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순례길 탐방) "이 길에 온 존재 쏟아붓지 않는 것은 없다..다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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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순례길 탐방) "이 길에 온 존재 쏟아붓지 않는 것은 없다..다 걸어야 한다.."
  • 고현준
  • 승인 2022.07.2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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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사-월평마을 당, 구품연지가 있는 극락을 향하는 정토의 길

 

 

 

 

늦게 출가한 경전 외는 승려가 발견한 구절

-류시화

 

어떤 꽃도

거짓으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어떤 새도

절반의 마음으로 날개짓하지 않는다

 

어떤 번개도

건성으로 파열하지 않는다

 

어떤 강도

마음에 없이 바다로 향하지 않는다

 

어떤 바다도

절실함 없이 파도치지 않는다

 

이 길에 온 존재  쏟아붓지 않는 것은 없다

자신이 속한 세상과

일체가 되기 위해

다 걸어야 한다

아무리 작은 기회라도

온몸을 던지는 씨앗처럼

(류시화의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중에서)

 

 

 

 

불교순례길은 명칭은 그런 대로 잘 지어졌는데 그 길에 대한 관리는 아직 미흡한 모습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7일과 16일 두 번에 걸쳐 사찰 순례를 하는데..

안내리본이 달려있지 않거나 보이지가 않아 더운 날씨에 무척 고행을 하게 만들었다.

첫날 서귀포시 이중섭거리 인근에 있는 구룡사를 찾았을 때도 그랬다.

이 암자는 주변 호텔 등 큰 건물에 싸여 작은 골목에 숨어 있듯 앉아 있었다.

사람도 없었고 절에서 곧잘 들을 수 있는 염불소리도 없었다.

실망감에 밖으로 나와 길을 찾으려는데 리본이 보이지 않았다,

안내판에 있는 서귀진쪽을 향해 무작정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걷다보니 천지연 입구까지 걸었고..

멀리서 보니 앞에 보이는 산 중턱에 절이 하나 보이는 듯 해서 그곳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우리가 찾던 황룡사였다..

이곳도 멀리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조그만 암자였다.

사람의 인기척도 없고 ..잠시 숨을 고르고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순례코스는 이 길을 따라 바로 위로 올라가면 5분이면 우리가 가려는 곳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지만, 리본이 없어 더위를 먹어가며 엄청 걸었다.

안내 리본이 달려있지 않았는지..우리가 보지를 못한 건지.. 다시 아래 쪽으로 내려와 땡볕에 고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으니 안내리본이 보일 리 없었다.

그 길 정상에 올라 가서야 비로소 황룡사에서 5분만 걸어오르면 정상에 올 수 있는 길인 것을..그 때야 알았다.

우리가 내려갈 때 산을 오르는 한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아무런 반응없이 지나쳐 사람 참 냉냉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주머니와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안내라도 받아 좋았을 것을.. 하는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참 많이 힘들었다.

정상에 올라가 황룡사 위 쉼터에 앉으니 허탈감이 몰려왔다.

리본만 제대로 달렸어도, 이 땡볕에 고생이라도 덜 했을 걸 하는 아쉬운 마음 때문이었다.

다시 길을 찾아 걸어 보았지만 리본은 이 길에서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서귀포시 시공원 근처까지 도착한 후 걷기를 포기했다.

위로 올라오는 지열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다.

안내리본이 참 아쉽기만 한 날이었다.

그렇게 힘든 날 우연히 만난 시가 위의 '늦게 출가한 경전 외는 승려가 발견한 구절'이라는 제목의 류시화의 시다.

 

 

지난 16일 다시 힘을 내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법화사를 찾았다.

법화사에는 보기 드물게, 연못 가득 연꽃이 피어 꽃의 향연을 펼치는 중이었다.

이곳 법화사에 있어 특별해 보이는 구품연지라는 연못이었다.

