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순례길 탐방) "존자암은 유명한 절로 알았더니..속세 생각 이미 함께 사라지네."
상태바
(불교순례길 탐방) "존자암은 유명한 절로 알았더니..속세 생각 이미 함께 사라지네."
  • 고현준
  • 승인 2022.06.02 19: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절로 가는 길, 존자암으로 오르는 길은 천상의 숲속 화원..화목의 길

 

 

 

존자암

 

이경억의 시

 

존자암은 유명한 절로 알았더니

이제 보니 황폐하여 쓸쓸한 옛터일세

쳔년 묵은 외로운 탑은 남아 있고

한 방은 두어개 서까래만 남아 있네

바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이 별로 없고

남쪽지방 스님은 예불이 어색하다

가을하늘의 노인성 바라보니

속세 생각 이미 함께 사라지네.

 

옛날에 한라산 영실에 있었다. 그곳 골짜기에 승려가 도를 닦는 모습을 한 바위가 있어 민간에서는 수행동이라고 전해온다, 지금은 서쪽 기슭 바깥 10리쯤 되는 대정현 구역으로 옮겼다.

 

어사로 제주에 내려왔던 이경억의 존자암에 대해 적은 시와 함께 탐라지에 나오는 존자암에 대한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존자암에는 샘물이 나오는데 백보쯤 흘러 땅속으로 스며든다는 내용도 나온다.

이곳 존재암이 영험한 곳임을 이미 선인들은 알았던 것일까...

 

 

 

영실주차장에서 존자암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푸르름의 천국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숲길은 마치 천상의 화원을 걷는 느낌이었다.

이런 길은 우리나라 삼보 사찰의 하나인 송광사에서도 느끼기 힘든 그런 길이었다.

길가에는 조릿대가 한껏 그들의 세상임을 뽐내는 듯 우거지고, 또 우거졌지만 그들 위로는 우뚝 장엄하게 서 있는 나무들이 또한 웅장한 한라산의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존자암으로 오르는 길은 길이 하나 밖에 없다.

그 오솔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존자암이 돌연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불교순례길에서는 보이지 않던 안내 리본이 그곳에는 유독 가득 달려 있었다.

정작 필요한 곳에는 없고, 필요없는 곳에는 있는, 그런 불합리한 모습이 이런 곳에 있었다.

이 길의 특이한 점은 유독 연리목이 많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자연의 조화이긴 하지만 수십개의 다양한 연리목이 이 길에는 가득 했다.

조용한 숲속에서 나무끼리 사랑을 나누기에 적당하다는 뜻일까.

꼭 껴안고 있거나 껄떡거리는 연리목도 있고 싸웠거나 사랑이 식은 그런 연리목도 보였다.

연리목의 향연이라 불리워도 좋을..

드물게 만나는 연리목 세상이 이곳에는 가득해 색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숲속을 걷는다는 건 그런 걸 보는 재미라도 있는 게 좋다.

계곡도 이곳에는 몇 개나 있었고-비록 물이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모노레일 운반차도 존자암까지 연결돼 있었다.

그런 아름다운 숲길을 걷는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이런 길에서 무슨 근심 걱정을 하며, 기분이 안 좋을 이유가 무엇일까..

 

 

 

 

철도 궤도를 견디었을 철도용 부목으로 길을 만들어 낸 것도 특이했다.

튼튼한 나무가 길을 잘 감싸 안고 있었다.

그렇게 30분 쯤 올라가니 존자암이 나타났다.

그 길 입구에 갑자기 나타난 일주문은 존자암에서 조금 멀리 서 있는 듯 했다.

홀로 남은 일주문을 따라 언덕을 조금 오르니 이날의 목적지인 아름다운 존자암이 나타났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존자암은 어떻게 이런 곳에 절을 지었을까 할 정도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대웅전을 지나 부도가 있는 곳까지..

따뜻함이 서린 그런 모습으로 존자암이 서 있어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선사했다.

계절 따라 변했을 존자암으로 가는 길..

가을에는 꼭 다시 한번 더 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할 정도로 존자암은 가는 길 또한 아름다웠다.

 

불교순례길을 수행하듯 걷고 있는 고광언 선생

 

마치 수행을 하듯 불교순례길을 걷는 고광언 선생과 필자는 존자암을 내려와 시내로 향하는 길에 잠시 천왕사에 들렀다.

