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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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24)
  • 조용호 박사
  • 승인 2022.09.0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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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박사/ 전통아리랑 연구 -1(제11주제)

 

아리랑의 비밀을, 저서 ‘아리랑의 비밀話원’을 통해 밝혀낸 조용호 박사가 제주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뜻 있는 자리를 가졌다.

한라산에 있는 사)제주도아리랑보존회(이사장 강소빈)가 주최한 '2022 한국아리랑의 원형연구 조용호 박사 초청강연회' 자리에서였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출신이기도 한 조용호 박사는 이날 모두 6개의 주제로 나눠 아리랑에 대한 모든 내용을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조용호 박사는 아리랑에 대해 “‘아리랑’은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 속에 고도한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 특수한 문장이었다.”며 “그래서 아무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었고, 아리랑이라는 뜻조차도 알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반도체, 정보통신(IT), 암호학 및 고대시가문학, 중세국어 등의 분야에 종사하면서 오랜 기간 아리랑과 민요, 고려가요 등에 나타나는 뜻 모르는 후렴구를 연구해 온 조용호(趙容晧) 박사는 아리랑을 600년 전의 한문과 고려어로 된 의사향찰구조로 재구함으로써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풀어내게 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지는 이 자리에서 이에 대한 모든 원고를 긴급 입수, 조용호 박사로부터 연재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차제에 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의 대중화 및 세계화에 대한 폭넓은 발전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를 차례로 연재하기로 했다. 열 한번째 주제는 '전통아리랑  연구'이다.(편집자주)

 

 

전통아리랑 연구 Studies on Traditional Arirang

조용호(趙容晧)

 

Ⅰ. 서 론

아리랑이란 한국의 아리랑 노래를 뜻한다. 19세기 이후의 기록에 나타난 이래 여러 개의 유사한 명칭으로 사용되어져 왔지만 일반적으로는 아리랑이라는 명칭으로 표기되며 불리고 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채집된 각편(version)의 명칭은 엄격한 학술적 검증 없이 명명되어져 왔기 때문에 혼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문제가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전통적으로 불리어 오던 아리랑과 이를 바탕으로 변형이 일어난 또 다른 형태의 아리랑에 대한 명칭 문제이다.

전통적인 아리랑에 변형이 일어난 것은 신민요의 출현에 따른 것이다. 신민요로서의 아리랑을 구분하는 분수령이 되는 것은 1920년에서 1930년대에 일어난 변화이다.

한 예로 1926년에 상영된 영화 ‘아리랑’은 기존에 있던 리듬과는 다르게 변형이 일어났는데, 이후에 1930년 6월 「조선민요 아리랑」이라는 글에서는 영화 ‘아리랑’에 나온 것과 거의 동일한 가사를 <新(신)아리랑>이라고 명명하였다.

<신아리랑>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은 전통적인 형태에서 변형된 노래들이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곡목에 변동은 없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정식 노래 곡목으로서 <신아리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신민요로서의 아리랑 노래를 대표하는 곡명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에 불리어온 전통적인 아리랑은 <신아리랑>과는 다른 명칭을 부여해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명명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기존에는 노래가 오래 되었다는 측면에서 <구아리랑>이라든가 <구조아리랑>이라고도 하였고, 곡조가 길게 늘어진다는 측면에서 <긴아리랑>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러한 용어로는 전통적인 아리랑에 대한 정의로서 부족한 측면이 있다. <신아리랑>이나 신민요라는 개념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의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는 오래전부터 전래되어 왔다는 측면에서 전통아리랑이라는 개념 정의가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출현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이전부터 불리어 온 것을 전통아리랑이라고 명명하게 되면, 1920년대 이후에 새롭게 변형된 것을 신민요 아리랑이라고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전통아리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백과사전 용어로 정의할 때 기술되어야 할 내용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Ⅱ. 연원 및 변천