 

구품연지(九品蓮池 : 불교 사찰 안에 있는 못)

서방 극락정토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며, 줄여서 연지(蓮池)라고도 한다. 서방 극락정토를 묘사한 《관무량수경》에는 “극락정토에는 연꽃이 피어 있는 큰 연못이 있다. 물은 맑고 깨끗하여 바닥이 들여다 보이고, 꽃들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극락정토의 성중(聲衆)들은 이 연지에 둘러앉아 설법을 듣는다”고 적혀 있다. 극락을 연화장(蓮華藏) 세계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교에서는 대개 이 연화회(蓮華會)를 상징하는 연못을 사찰 안에 조성하는데,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들어서는 순간 이미 사바세계를 떠나 불국토에 들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관무량수경》에 따르면, 극락정토에 태어나는 사람은 그 선근(善根)이나 이승에서의 공덕에 따라 정토에서 받는 과보가 다르고, 보리심을 내어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누구나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

또한 출가하여 이를 지킨 사람과 출가하지 않더라도 공덕을 쌓으며 이를 지킨 사람, 이를 지키기만 한 사람이 각각 그 과보가 다른데, 이것을 3생(三生)이라 한다.

그리고 삼생에는 다시 상·중·하의 3품이 있어서, 이를 합하면 3품 3생의 9단계가 된다. 이들이 극락정토에 가서연대(蓮臺)에 앉을 때는 그 단계에 따라 자리를 배치받는다. 그래서 연지를 9품연지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품연지 [九品蓮池]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법화사는 그동안 다녀본 절 중 가장 으뜸(?)이라는 느낌이 드는 절이었다.

비록 소나무에 박힌 오래된 철사줄이 소나무를 못살게 굴고 있었지만..

법화사는 절 중의 절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보기에 참 좋았다.

이곳 법화사에는 다른 절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사찰해설사까지 근무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절에 온 느낌이 들 정도로 사찰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고광언 선생과 정명자 사찰해설사(왼쪽)

 

 

 

법화사는 어떤 사찰일까..

이곳에서 만난 정명자 사찰해설사는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법화사는 추정하기로는 고려시대나 통일신라때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90년대에 제주대에서 조사를 할 때 기와에 쓰여진 글씨중 1269년부터 1279까지 중창을 한 것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기록으로 봐서는 그 당시는 중창한 것이기에 지어진 것은 훨씬 더 이전일 것이라는 추정을 했던 것입니다. 특히 법화사 대웅전 앞에 있는 월대는 일반 절의 경우 이렇게 큰 월대를 만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월대는 보통 황실이나 궁궐에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나라때 원나라 황실에서 이용했던 사찰이 아닌 가 보고 있습니다.”

또한 “연꽃이 피어있는 구품연지는 극락세계를 의미합니다. 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이 계시는 곳입니다. 이 구품연지는 극락세계에 가기 전에 설법을 듣고 깨우쳐야 극락으로 간다는 의미의 연못입니다. 원래 이곳 법화사에는 아미타불 3존불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원나라때 제주도가 몽골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섰을 때 아미타불 3존불이 영험하다고 해서 명나라로 보내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후 아미타불 3존불이 다시 모셔져야 하는데 지금은 석가모니불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정명자 해설사에 따르면 “법화사에는 법화사지가 따로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 숭유억불 정책으로 현재의 법화사 위치보다 더 위쪽에 있었다”고 하며, “현재의 법화사 일대를 예전에는 말 육성지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알고보니 우여곡절이 많은 절이었다.

 

 

 

 

 

법화사를 나와 하원마을로 들어섰다. 이 마을도 참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이 하원마을 또한 법화사와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마을 소개비에 적혀 있었다.

 

하원설촌 유래

이 마을의 설촌은 마을 북쪽 산기슭에 현재 복원중인 법화사의 건립과 비슷한 시기로 보인다. 이 사지의 발굴로 그 설립연대는 대충 원이 제주통치 시기인 1273년(원종14년) 이후 100년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절이 지어지던 무렵 마을 상류인 영실의 불래암(불래오름)에도 절이 있었고 법정에도 절이 있었다.

