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농경지와 중산간 방목지 사이 경계선..가시리 대록산중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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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농경지와 중산간 방목지 사이 경계선..가시리 대록산중잣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6.21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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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소록산과 남원읍 수망리 물영아리 사이 초지대의 녹산장(鹿山場)으로 구성된다.

가시리 대록산중잣

 

위치 ; 표선면 가시리 대록산 동남쪽
유형 ; 산업시설(목장경계)
시대 ; 조선

가시리_대록산중잣

 

제주도에 본격적으로 목장이 형성된 것은 조선시대로, 해발 200~600m 지역을 10개 구역으로 나누어 설치한 국영목장 십소장(十所場)과, 제주도 동부 해발 400m 이상 산간지역의 산마장(山馬場)이 대표적인 목장이었다.


세종 때 문과 중시에 급제한 뒤 한성판윤(서울시장)까지 지낸 고득종은 방목하는 말 때문에 농작물 피해가 발생하게 되자 세종에게 해안의 마을지역에서 방목하고 있는 말들을 중산간지역으로 옮겨 체계적으로 말을 기를 수 있도록 국영목장 설치를 건의했다.

그의 건의를 받아들인 세종의 결정에 의해 세종11년(1429년) 해안지역의 농경지와 중산간지대의 방목지 사이에 경계선인 돌담, 즉 잣을 쌓게 된다.

잣성으로도 불리는 이 돌담을 해발 150~250m 지역에 섬 전체를 빙 둘러 쌓은 것이다. 잣은 조선시대 제주도 중산간지대에 국영목장이 설치되었음을 입증하는 역사적 유물인 동시에 제주도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으면서 가장 긴 선형유적이다.


알잣, 하잣, 하잣성 등으로 불리는 이 돌담은 말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높이 1.2~1.5m 정도의 겹담으로 쌓았다. 그리고 방목하는 말들이 한라산 삼림지역에 들어가 동사하거나 잃어버리는 일을 막기 위해 1700년대에 해발 450~600m 지역에 상잣(웃잣)을 쌓았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십소장이다. 한 소장에 5~7개의 자목장(字牧場)이 있었는데 1개 자목장에는 암말 100필과 숫말 11필이 사육됐고, 자목장마다 군두 1명, 군부 2명, 목자(테우리) 4명이 배치돼 말을 관리했다.

조선후기 기록에 제주의 자목장은 모두 58~64개가 있었다고 하니 6천~7천필의 말이 국영목장에서 사육되던 것으로 보인다.(미디어제주 110520 고희범 글)


십소장은 제주목 지역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1소장 부터 6소장, 대정현 지역에 7, 8소장, 정의현 지역에 9, 10소장이 분포돼 있었다.

산마장은 조천읍 교래리 바농오름 일대의 침장(針場), 산굼부리 일대의 상장(上場), 표선면 가시리 소록산과 남원읍 수망리 물영아리 사이 초지대의 녹산장(鹿山場)으로 구성된다.


이후 1800년대 후기에 해안지역의 농경지 부족을 주민들이 호소하자 해발 350~400m 지역에 중잣을 쌓아 방목지역을 둘로 나누고 농사와 방목을 중잣의 위 아래 지역에서 번갈아 하도록 했다.

계절에 따라 방목하는 우마를 한라산 쪽으로 올리기도 하고 해안 쪽으로 내리기도 했다.


중잣은 남원읍 수망리 산10번지 일대 물영아리 남쪽에 있는 잣으로 남조로 동쪽은 여문영아리 동쪽, 가시리 행기머체, 정석비행장 동쪽, 대록산 북서쪽(소록산과 대록산의 중간)까지 겹담에 높이 100~140cm, 폭 50~120cm이고, 서쪽은 의귀공동목장에 있는 민오름 뒤쪽의 남원, 한남리 공동목장으로 이어지면서 상·중잣이 합쳐져 여기서부터 홀담(외담)이었다.(제주매일 050727 장덕지 글)

요즘은 이 잣을 따라 걷는 길을 산마장과 갑마장을 구분하던 잣이어서 갑마장길이라 하여 표시해 놓았다.
《작성 1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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