쳐진 제주바다..그리고 사라봉등대가 함께 한다.

사라사에서는 스님은 만나지 못하고 다시 보림사를 향해 걸었다.

조금 더 걸어 드디어 이날의 종착점인 보림사에 도착했다.

사라봉이나 별도봉은 자주 찾으면서도 보림사로 올라온 일은 없었다.

보니..이 절은 매우 큰 가람 같은 풍모를 자랑하는 절이었다.

사라봉에 이런 큰 절이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이곳 저곳을 살펴보는데..

이 절의 특이한 점 하나는 사천왕문 안에 그려진 사천왕의 모습이었다.

보통 사천왕문에 있는 사천왕들은 형상이 매우 무서운데 이 보림사의 사천왕은 너무 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사천왕이 이렇게 착한 모습이면 누가 겁을 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욱이 이 절 사천왕들은 모두 웃는 모습이었다.

나도 함께 미소를 띠며 사천왕과 만날 수 있어 즐거웠다.

 

 

 

 

그곳에서 나와 보림사 앞 사라봉과 별도봉 입구에서 보는 한라산은 이날 정말 장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상을 내려다 보듯 제주를 모두 감싸 안은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이날의 백미는 마지막에 본 이런 한라산의 웅장한 자태였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맑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성철스님이 쓰신 선불교 수행자들의 필독서라는 ’돈황본 육조단경‘에 나오는 말이다.

성철스님은 이 책에서 “곧은 마음이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다”라며 “마음에 아첨하고 곱은 생각을 가지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니라. 오직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는 6조 혜능선사의 게송을 전했다.

불교순례길을 걸으면서 불교에 대해 하나씩 더 알아가는 재미도 큰 것 같다.

자꾸 불교경전을 가까이 하게 되기 때문이다.

돈오점수라는 말이 단박에 깨치고 천천히 수행한다는 뜻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된 말이다.

하지만 혜능대사님은 "단박에 깨닫는 돈오돈수뿐 점수는 없다"고 분명히 했다고 한다.

누구나 이론으로는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여러 스님의 말씀처럼 이를 실행하기는 사실 어려운 일이 수행인 것 만은 확실하다.

불교순례길을 걸으며 스님 한분 ,한분을 만나 듣는 그 말씀 한마디가 우리에게는 큰 복이다.

 

 

 

 

 

다음은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의 서자복에 대한 해설 내용이다.

 

 

용담1동 복신미륵(서자복)

 

복신미륵(福神彌勒, 서자복)
문화재 지정사항 ; 지방민속자료 제1호
위치 ; 제주시 용담동 385번지 해륜사 구내
시대 ; 고려
유형 ; 불교 유적(미륵신앙)



이 석상(石像)은 '자복(資福)' '자복미륵(資福彌勒)'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며, 그 형상이 특이할 뿐더러 제주 다공질 현무암으로 조각된, 기자신앙(祈子信仰)이 감도는 진중(珍重)한 민속자료이다.

건입동의 동자복과 용담동의 서자복은 둘 다 달걀 모양의 둥그스름하고 얌전한 얼굴에 벙거지 같은 감투를 써서 늠름히 서 있는 모습으로, 그 키는 동자복이 334cm, 서자복은 290cm이다.

어느 것이나 다 형상과 조각 수법이 같은 것으로 보아 동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신기한 것은 동자복과 서자복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미륵이 민간에서 명복신(命福神)으로 숭배되고 있음은 같은데 구체적으로는 그 기능이 조금씩 다르다. 《제주시 옛지명》에는 한두기 미륵보살은 '할망'이고 건입동의 것은 '하르방'이라 한다.


동자복과 서자복은 조선시대(1700년 전후) 무속 및 불교 타파 정책에 의하여 분괴(焚壞)되면서 원래 이 사찰에 세워졌던 미륵불만 남은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서자복이 있는 자리는 해륜사(海輪寺, 일명 서자복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海輪寺 一名西資福寺在州西大瓮浦口〉라고 되어 있어 1650년대까지는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두 사찰은 모두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조선시대(1700년 전후) 무속 및 불교 타파 정책에 의하여 분괴(焚壞)되면서 원래 이 사찰에 세워졌던 미륵불만 남은 것이다.

숙종28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쓴 남환박물에도 복신미륵을 뜻하는 기록이 있다. 《제주성 동쪽에 만수사가 있고 서쪽에 해륜사가 있는데, 각각 불상은 있지만 상시 관리인이 없어 마을에서 사람을 정해 돌보고 있다.

설과 단오, 추석, 동지 등 네 명절 때면 사람들이 모여 예불할 따름이라 오래 둘 수 없으니 두 사찰을 헐어 관아를 세우라고 했다고 한다》는 내용이다.(제주일보 140306)

미륵은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7억년 후에 세상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이다.

석가모니는 과거에 해탈한 붓다이고, 미륵은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종말 또는 개벽의 그 때에 도솔천에서 지상 세계로 내려와 미륵정토를 여는 미래불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처럼 때가 되면 재림할 재림불이다. 석가모니불은 좌불인데 반하여 미륵은 입불이다.

석가모니는 이미 해탈하여 편안하게 좌정해 있는 반면 미륵불은 미래를 내다보며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앉아 있지 못하고 서서 천리안으로 세상을 앞질러본다는 말도 있다.

미륵불은 우리 나라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보통 투박하고 거칠게 민간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서 볼품은 없지만 무척 친숙한 느낌이 든다.(제주문화의 향기 280쪽)

서미륵은 현재 고려시대의 사찰 이름과 같은 해륜사(구 용화사) 구내에 있는데 1990년대말까지만 해도 이 미륵을 보호하기 위하여 龍王閣이라는 각을 지어 놓고 있었다.(현재는 용왕각이 철거되었다) 이 미륵이 용왕신앙과 관련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근처의 주민들은 해상어업의 안전과 풍어, 출타한 가족의 행운을 빌면 효험이 있다 하여 치제하고 있다. 또한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한편, 서미륵의 옆에는 童子彌勒 또는 동자보살이라고 하는 석물을 세워 모시고 있다. 높이 약70cm, 원주 약 1m 되는 남자 성기 모양의 것인데 이것은 본래 해륜사 자리인 절왓에서 발견하여 모시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여기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는다고 믿고 있다.(제주의 문화재 188쪽)

한두기 미륵보살은 '할망'이고 건입동의 것은 '하르방'이라 부른다고 한다.(제주시 옛지명 255쪽) 특히 서자복이 있는 용담동 일대의 주민들은 이 미륵불을 '큰어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자비에 대한 신앙은 절대적이다.

'미륵부처는 덕이 있어 궂은 일을 막아 주고 아기 못 날 때 가서 빌면 득남도 시켜 줍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미륵신앙은 '기자의례'와 관계가 깊다. 더구나 주민들은 악질의 만연에도 이 미륵불이 막아 준다고 믿는다.(제주의 옛지명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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