구전에 의하면 불래악 절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상원이라 했으며 법정악절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중원, 그리고 현재의 법화사 알대를 하원이라 했는데 지금의 마을이름 하원도 그 하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이 향원의 마을이름은 1850년(경술년)까지도 계속돼 오다가 마을 주위에 법화수, 원두수,통물, 큰이물, 개상골 등 샘이 많다고 해서 하원(河源)이라 고쳤다는 것이다.(중략)

 

 

 

 

 

하원마을을 지나니 강정마을 입구가 나왔다.

강정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입구에 외지차량은 들어오지 말라는 안내문구 때문인지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호젓한 길이 이어졌다.

그리고 곳곳에 ‘농약을 도로에 버리지 마세요,-더 좋은 일강정’이라는 표지가 여러 곳에 세워져 있었다.

여기서부터 순례길에 나선 고광언 선생과 필자는 다시 길을 잃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향해 무작정 걸었다.

이 해안도로를 만들고 있는 지점은 멀리 산방산과 송악산까지 보이는 아름다운 월평-강정해안도로..이곳에도 새로운 해안도로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그림자 하나 없는 땡볕 길가에 앉아 "길없음 표지가 있는 곳으로 와 달라"고 택시를 불렀지만 "갈 택시가 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그곳에서 보니 멀리 다음 행선지인 약천사가 눈에 들어왔다.

1시간 정도만 걸으면 될 것 같았다.

이왕 택시도 없으니 다시 그냥 걸어가 보자고 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월평포구 앞에 이르니 길이 사라지고 없었다.

월평포구로 내려가는 길이 공사로 사라진 것이었다.

엄청난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다시 뒤로 돌아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걸어가 옛길을 따라 월평포구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아름답던 포구는 이미 공사판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공사표지판에는 월평포구 선석보강 공사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서귀포시에 알아본 결과 이 공사는 강정마을과 월평마을간 해안도로가 만들어지는 대규모 공사였다.

월평포구 위쪽으로 교량을 놓는 공사를 진행중이라고 했다.

그 아름답던 월평포구의 그림같은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공사판으로 엉망이 된 길을 따라 올라오다가 예전 올레길을 찾아 들어섰다.

사람이 다니지 않으니 이미 정글처럼 변해가는 중이었다.

그런 곳에서 보는 절경이 또 아름다운 법이다.

우리는 계속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깊은 숲속을 걸었다.

굿당가는 길이라는 올레표지판이 있는 곳에서는 다시 처음 가보는 계곡으로 내려갔다.

이 계곡에만, 돌 위에 크게 자란 신목이 있는 곳에 2개의 당이 숨어 있었다.

그 당을 나와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오르니 큰 길가가 나타났다.

긴장을 해서인지,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파김치가 될 정도로 힘겹게 걸었던 날이었다.

약천사로 걸어갈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날은 그렇게, 법화사와 2개의 당을 순례한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다음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전하는 법화사에 대한 내용이다.

 

법화사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 소속 사찰.

건립 경위 및 변천

법화사는 고려시대 제주 최대의 가람으로 전해지며, 창건 연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나 현재 통일신라시대의 장보고에 의한 창건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법화사의 중창은 고려 1269년(원종 10년)부터 1279년(충렬왕 5년)까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원나라가 제주를 남송 및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전략적 배경이 있지 않은가 하는 시각이 있다.

법화사에는 원나라의 양공(良工)이 주조한 아미타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비보사찰로써 노비가 300여명에 이르는 등 위세를 크게 떨쳤었다.

그러나 원이 멸망하고 이어 등장한 명나라에서는 법화사에 안치된 금동아미타삼존불상을 가져가기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고, 제주에 직접 들어와서 금동불상 3좌를 가져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탐라의 형세를 파악하고자 하는 명나라 황제의 다른 의도가 있다는 주위의 권고에 따라, 조선의 태종은 급히 김도생과 박모를 보내어 법화사의 불상을 가져오게 하여 명나라 사신들에게 전해주었다.