천왕사는 제주시내권과 가까운 곳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친근하게 찾는 절이다.

대웅전 앞에서 보면, 사람처럼 보이는 자연석과 대비돼 앉아 있는 해태상이 험악한 인상을 쓰고는 있지만 포근했다.

요즘 매주 한번 절로 가는 길을 걸으며 평소에는 가지 못하는 많은 절을 순례하고 있다.

불교순례길은 코스만 잘 만들면 제주불교계를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아직 제주불교계가 그런 노력을 한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모두가 남의 일이라는 생각이라도 하는 것일까..

존자암만 해도 그렇다.

아는 사람만 아는 존자암..

존자암에 대해 잘 모르는 이가 많다.

 

 

 

 

다음은 존자암에 대한 설명이다.

이번 기회에 존자암지와 이곳 부도에 대한 전체 이야기를 정리한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의 설명을 덧붙인다.

 

하원동 존자암지

尊者庵址〈제주도기념물 제43호 ; 1996년 지정〉

 

1. 존자의 뜻

존자(尊者)는 불가(佛家)에서 석가세존(釋迦世尊)이 직접 제자 등에 석가를 대신하여 불교를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제자에 한하여 높여 부르는 칭호이다.

 

2. 존자암지의 위치

한라산 영실 서쪽 볼래오름 중턱 해발 1210고지 하원동 산1번지

 

3. 발굴

※ 존자암지의 발견 ; 현재 존자암 주지를 맡고 있는 법정스님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법정스님이 계속적으로 관계당국에 발굴을 요청함으로써 발굴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⑴ 기간 ; 1993년 3월 16일 - 10월 31일

⑵ 발굴 주체 ; 제주도의 용역을 받아 제주대학교 박물관(관장 이청규)에서 담당함.

 

4. 발굴된 유적

⑴ 선방(정면 5간,측면 3간 정남향) 건물터

⑵ 대웅전 건물 터(정면 넓은3간, 측면 3간 지붕과 벽이 판자로 되어 있었다고 함 ; 남사록의 9간 집 기록과 일치) ※ 위 2개의 건물 터를 포함 5개의 건물터가 발굴 조사됨(제주도·제주대학교박물관, 존자암지. 26-37쪽)

⑶ 목탑의 심초석(위의 존자암지에는 언급되지 않음)

⑷ 국성재 제단의 유구(遺構)

⑸ 부도(浮屠) 및 부도지 ; 고려시대의 특징인 8각의 기단 위에 놓인 하대를 옆에서 깎아 들어가 직경 23cm의 사리공(舍利孔)이 돌출되도록 만들어짐(늦어도 고려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됨). 제주도 유일의 부도임.(이상 제민일보 1993년 9월 13일)

⑹ 비각지(碑閣址) 및 담장지 ; 발굴 당시 비각지에는 옥개석과 지대석이 놓여 있었고, 최근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이용되었던 돌담과 제단이 남아 있었다.

⑺ 계단지(階段址) 3개소

⑻ 단(壇) ; 경사진 산능선에 건물 시설을 하기 위해서 지면 정리를 했던 곳

⑼ 배수시설(排水施設)

 

5. 유물

⑴ 명문(銘文)기와류 ; '万戶兼牧師'(만호겸목사) '千戶夫承碩'(천호부승석) '造'(조) '天日開局'(천일개국) '高'(고) '壬'(임) 자 등이 양각되어 있음

⑵ 평기와류 ; 선조문, 파상문, 무문 암기와 및 복합문, 수지문 숫기와

*기와는 모두 평기와편만이 출토되었고 막새류는 단 한 편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들 기와는 조선전기의 어골문 계통의 유문평와(有文平瓦)와 조선중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경질의 무문평와(無文平瓦)로 크게 나누어지며 명문와는 모두 조선초기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⑶ 생활용구 ; 청자, 분청사기, 백자, 명문백자(도자기는 주로 백자편과 분청사기편이며 청자편은 소수 출토되었다. 출토된 백자편 중에 '毛老園'(모로원) '大靜'(대정) '和順'(화순) 등 옛 대정현의 마을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靑銅蓋(청동 뚜껑) 및 벼루(이상 제주도·제주대학교박물관, 존자암지 45-120쪽), 맷돌(존자암 8쪽)

⑷ 불구(佛具) ; 목탑지(木塔址)에서 출토된 사리장엄을 보존하는 동제(銅製)그릇, 청동제신장상(靑銅製神將像)

 

6. 존자암 관련 기록

⑴ 고려대장경 제30권 法注記(법주기)--"부처님의 16존자 가운데 6번째 발타라존자가 자기 권속 9백 아라한과 더불어 耽沒羅洲(탐몰라주)에 많이 나누어 살았다."