아리랑의 연원과 그 변천에 대한 것은 사전으로서의 객관성 확보를 위해 우선적으로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전래되던 아리랑이 역사 기록물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이다. 1894년의 『매천야록』에는 관련 내용이 있으며, 이후에도 새로운 자료가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1896년, 미국인 헐버트는 「조선의 성악」, '조선 노래 모음집(The Korea Repository)'(1896, 49~50쪽)에서 아리랑의 한 종류를 채보하여 아르랑[영문은 Ararung]으로 표기하였고, 그 특성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Ararung ararung arario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ararung ölsa paiddiöra 아르랑 얼사 배띄어라

Mungyung saichai paktalanmu 문경새재 박달나무

hongdokai pangmaingi tanakanda 홍도깨 방맹이 다 나간다

 

아리랑이 차지하는 비중은 음식중 주식인 쌀밥에 해당하며, 조선의 성악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대중 애창곡인데, 단가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오랜 기간 불리어져 왔으며, 언제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고, 수많은 변형이 가능한 곡조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후렴구는 뱃놀이와 관련된 내용이 많은데, 아리랑의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어 보이며, 주제는 다양하다고도 하였다.

헐버트가 채보한 노래는 이후에 비숍(Isabella Bishop)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1897)과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의 『한반도(韓半島)』(1901) 및 알렌의『조선견문기(Things on Korea)』(1908) 등에 재 수록되었다.

한편 원문에 있는 내용은 아리랑을 주식인 쌀밥의 위상에 비유하고 있는데, 거의 모든 국문 번역 자료에는 “아리랑은 쌀”이라는 형태로 잘못된 번역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1901년,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는 일본어로 아라랑(アララン)歌라는 형태로 표기하였고, 한역(漢譯)하여 아란곡(阿蘭曲)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으며, 슬픈 음조의 노래라고 하였는데, 이는 헐버트의 기록과 유사하다. 아리랑은 깊은 감동을 주는 노래로, 이미 조선을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매김 되어 있었다.

1912년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민요 조사 자료인 『이요⋅이언급 통속적 독물 등 조사』에는 전래되던 아리랑의 모습이 있다.

 

<어르렁 타령(打令)>

날 바리고 가는 임은

십리를 못 가서 발병 나지 (한국민요집 Ⅵ-364)

 

<사랑가(歌)>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十里)도 못가서 발병난다 (한국민요집 Ⅵ-1125)

 

아리랑은 <어르렁 타령(打令)>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고, <사랑가(歌)>라는 형태로도 불렸다. 노래 가사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구절이 생략된 형태이다.

1918년, 메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가 기록한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에는 금강산 장안사에서 들었던 구슬픈 가락의 아리랑을 채집되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은 뱃노래를 연상시키며, 노래 가사에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일종의 암호 같은 노래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간 논란이 되었던 것 중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라는 구절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1926년 영화 아리랑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노래가 불린 지역은 금강산이지만 노랫말의 형식은 경기지역에서 불리던 아리랑이다.

1921년, 와다 텐민은 '조선의 향기'(1921)에서 아리랑이 가지고 있는 후정화적인 성격에 대하여 논하였다.

아리랑이 발생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나 조선 말기에 궁궐에서 한창 유행하다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널리 불리어졌다. 노래는 <후정화>에 비유될 정도로 애조를 띤 곡조이다.

1924년, 이광수는 아리랑의 명칭을 「민요소고(1)」에서는 아르랑 타령으로,「민요에 나타나는 조선 민족성의 한 단면」에서는 일본어 아라랑(アララン)으로 표기하였다.

1926년 영화 ‘아리랑’이 상영되면서 주제가로 사용되었다. 노랫말은 어린 시절에 들었던 가사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고 「아리랑 등 자작 전부를 말함」(『삼천리』, 1937. 1)에서 회고하였다.

