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붉은오름 서쪽에 상잣 남아 있어.. 가시리 9소장 상잣(잣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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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붉은오름 서쪽에 상잣 남아 있어.. 가시리 9소장 상잣(잣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4.28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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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소장은 세종11년(1429) 고득종의 건의에 의해 시작된 우마방목장이다

가시리 9소장상잣(잣담)
 

위치 ; 가시리 산158번지 일대. 붉은오름 북쪽 남조로 서쪽에서 동서 방향
시대 ; 조선
유형 ; 생산기술유적(잣담)

 

 

가시리_9소장상잣

 

제주도 목마장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쌓은 타원형의 잣담 165里를 10개의 목구(牧區)로 나누어 10개 소장(所場)과 1,2,3,9,10所場의 上墻(상잣)을 경계로 하여 산장(山場=山馬場)이 설치되었다.


10소장은 세종11년(1429) 고득종의 건의에 의해 시작된 우마방목장이다. 이 건의는 상호군 박호문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적부를 조사하게 하고, 세종12년(1430) 2월에 도안무사 장우량에 명하여 한라산 중턱 165리에 돌담을 쌓기 시작하여 완성된 것이다.


맨 처음 하잣을 설치한 것에 대해서도 세종16년(1434) 5월의 기록을 보면 목장 안의 풀이 성하지 않음과 목자가 5일마다 말의 수를 헤아리기 위해 평지를 몰아다니어 노곤하다는 이유를 들어 잣을 헐고 마필이 마음대로 다니면서 목양할 수 있게 하자는 건의가 있었고 이에 따라 그 해 가을에는 하잣을 헐어 버렸다.

또한 동년 6월16일에는 사헌부에서 담을 쌓음이 타당하지 않고 사익을 위하여 담을 쌓도록 했다고 주장하여 고득종과 장우량의 직임을 파직하였다.

이에 대하여 동년 6월30일 고득종은 ①한라산에 상록수가 많아 여름과 겨울에 더위와 추위를 피하기에 좋고 ②화전으로 목초지가 줄어들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잣이 필요하며, ③말이 여윈 것을 잣담을 쌓은 까닭이 아니라 양떼처럼 몰고 다니기 때문이고, ④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했다고 하나 자신의 고향인 교래리가 방목장이 되었는데 어찌 이익을 사익을 좇은 것이겠는가 하며 다시 답사하여 그 증험을 가지고 따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에도 잣담은 계속 쌓았으며 성종24년(1491) 8월 개성부유수 고태필(고득종의 子)의 상서에 따르면 한라산 중턱에 10개의 목장이 설치되었는데(山麓以下周回設十牧場) 소장의 주위가 1식(息)반에서 2식이며(一場周回一息半惑二息. 1息은 45~60里) 소장 내에는 점마할 때 말들을 모아 모이게 하는 환장(環場)과 한 필 한 필 확인할 수 있는 사장(蛇場)을 갖추고 있었다.


하잣은 해안지역의 마을이나 경지와 목장의 경계를 돌로 쌓은 것이며, 상잣은 우마가 고지대로 들어가 얼어죽거나 망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한라산 쪽에 쌓은 것이고, 큰 하천이나 오름을 경계로 담을 쌓은 것이 간장(間墻=선잣)이라고 하며 각 소장의 경계가 된다. 정조4년(1780) 김영수 목사 때에 1소장과 2소장 사이에 간장(間墻) 936보(步), 횡장(橫墻=상잣)은 3소장에 1,110보, 5소장에 1,530보, 산마장에 11,013보를 쌓았다.


정조6년에는 산둔(=산마장)에 쌓은 잣담을 허무는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원하지 않는 백성도 있으니 더 두고 보다가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침장(針場) 안에 가로로 쌓은 잣담은 백성이 허물기를 원하므로 우선 따르도록 하였다. 제주어사 박천형은 산마장의 둘레는 40리이고 마필은 2,000여 필이나 목장 안쪽에 횡축(橫築)한 이후 안쪽의 면적이 매우 좁아 말이 그 본성을 잃고 또한 물과 풀이 없기 때문에 매년 죽는 말이 800여 필이나 된다는 보고를 듣고 잣담을 허물도록 하였다.


중잣은 1800년대 이후에 상잣 내에 방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겨울과 봄철에는 중잣과 하잣에서, 여름과 가을철에는 중잣과 상잣 사이에서 방목한다.


제주계록(1846~1886)의 마정(馬政)에는 당시 잣담을 장(墻=담장)과 원(垣=낮은 담)으로 상하장원(上下牆垣=교래리에서 한라산 쪽에 있는 하잣과 상잣)은 허물어지는 대로 수축하고 흩어져 잃어버린 말떼는 마필마다 몰아들일 것을 명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제주도 목장(=所場)에서 기후가 온화하여 終年放牧(=年中放牧)할 수 있었으나, 겨울철 풀이 말라 버리고 눈과 비의 피해로 영양실조에 걸려 폐사된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철 말 관리를 위해 각 목장마다 피우설가(避雨雪家=관리사)를 지어 건초를 쌓아 두고 마르고 병들어 보이는 말은 여기서 관리하여 이듬해 봄에 방목하였다.


표선면 가시리에 소재한 붉은오름의 북쪽 남조로 서쪽에 9소장의 상잣이 남아 있다. 서쪽으로는 남원읍 한남리 오름목장 쪽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가문이오름 쪽으로 이어진다.

9소장의 하잣은 남원읍 수망리 산84번지 일대~위미리 자배오름 뒤쪽으로 이어지며, 중잣은 수망리 산10번지 일대 물영아리 남쪽~여문영아리~대록산으로 이어진다.
《작성 1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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