⑵ 동국여지승람(1481) 佛宇(불우)편--"尊者庵 在漢拏山西嶺其洞有石如僧行道狀諺傳修行洞"--존자암은 한라산 서령에 있는데 그 동에는 돌이 있어 스님이 행도하는 모양과 같으므로 속전하기를 수행동이라 한다.

⑶ 남명소승(南溟小乘)--1577년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제주목사로 재직중인 부친을 뵙기 위하여 왔다가 제주의 풍물을 적은 기행문이다.

'암자에 머물면서 날씨가 개인 틈에 5,6리를 가서 영실을 구경하고 다시 존자암으로 돌아와서 날씨가 쾌청함을 기다려 정상에 올라 구경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존자암은 볼래오름의 중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⑷ 남사록(南 錄)--1601년 청음 김상헌이 길운절과 소덕유의 모반 사건에 대한 안무어사로 왔다가 쓴 기행문이다. 그 중 존자암條에 충암 金淨(김정)의 존자암記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존자암이 된 것은 삼성(高良夫)이 처음 일어난 때 만들어져서 삼읍이 정립된 후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또 암자의 면세(面勢)는 상지서(相地書)에 많이 들어맞는다고 그 터를 말한다.

곧 주봉이 하나로 합쳐 올라가면서 둥글고 높아 가파른가 하면 점점 낮아 황홀함이 난봉(鸞鳳)이 날다가 내려앉아 그 새끼를 돌보는 것 같음이 현무(玄武)의 기(奇)요 한천(寒泉)의 근원(根源) 깊이 졸졸 쏟아져 맑고 향기마저 차갑다.

이른바 월덕(月德)의 방향으로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니 주작(朱雀)의 이(異)다. 든든히 이어지고 뻗어나간 허리를 왼 팔이 그 끈을 풀려고 하는 것 같으니 청룡(靑龍)의 승(勝)이다.

꼬리를 끌어 복행(復行)하는 머리를 오른 손이 그 무릎을 만지려는 것 같으니 백호(白虎)의 미(美)다. 이것이 지리(地理)의 비(備)다.

(중략) 또 말하기를 첫여름달(4월) 길일을 점치어 삼읍 수령 중에 한 사람을 보내어 목욕재계하여 이 암자에서 제사를 지내니 이를 국성재(國聖齋)라 하였는데 지금은 폐한 지 겨우 8,9년이라 하였다. 암자의 집은 9간인데 지붕과 벽이 모두 판자로 기와와 흙을 대신하였다.

이를 승에게 물으니 산중의 흙은 점액(粘液)이 없고 사석(沙石)이 많아서 흙을 바르는 데 알맞지 아니하고 기와는 반드시 뭍에서 사오기 때문에 힘써도 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중간에 누차 흥폐(興廢)를 겪었는데 계사년(癸巳年) 사이에 강진에 사는 승이 부친을 대신하여 방번(防番)온 자가 있었는데 방번이 끝나자 이어 재물을 내놓아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⑸ 탐라지(耽羅誌)--1653년 이원진에 의하여 제작된 읍지(邑誌)이다.

그 불우조(佛宇條) 첫머리에 '존자암은 예전에 한라산 영실에 있었는데 그 동(洞)에 돌이 있어 승이 행도(行道)하는 모양과 같으므로 속전하기를 수행동이라 하였다. 지금은 서쪽 산록(山麓) 10리쯤 밖으로 옮겼는데 곧 대정 지역이다.'라고 쓰고 있다.

⑹ 남환박물(南宦博物)--1702년 제주목사로 왔던 이형상이 저작한 읍지이다. 그 중 존자암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한 구렁 곁에 전고단(塼古壇)이 있는데 단 위에는 복숭아를 심었고 총죽(叢竹) 사이에 홀로 서 있다. 남쪽 산 기슭에 나무가 있는데 측백도 아니고 삼나무도 아니고 박달나무도 아니고 전나무도 아닌데 은은히 장목 같다.

