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이 섬 최초 신 교육기관 창설..가파리(가파도) 김성숙先生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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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이 섬 최초 신 교육기관 창설..가파리(가파도) 김성숙先生像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5.22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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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가파국민학교 모체 신유의숙(辛酉義熟) 창설, 2년 동안 가파도민 훈학에 힘썼다.

가파리(가파도) 김성숙先生像

위치 ; 가파초등학교
시대 ; 일본강점기
유형 ; 동상

김성숙

 

가파도_김성숙 동상

 

김성숙(金成淑)은 1896년 6월 4일 가파도 59번지에서 김용석 진사의 아들로 태어나 이 섬의 문화적인 향상에 힘을 쏟아 최초 신 교육기관을 창설하였고 정당의 당수, 국회의원까지 당선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이 나라 최남단의 섬 가파도에서 태어나 12세까지 한문을 수학하다가 개화사상을 일찍이 터득한 아버지에 의하여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19세 때 청운의 뜻을 품고 유학길에 올라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4년이 지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4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성숙은 학생들을 주도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다. 3월 5일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가 면소 판결로 8월 30일 풀려났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퇴학처분을 당하고 불령선인으로 감시를 받는 처지가 되어 가파도로 귀향하였다. 돌아와서는 향토의 개발을 위하여 교육사업에 투신하였다.


그는 먼저 대정보통학교 부설학교를 모슬포에 세운 바도 있지만 1921년에 가파도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현가파국민학교 모체인 신유의숙(辛酉義熟)을 창설하여 스스로 초대 숙장이며 교사가 되어 교편을 잡아 2년 동안 가파도민 훈학에 힘썼다.

신유의숙의 학생 모표가 무궁화 도안이었던 관계로 일본 관헌의 감시와 탄압을 받은 바 있다. 원래 신유의숙은 상동에 있었으나 1932년에 가파리 275번지로 이전하였다. 신유의숙의 교사진은 다음과 같다.


김한정(金漢貞, 가파도 출신으로 8년 동안 교편을 잡았으며 김성숙 도일 후 실질적인 운영자), 이신호, 송종현(축구 지도, 가파도가 작곡), 장종식, 이도일, 박창계, 김호천, 조응호, 문달진, 강성화, 이치화, 김옥천, 강종호, 김태능(《제주도사논고》의 저자), 이병호, 김창일, 이창효, 강창거(독립운동가), 김창하, 이원정, 정재경, 박용후, 문시욱, 송병길, 이정백, 강문석, 정호명, 이두옥, 고경수, 김태순, 허기린, 이원함, 이원오, 김동우, 강군섭, 강문범(독립운동가) 등이다. 한 마디로 항일운동가가 많았고 일찍 개화사상에 눈을 뜬 사람들이다.(남제주 문화유적 90쪽)


그는 큰 뜻을 품고 도일, 조도전대학정치학부(早滔田大學政治學部)에 입학할 때까지 부동의 토대 위에 올려놓고 제주시에서 훌륭한 교수들을 초빙하여 의숙을 맡겨 놓고 도일한 것이다.

조도전대학(早滔田大學)을 졸업한 다음에는 조국독립을 위한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여 민족의 독립운동에 힘을 쓰다가 투옥생활을 겪었으며 해방이 되자 정계에 투신 당신의 야당인 한국사회당의 당수로서 활약한 바 있으며, 4․19의거 직후, 제5대 민의원 선거시에는 야당(혁신계 정당인 통일사회당)으로 입후보하여 여당입후보자를 물리치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선거시 가파도민으로서는 4표를 제외하고는 전 유권자가 그를 지지하였던 것으로 보아 가파도민들에게는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선거기간에 공약했던 4·3 진상규명에 직접 나섰다. 1961년 1월 26일 다른 동료 의원들과 함께 제주도 양민학살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대정부 건의안을 민의원에 제출했다. 이 건의안에서 그는 4·3사건과 6·25전쟁 때 적어도 4만에서 5만명의 양민이 학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정부에 따질 구체적인 자료가 적다고 하면서 도민 특히 피해가족의 고발정신을 촉구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2017, 『제주4·3 70년 어둠에서 빛으로』102쪽)

문하생들과 리민 일동은 김성숙선생이 지닌 향토애와 교육열을 추모하기 위하여 가파국민학교 정문 남측 도로변에 1981년 12월에 그의 동상을 건립한 바 있다.


동상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있다.


김성숙선생 행력 ; 서기 1896년 향리 가파도에서 탄생하시고 1908년까지 한학을 정수하시다 1919년 명문 경성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 도일하시어 동경 조도전대학정치학과(早滔田大學政治學科)를 졸업하셨다. 1919년 기미 독립운동에 참여 투쟁중 검거, 투옥을 치루시고 귀향하시어 가파 신유의숙을 설립 문맹퇴치운동에 앞장서시고,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으로 민주정치 향도에 헌하셨다.


추모사 ; 오호(鳴呼) 선생님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서 조국의 독립을 수호하시려 기미독립운동에 선봉 투쟁하시다. 옥고에 수난하시고도 향리의 문맹퇴치를 위해 신유의숙을 설립하시어 오늘에 이 배움터를 남기시니 그 지대한 공적을 찬양하고 영원히 기념하고자 상(像)을 뜻 모아 세우나이다.
기미 1981년 12월 일 <가파도민 문하생 일동 근립 >

가파도 신유의숙가(작사․작곡 김성숙)


1. 활발하고 건강한 우리 학도는 \ 일조의 성광이 비치었으니 \ 소리를 마주치고 용맹스럽게 \ 아~~~ 찬송합시다.


2. 위롭다 한라산을 쳐다 보셔요 \ 맹렬한 동풍한설 몇번 지나도 \ 만고불변 엄연하기 군장의 절개 \ 아~~~ 고상하도다.


후렴 ; 신성하라 우리 학교여 \ 화려하다 우리 학교여 \ 무궁화 새 가지의 꽃이 아닌가 \ 아~ 잘 배양합시다.
《작성 131228, 보완 17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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