 

1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네

 

2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날엔 별도 만코

우리네 살림사린 말도 만타

 

3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4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 가네

 

전체 4절중에 1절은 <아리랑>과 유사하며, 2절은 1918년에 채집된 가사와 내용이 같다. 장안사에서 들었던 아리랑의 전체 가사는 영화주제가 <아리랑>의 일부 내용에 해당되고 있다. 3절은 나운규 본인이 지은 내용이다.

1927년 1월, 일본어로 된 '조선민요 연구'가 발표되었다. 총독부 관련자들이 관여되기는 하였지만,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연구에 해당하며 특집호로 출판되었다.

최남선, 이광수, 이은상 등을 포함한 다수의 논문이 실려 있다. 서문에 해당하는 예언(例言)에는 편집자의 조선민요에 대한 관심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 이광수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구절이 생략되어도 <아리랑>으로 인식하고 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조선민요연구」)

 

아리랑은 영화에서 만들어진 유행가가 아니라 전래되는 민요로 인식하고 있다. 노랫말은 1912년에 채집된 <어르렁 타령(打令)>의 가사와 같다.

편집자인 이치야마 모리오(市山盛雄)는 “민요에 대한 연구는 지금에 이르러 여러 문명국에서는 자료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지만, 조선의 경우는 아직 단 한 번의 쟁기질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근래 들어, 여러 방면에서 점차적으로 조선에 대한 연구열이 고조되고 있지만, 진실한 의미에서 조선을 알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나라의 민족성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소박한 민중의 시대적인 심리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민요를 통해 조선인의 민족성을 엿보는 일은 가장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남선은 「조선민요 개관」에서 아리랑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아리랑을 일본어인 아라랑(アララン)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노래가 전국에 걸쳐 존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경상⋅전라⋅강원⋅서도 등지의 아리랑을 제시하였다.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다는 측면에서 1912년에 채집된 자료와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지역 명칭을 사용한 아리랑의 형태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궁중이 온통 민요의 향락장이 되면서 새로운 노래들이 수없이 만들어 졌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고종 임금이 어렸을 적에 들었던 경복궁 부흥시의 노작민요(勞作民謠)는 물론이고, 기존에 전래되던 아리랑 등의 민요가 새로운 형태로도 만들어졌다는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1929년, 김소운은 최남선이 아리랑을 지역별로 나누어 분류한 이래, 경성(京城)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지방의 것, 서부 조선을 주로 한 것, 강원도 부근의 강원 아리랑, 부산 등지에서 듣는 남부 조선의 것, 전라도의 특이한 아리랑 등이 있음을 제시하였다.

또한 아리랑에 대한 율조(律調)를 논하면서 <강원 아리랑>⋅<경기 아리랑>⋅<서도(西道) 아리랑>⋅<영남 아리랑> 등을 악보와 함께 소개하였다. 이때 비로소 지역명을 사용한 아리랑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당대 지식인의 입장에서 느끼는 조선 민요의 위상, 아리랑의 발생 시기, 조선 문학의 해외 소개 방안 등 많은 고민을 하였다.

「아리랑의 율조에 대하여」는 그러한 생각을 담아 일본어로 정리한 것이다. 아리랑이 언제 발생한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경복궁 수축시기에 널리 퍼졌다고 인식하고 있다.

노랫말 속에 애조(哀調)를 띠고 있고, 채보된 악보를 통해 지역마다 다른 율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조용호(趙容晧)박사는..

조용호(趙容晧)박사

 

문학박사(文學博士).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아리랑 원형연구』 및 『아리랑의 비밀화(話)원』, 『아리랑 영웅(英雄)』, 『아리랑 연구사(硏究史)』, 『아리랑 원형학』, 『아리랑 연구사』, 『아리랑 연구총서 1』, 『아리랑 연구총서 2』 등 저자(著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진.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아리랑 연구기획위원장. 민요학회 임원. 모바일 반도체그룹 본사부사장. 한국지사장. 시인.

(블로그) '아리랑의 비밀話원, 그 오랜 세월을 당신을 기다리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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