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우리나라 ‘희망봉’ 등대.. 마라도 등대(마라도항로표지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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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우리나라 ‘희망봉’ 등대.. 마라도 등대(마라도항로표지관리소)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5.25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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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3월 4일 [조선총독부고시 46호]에 의거 마라도 등대 건설.. 제주시 건입동 산지등대보다 1년 앞서

마라도 등대(마라도항로표지관리소)

 

위치 ; 대정읍 가파리 642번지. 마라도 남동쪽 해안. 부지 면적은 1만 9636㎡이다.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신호유적

 

마라도_등대

 

제주도에서는 ‘우도 등대’가 1906년 3월에 불이 켜졌는데,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이다. 1915년 3월 4일 [조선총독부고시 46호]에 의거 대정읍 마라도에 마라도 등대가 건설되었다. 제주시 건입동 산지등대보다 1년 앞선 것이다.

마라도에서 가장 높은 해안 절벽은 해발 36m이며, 그 위에 마라도 등대가 서 있다. 일본군에 의해 군사상의 목적으로 건립된 마라도 등대의 최초 점등 시점은 1915년 3월로 아세리친(아세틸렌의 오기?) 가스를 이용한 무인 등대였다.

등탑은 높이 6.1m의 백색 원형 벽돌 건물이었다. 건립 후 일본군이 상주하여 등대를 운영하며 군사 통신 기지로 사용하였다.


해방이후 ‘군인집’으로 불리기도 했던 마라도등대는 4.3 때 서북청년단들에 의해 파괴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는데 당시 라봉필이라는 마라도 사람이 서북청년단들을 설득시켜 파괴위기를 면했다고 한다.

그 후 라봉필씨는 자진해서 등대지기가 되었고, 라씨를 비롯한 동네남녀 모두가 조를 편성해 밤이면 등대에 올라가 손으로 직접 등을 돌렸다고 한다.

라봉필씨는 정부수립 전까지 등대를 관리했는데 순전히 무료봉사였다. 정부가 수립되면서 3년 동안의 보수를 한꺼번에 받았다고 하는데, 라씨 후손들은 밀가루 등의 구호물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라봉필씨는 정부수립 이후에도 계속 근무해줄 것을 교섭받았지만 사양했고, 등대 운영은 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55년 5월부터 유인등대가 됐으며 1987년 등탑을 높여 16m의 백색 팔각형 콘크리트 건물로 다시 지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등탑은 예전 그대로가 아니다. 다만 돌담은 예전 그대로이다.


마라도 등대는 동중국해와 제주도 남부해역을 오가는 선박들이 육지초인표지로 이용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희망봉’ 등대이다.

등질은 10초에 한번씩(섬백광 10초1섬광/FIW10s) 반짝이고 약 48㎞ 거리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대략 21마일이나 간다는 3등급 촉광이다. 3등급 대형등대는 무안군의 칠팔도,홍도와 더불어 우리나라에는 네군데밖에 없는 것이다.


무신호(霧信號) 음파 표지 기종은 공기 압축기[에어사이렌]로 되어 있으며, 취명 주기는 30초에 한 번씩[취명 5초, 정명 25초]이고, 9km 정도까지 퍼져나간다.


2000년 6월 태양광발전시스템을 증설하고 2001년 4월에는 풍력발전시스템을 설치하였다. 세계 각국의 해도에 제주도는 표기되어 있지 않아도 마라도의 등대는 표기가 되어 있다고 한다.

2009년 해양수산부는 2만여명을 상대로 우리나라 유인등대 41곳 중 가장 아름다운 등대 설문조사에서 16곳을 선정했는데 제주도의 우도와 마라도 등대가 선정되었다.

등대 옆에는 해양 문화 공간이 조성되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와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절벽이 있어서 앞의 바다를 바라보는 풍광이 더욱 아름답다.

현재 항로 표지 관리원은 총 3명으로 한사람이 8시간씩 교대로 마라도 등대를 관리하고 있다. 등대 부근에는 최남단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디서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해양수산부 바다여행, 제주민속관광대전, 문화원형백과 한반도 해양문화, 제주e렌터카 카페)
《작성 1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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