명나라에서는 고려 말 이래로 제주도를 자국의 영토로 귀속시키고자 여러 차례 문제를 거론하여 왔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제주도 문제에 대해 상당히 예민해져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원나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커다란 위세를 떨치던 법화사의 교세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1408년(태종 8)에는 법화사의 노비 280인 가운데 30인만 남게 하고 나머지는 전농사로 삼았다.

그 결과 16세기 후반에 와서 법화사는 폐사되며, 이후 17세기에 초가 암자 몇 채가 지어져 사찰의 명맥을 유지해 오나 18세기에는 그것마저 사라지게 된다. 그로부터 근대에 들어오기까지 법화사에 대한 기록은 전무한 상태다.

하지만 근대 초인 1921년에 이회명 승려가 법화사에서 동안거 설법을 했다는 기록이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910년대에 이미 인근 법정사와 함께 사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법화사는 1926년 초 관음사 주지 안도월과 안봉려관에 의해 산남의 제주 관음사 포교지소로 새롭게 건물을 짓고 중흥의 시기를 맞는다. 그리고 그 해 음력 칠석일에 봉불식을 거행하여 이회명을 담임포교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1939년에는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대학에서 제주 순회강연을 개최하였는데, 관덕정·한림항·서귀포공립소학교에 이어 법화사에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강연이 열리기도 했다.

근대에 활발한 포교활동을 펼치며 산남의 불교를 대표해 오던 법화사는 그러나 해방 이후 군에 의해 두 차례 소실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1948년 제주4·3사건이 한창이던 음력 10월 토벌대에 의해 법화사는 전소되었다.

그리고 1950년, 4·3사건이 진정국면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법화사 주지였던 장영복은 그 해 3월에 새로이 35평의 법당과 요사 등을 짓고 법화사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다시 6·25사변이 일어나면서 꺾이고 만다. 인근 모슬포에 육군훈련소가 세워지면서 1952년 법화사는 육군의 제3숙영지로 접수되어 또다시 폐사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법화사가 재건된 것은 정화의 바람이 불던 1960년대 후반이다. 당시 법화사 터에 정지 작업을 하던 중 직경 80~120cm의 주초석과 거대한 지대석들이 발견되어 발굴조사에 착수하게 되었고, 현재 다수의 유물과 여러 동의 건물 터가 발견되어 복원불사가 진행 중이다. 지금의 대웅전은 1987년에 중창하였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법화사는 1987년 대웅전 복원을 시작으로 2001년에 구품세계관을 상징하는 3,000평 규모의 구품연지를 복원하며 옛 명성을 되찾고 있다. 2004년에는 구품연지 안에 건평 54평의 2층 누각인 구화루를 완공하며 1단계 복원사업을 일단락 지었다. 2007년부터는 일주문·사천왕문·나한전·승방·강당 등을 추가로 복원하여 법화사의 옛 모습을 재현해내고 있다. 법화사지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관련 문화재

제주대학교 박물관의 법화사지 발굴 조사에서 법화사의 건물지는 모두 10동이 발굴되었다. 가장 큰 법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에서만도 지대석이 13매가 나왔다. 이 기단의 규모로 보아 이곳에는 가로 21m, 세로 16m, 면적 238㎡, 약 105평 규모의 건물이 존재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사찰 경내에는 기와를 깔아 놓은 보도가 건물마다 설치되고 담장이 둘러져 있던 것도 확인되었다.

특히 담장 밖 폐와무지에서는 법화사의 중창을 알려주는 ‘지원육년기사시(至元六年己巳始)’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또한 운봉문 암막새, 운룡문 수막새 등 다수의 기와와 고급품의 도자기들도 상당수 출토되었다.

이 도자기들은 대부분 청자편이다. 청자 음각 앵무문 대접을 비롯한 국당초문 대접·운용문 대접·포도문 대접·청자상감 매병·청자상감 화병·청자상감 국화문 마상배 등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청동 숟가락·청동 소형종지·개원통보(開元通寶)와 더불어 나한상으로 보이는 소불(小佛)이 어깨 윗부분이 파손된 채 출토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법화사 [法華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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