대개 전하기를 계수나무라 하였다. 위에 수행동이 있는데 洞에는 칠성대(七星臺)가 있어 좌선암(坐禪巖)이라 하였다. 이는 옛날 승의 팔정지처(八定之墟)로 이를 존자암이라 하였다. 충암기에 이르기를… (이하 남사록과 같음)

 

⑺ 조선불교통사(1918년 이능화 간행) 耽沒羅州尊者道場條(탐몰라주존자도량조) '법주기에 이르기를 16라한이 각각 주처(住處)가 있었는데 여섯째 발타라존자는 범어로는 발타라(跋陀羅), 중국말로는 호현(好賢)인데 이 존자가 9백 아라한과 더불어 탐몰라주에서 많이 나누어 살았다고 하였다.

서로 전하기를 탐몰라주는 곧 탐라를 말한 것으로 지금의 제주이다. 제주 섬 중에 한 좌산(座山)이 있는데 이를 한라라 말하고 산 정상에는 백록담이 있는데 깊이는 밑이 없으니 곧 오랜 옛날의 분화구이다. 대개 장백산 정상에 천지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중략)

동국여지승람을 살피건대 제주 존자암은 한라산 서령에 있는데 그 洞에는 승이 행도하는 모양의 돌이 있으므로 속전하기를 수행동이라 운운하였는데 존자암은 발타라존자의 이름에서 온 것이라 함은 그럴 듯하다.

그 오백장군석 역시 5백라한석이 와칭(訛稱)된 것이라 함도 그럴 듯하다.

세상에 전하기를 탐라는 곧 삼성(三聖)이 입적한 땅이라 운운하였는데 옛날 보우대사 및 환성선사(喚醒禪師)가 모두 이 곳에 유배되었는데 역시 모두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미 이성(二聖)은 증험하였다고 하였다.'(김봉옥, 존자암기)

⑻ 절의 동쪽에는 샘이 있는데 백보쯤 흘러서 땅 속으로 스며든다. 예로부터 고승의 수도장으로 알려졌고, 조선조 후기까지도 등산자의 편의를 위하여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김봉옥, 제주통사. 79쪽)

⑼ 존자암은 1650년대 무렵 문헌에 거의 폐사돼 초가 형태로 명맥만 유지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도내 불교계에서는 이곳을 국내 최초의 불교 전래지로 믿고 있다. <오택진> (제주일보 2002년 11월 2일)

⑽ 제주도의 불교 전파는 지리적 위치로 보아 삼국(三國)보다 훨씬 앞선 때에 해로(海路)를 통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니, 15세기말 홍유손(洪裕孫)이 남긴 소총유고(篠叢遺稿) 존자암개구유인문(尊者庵改構侑因文)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즉, 존자암이 처음으로 세워진 것은 고·량·부(高良夫) 3성이 일어날 때였으며, 제주목(濟州牧)·정의현(旌義縣)·대정현(大靜縣)의 3읍이 정립된 후까지 오랫동안 전하여 왔으니 비보소(裨補所)이자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지 오래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암자에 논을 하사하여 벼를 심어 재(齋)를 올리는 경비로 삼게 하고 음력 4월중에 3읍의 사령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암자에서 제사를 지내니 이를 국성재(國聖齋)라 하였는데 지금은 폐(廢)한 지 6∼7년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존자암의 사적을 알릴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정영호)

⑾ 조선 제22대 정조(1776∼1800) 때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의하면 존자암이 한라산 서쪽에 있었으나 폐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정영호)

 

7. 존자암 관련 주장

⑴ 제주는 한국 불교의 시발지이다. 고려대장경 법주기의 탐몰라주는 탐라 즉 제주이다. 각종 문헌과 존자암 터에서 발굴되고 있는 유적과, 당시 제주도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바다를 통해 불교가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존자암은 지금으로부터 2535년 전 석가모니불 재세시 탐몰라주 발타라 존자가 초전법륜한 성지요, 한국 불교 최초의 사찰로 추정되며 이 지역은 부처님이 오셨다 하여 불래악(佛來岳)이라 구전되고 있다.(법륜사 주지 주진아)

⑵ 존자암은 2400여년 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사찰일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 소수림왕2년(372)에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북방대륙 경유의 전래이고,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48년 인도의 불교국가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온 공주 許黃玉과 혼인했다는 설화 등을 근거로 가야 불교는 고구려보다 300여년 전에 남방 해양 루트를 통해 전파됐을 가능성이 학계에서 제기되어 왔다.

