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도 흑우는 중요한 진상품.. 가파리(가파도) 별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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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주도 흑우는 중요한 진상품.. 가파리(가파도) 별둔장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5.23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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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우 방목, 진상 대비 낮고 평평한 완경사지[용암대지]를 목장으로 이용했다.

가파리(가파도) 별둔장

 

위치 ; 가파도 전체. 잣담이 남아 있는 곳은 동쪽 해안.
시대 ; 조선
유형 ; 목축유적(목장)

가파도_별둔장잣담 중경
가파도_전경(디서문_항공촬영)

 

승정원일기 인조5년 정묘(1627) 10월 9일 기사를 보면 〈전생서 제조(典牲署提調)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제향(祭享)에 쓸 흑우(黑牛)를 제주(濟州)에서 내어다 충청도에서 나누어 사육하고 있는데, 기일 전에 기르다가 살이 찌기를 기다린 후에 올려 보내면 본서에서는 또 수개월 동안 특별히 사육한 후에 진배(進排)하는 것이 관례입니다.”〉라고 하여 제주도에서 흑우는 중요한 진상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조실록 성종22년(1491년) 5월 16일에는 “전일 제주(濟州) 가파도(加坡島)의 아마(兒馬)-길들지 않은 작은 말- 3필을 좋은 준마(駿馬)로 여겨 별도로 길렀으나, 한 마리는 병이 들어서 죽고 두 마리는 간 곳을 알 수가 없으니,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일찍부터 가파도를 방목장으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51년 목사 정언유(鄭彦儒)가 조정의 제사에 희생으로 이용하는 흑우를 방목하기 위해 대정읍 가파리도에 설치한 특별 목장이다. 가파도 별둔장(加波島 別屯場)에서는 흑우를 방목해 진상에 대비하기 위해서 낮고 평평한 완경사지[용암대지]를 목장으로 이용했다. 가파도는 제주도 남쪽에 위치해 겨울철에도 온화하여 연중 방목이 가능했던 섬이었다.


또한 일찍이 제주인 이지발(李枝發)이란 자가 말을 가져다 풀어 키운 적이 있었고 『제주읍지』에 의하면, 목장의 공간규모가 주위 10리 정도였으며, 방목하는 소는 103두라고 했다. 대정읍지에선 75마리가 사육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파도 별둔장의 최고 책임자인 우감은 모슬진 조방장(助防將)이 겸했으며, 찰색사 1명, 군두 〇명, 목자(牧子) 8명에 의해 목장이 운영되었다. 특히 목자는 16세부터 60세까지 평생 동안 역(役)으로 우마생산과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세습직이었다. 1807년 「호적중초(戶籍中草)」에는 대정읍 하모리에 당시 28세인 강성발(姜成潑)이라는 목자가 등장한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일성록 정조8년 갑진(1784) 11월27일 기사에는 제주 목사 엄사만(嚴思晩)이 진휼을 청한 장계를 회계(回啓)한 데 대해 하교한 말 중에 〈… 내년 추수 때까지 천신(薦新)하는 황과(黃果) 및 제향에 쓰는 흑우(黑牛)를 제외하고, 각전(各殿)의 삭선(朔膳)에 들어가는 물선(物膳), 삼명일(三名日)의 방물(方物), 내국(內局)에 진상하는 약재(藥材), 서울과 지방의 각 영문과 각 아문에 진배(進排)하는 물종(物種), 내사(內司) 및 각 궁방(宮房)이 소관하는 노비의 신공(身貢)을 특별히 탕감(蕩減)하여 진자에 보태도록 하라.〉고 하였다. 다른 것은 탕감하여도 제향에 쓸 흑우는 탕감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만큼 가파도 별둔장의 흑우 사육은 중요하였을 것이다.


승정원일기 순조23년(1823) 기록에는 ‘가파도의 소들은 공헌하기에 적당하지 못해 부근 목장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백성들에게 목장토를 개간해 먹고 살게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제민일보 160427 강만익 글)


헌종6년(1840) 영국 선박 2척이 정박해 흑우를 약탈해 간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목장관리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정현감과 제주목사 구재룡(具載龍)을 파면시켰는데 이에 대한 왕조실록(헌종6년 경자(1840, 도광20) 12월30일)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라 감사 이목연(李穆淵)의 장계(狀啓)를 보았더니, 제주 목사 구재룡(具載龍)의 첩정(牒呈)에 이르기를, ‘대정현(大靜縣) 모슬포(墓瑟浦) 가파도(加波島)에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 2척이 와서 정박하여 감히 포를 쏘고 소를 겁탈하는 변까지 있다.’ 하고, 이어서 현감(縣監)을 파출(罷黜)하고 나처(拿處)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오랑캐의 배가 바다에 출몰하는 것은 본디 교활한 버릇이니, 오랫동안 해이해진 해졸(海卒) 때문에 어모(禦侮)를 튼튼히 하라고 책망하기 어렵다 하나, 온 섬의 포항(浦港)이 다 사변에 대비하는 중지(重地)에 관계되므로, 경비하는 방도를 본디 충분히 규찰(糾察)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저들은 40여 인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하여 먼저 스스로 두려워하여 달아나기에 겨를이 없기까지 하겠습니까? 변정(邊情)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해당 목사 구재룡을 파출하고 나처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그들은 대포를 쏘며 흑우를 약탈하였다고 했는데 이 때 쏘았던 대포알은 크기가 둥근 박만 하고 무게는 30근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후 헌종8년(1842)에는 흑우를 인근의 모동장으로 옮기고 1843년에 폐장한 다음 경작을 허용했다.
《작성 131228, 보완 1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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