제주 불교는 가야 불교보다 400여년 앞서 남방 해양 방면으로부터 전래됐을 가능성이 크다. (향토사학가 김봉옥)

⑶ 존자암이 옛날 우리 나라의 10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 제주의 불교를 꽃피웠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제주도 관계자)

⑷ 김봉옥의 주장 ;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천평3년(731) 가을 7월 을미에 아악료(雅樂寮) 잡학생원(雜學生員)들을 정하였는데 대당악(大唐樂) 39人, 백제악(百濟樂) 26人, 고구려악(高句麗樂) 8人, 신라악(新羅樂) 4人, 탁라악(度羅樂) 62人, 제현무(諸縣舞) 8人, 쓰구시무(筑舞) 28人이다.

그 대당악생은 중국말을 잘못하여도 교습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취하고 백제·고구려·신라악생도 아울러 학습에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를 취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탁라악은 어디 음악일까? 이는 곧 탁라( 羅)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이 음악이 나라(奈良) 동대사(東大寺)에서 불사(佛事)에 사용하는 음악이다.

일본 동경대학의 기시배 시게오 교수도 탁라(度羅)는 탁라( 羅)를 말한 것으로 탐라음악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731년 당시에 탐라에 어떠한 불교음악이 있었을까? 이는 발타라존자의 권속들에 의한 불교음악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제주문화 제6호, 2000년, 존자암에 대한 논의)

⑸ 반론 ; 탐몰라주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적 우주관에서 유래된 상상의 나라이고 실제적인 지명이 아니다. 존자암은 석가모니의 제자 오백라한 중 학덕이 높은 16라한을 모신 자그마한 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동국대 불교학과 목정배 교수) (이상 제민일보 4325. 1. 21, 한겨레신문 4327. 7. 17.)

 

8. 존자암 복원

⑴ 복원 사업

서귀포시는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옛 문헌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존자암지(尊者庵址)에 대한 정비사업을 10년 전인 1992년부터 총 사업비 22억여 원(국비 7억7000여만원 포함)을 들여 추진해왔다.

이에 따라 정비사업의 핵심인 존자암지 대웅전과 국성재각(國成齋閣) 등 주요 건물에 대한 복원공사를 2001년부터 추진해 2002년 마무리하여, 2002년 11월 3일 오전 한라산 해발 1200m 속칭 ‘볼래오름’중턱에 위치한 존자암지에서 대웅보전과 국성제각 낙성식과 만등불사 대법회를 거행했다.

이로써 탐라시대의 사찰로 전해지던 한라산 영실 인근의 존자암(尊者庵)이 350여 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것이다.

 

⑵ 2003년 현재 복원된 건물

ⓛ 대웅전(大雄殿) ; 정면 5칸, 측면 3칸 등 한식 기와 연면적 95.76㎡에 팔작지붕 형태. 북쪽 벽에는 부처님이 법정스님에게 옷을 걸쳐 주는 꿈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후면에는 〈瀛宮〉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지만 정면에는 아직 편액을 달지 않았다.

② 국성재각(國聖齋閣) ; 정면 3칸, 측면 2칸 등 연면적 25.83㎡의 한식 기와 맞배지붕 형태

③ 禪房(스님이 거주하는 곳, 瀛洲山房) 한식 기와 68.04㎡

④ 부도 ;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인 존자암 부도는 제주석으로 만들어진 도내 유일의 석종형 사리탑으로 유려한 곡선미와 세련된 조각미를 지녔다. (이상 제민일보·제주일보·한라일보 2002년 11월 4일 종합) 석종형 부도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명칭도 석종형이라기보다는 연꽃봉오리 모양을 딴 것이므로 연봉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이영권)

현재 한라산 불래오름(볼래오름) 남사면 기슭에 복원된 존자암은 옛 절터에서 지금의 장소로 옮겨진 것으로, 지난 1996년 제주도 기념물 제43호 지정된 이후 발굴조사를 토대로 복원된 곳이다. 옛 존자암터로 추정되는 영실은 현재 복원된 존자암 사찰에서 직선거리로 1.8km 가량 떨어져 있다.

이에 따라 현재 진행중인 논의는 옛 존자암터의 존재와 절터의 성격을 재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옛 존자암의 자리가 어디냐는 부분인데, 문헌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영실 수행동과 수행굴 등이 존자암과 밀접한 관계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한라일보 2010년 10월 4일 강시영 기자)

 

다음은 존자암에 있는 부도에 대한 설명이다.

 

하원동 존자암지 부도(浮屠)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7호(2000년 11월 1일 지정)

위치 ; 서귀포시 하원동 산1-1번지. 한라산 영실 서쪽 볼래오름 중턱 해발1210고지 존자암 구내

시대 ; 고려

유형 ; 불교유적(부도)

 

부도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墓塔)이다.

부두(浮頭)·포도(蒲圖)·불도(佛圖)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데, 원래는 불타(佛陀)와 같이 붓다(Buddha)를 번역한 것이라 하고 또는 솔도파(率屠婆, stupa), 즉 탑파(塔婆)의 전음(轉音)이라고도 한다.

어원으로 본다면 불타가 곧 부도이므로 외형적으로 나타난 불상이나 불탑이 바로 부도이며, 더 나아가 승려들까지도 부도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묘탑, 즉 부도라는 용어로 승려의 사리탑을 가리키는 실례는 신라 하대인 872년(경문왕 12)에 건립된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의 비문 중에 “기석부도지지(起石浮屠之地)”라는 구절이 있어 승려의 묘탑이 곧 부도라고 일컬어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묘탑, 즉 부도를 세우는 것은 불교식 장례법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불교가 전래된 때부터 묘탑의 건립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4세기 후반이지만 연대가 그때까지 올라가는 묘탑은 문헌상으로도 볼 수 없다.

다만 627∼649년경에 원광법사(圓光法師)의 부도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이 시기를 부도 건립의 시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엠파스 백과사전)

존자암지의 부도는 제주석으로 만들어진 도내 유일의 석종형(이영권은 연꽃봉오리 모양을 본딴 것이므로 연봉형이라고 해야 맞다고 한다) 사리탑으로 유려한 곡선미와 세련된 조각미를 지녔다.

지대를 단단히 다진 후 고려시대의 특징인 8각의 기단을 구축하여 그 위에 괴임돌을 놓고 탑신을 얹어 옥개석을 동일석으로 만들었다. 위에 놓인 하대를 옆에서 깎아 들어가 직경 23cm의 사리공(舍利孔)이 돌출되도록 만들어졌다.

탑신석은 석종형(石鐘形)에 속하나 장구형(長球形)으로 상·하를 평평하게 치석했으며 중앙부로부터 상·하단에 이르면서 유여한 곡선미를 보이고 있다.

옥개석의 형태를 보면 하면은 평평하나 낙수면이 제주 초가지붕 형태로 부드러운 곡선미를 보이고 있으며 그 위에 조성된 보주 또한 세련된 조각미를 연출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옥개석과 보주를 같은 돌로 치석한 예가 없는 만큼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이는 늦어도 고려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제주도 유일의 부도이다.

존자암에 대한 문헌상 기록은 1620년(효종 2년)에 안핵어사로 왔던 이경억의 시(詩)에 “천년을 지나온 탑 외로이 서 있는데”라고 사리탑을 경외한 내용을 비롯하여 고려대장경 제30권 법주기(1251년), 동국여지승람 불우편(노사신·양성지, 1481년), 남명소승(임제, 1577년), 남사록(김상헌, 1601년), 탐라지(이원진, 1653년), 남환박물(이형상, 1702년), 조선불교통사(이능화, 1918년) 등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제민일보 1993년 9월 13일, 제민일보·제주일보·한라일보 2002년 11월 4일, 한라일보 2002년 3월 20일, 2004년 3월 5일 종합)

발굴 당시에는 부도기단석은 흐트러져 있고 부도는 굴러 떨어져 있었다. 그런 것을 위 사진처럼 임시로 복원했다가 현재의 위치(아래 사진)로 옮겨 세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