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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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30)
  • 조용호 박사
  • 승인 2022.09.20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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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박사/아리랑 발생설 연구-1(제14주제)

아리랑의 비밀을, 저서 ‘아리랑의 비밀話원’을 통해 밝혀낸 조용호 박사가 제주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뜻 있는 자리를 가졌다.

한라산에 있는 사)제주도아리랑보존회(이사장 강소빈)가 주최한 '2022 한국아리랑의 원형연구 조용호 박사 초청강연회' 자리에서였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출신이기도 한 조용호 박사는 이날 모두 6개의 주제로 나눠 아리랑에 대한 모든 내용을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조용호 박사는 아리랑에 대해 “‘아리랑’은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 속에 고도한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 특수한 문장이었다.”며 “그래서 아무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었고, 아리랑이라는 뜻조차도 알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반도체, 정보통신(IT), 암호학 및 고대시가문학, 중세국어 등의 분야에 종사하면서 오랜 기간 아리랑과 민요, 고려가요 등에 나타나는 뜻 모르는 후렴구를 연구해 온 조용호(趙容晧) 박사는 아리랑을 600년 전의 한문과 고려어로 된 의사향찰구조로 재구함으로써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풀어내게 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지는 이 자리에서 이에 대한 모든 원고를 긴급 입수, 조용호 박사로부터 연재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차제에 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의 대중화 및 세계화에 대한 폭넓은 발전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를 차례로 연재하기로 했다. 열 네번째 주제는 '아리랑 발생설 연구'이다.(편집자주)

 

 

 

아리랑 발생설 연구 Studies on the formation of Arirang genesis

조용호(趙容晧)

 

Ⅰ. 서 론

아리랑의 발생이나 기원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주장들이 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춘원 이광수(李光洙)는 아리랑이 다른 어떤 민요보다 우위에 있고, 근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퍽 오랜 옛날에 생긴 것이며, 전해오는 과정에서 지금은 알 수 없는 후렴에만 그 뜻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또한 낙천적인 조선 민족성을 대표하는 노래가 아리랑이라고 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소실(消失)된 것으로 판정된 아리랑의 뜻에 대한 다양한 설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930년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朝鮮)에는 총독부 촉탁(總督府囑託) 김지연(金志淵)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민요(朝鮮民謠) 아리랑」이 기고되었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하여 아이롱설, 아리랑설, 아난리설, 아랑설, 아랑위설, 알영설 등을 제시하면서 몇 개의 아리랑 가사도 소개하였는데, 이는 아리랑 연구에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 중에 나오는 6개의 아리랑 발생설(發生說)은 이후 이병도의 아라설(1959년), 양주동의 아리령(嶺)설(1959년), 임동권의 의미소실설(1969년), 정익섭의 얄리얄리 전음설(1969년), 원훈의의 아리고 쓰리다설(1978년), 조용호의 여말선초 암호문론(2002년) 등에 언급되면서 아리랑 연구의 시발점으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고는 아리랑의 기원이나 어원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을 하기 위한 전단계로서, 아리랑 연구의 연원을 이루고 있는 아리랑 발생설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주제어 : 조선민요, 아리랑 발생설, 김지연, 아리랑 연구

 

Ⅱ. 아리랑 발생설의 구성과 내용

기고문의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은 글의 제목인 「조선민요(朝鮮民謠) 아리랑 – 조선민요(朝鮮民謠)의 연구(研究)(二)-」 및 글쓴이의 이름인 김지연(金志淵)이며, 뒤이어 머리말이 나온다.

 

 

 

 

 

 

 

 

 

朝鮮民謠 아리랑

-朝鮮民謠의 研究(二)-

金志淵

 

一. 머리말

나는 모-든 것이 어리고 부족함니다.

어리면 永永 어리며 부족하면 내내 부족 하릿가 어린 아희들이 도라오고 부족하든 거-지 줄행랑 집을 지읍듸다. 그려!

보서요! 저긔- 해변에선 머리털이 아직 몃개 안이난 아희를!

저 아희는 해변 바둑돌 줍는 아희에요.

波濤가 흽쓰러 올때엔 뒷거름치고 휩쓰러 갈때엔 압거름 침니다.

「뒷거름、압거름」、「압거름、뒷거름」이러는 동안에 한아、둘、셋、넷 텅- 비엿든 광우리가 차차차차 붓는구려! 요자미에 살지요.

第一次로 주은 바둑돌은 이 「아리랑」이올시다 맨든 것이 안이고 주은 것이에요. 이에 對하야 여러先輩의 말삼도 들엇슴니다만은 아즉 明確치 못한 점이 만코 採譜라든지 謠旨解釋이라든지 相互의 比較調查라든지는 後期를 두고 未完成인 이대로 씀은 퍽 未安함니다. 이것은 死馬骨을 五百金으로 買入하는 格이니 千里馬를 자랑하실 분이 만이 기심을 바람니다.

동모여! 오십시요 다- 갓티 춤추고 노래합시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며, 자신은 아직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해변에서 바둑돌을 줍는 아이로 비유하고 있다. 가장 먼저 주운 바둑돌은 아리랑이며,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주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선배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충분하지 못하여 미안하지만 많은 자료를 준비하고 싶고 들려주기를 바라고 있다.

머리말에 이어서 나오는 것은 아리랑 발생설이라는 명칭과 함께 6개 각각에 대한 유래이다.

 

二、아리랑 發生說

(甲)歌謠大方家 南道山氏說(榮州郡 豊基面 殷豊洞)

只今으로부터 六十餘年前 歲乙丑에 大院君이 景福宮 復興工事를 始作하얏다. 엇잿든 巨額의 金錢과 多數의 人夫를 要하게 되여 애를 쓰는 中 君의 心服中 一人인 李鐘夏의 案出한 計策으로 當百錢(戶大當百)을 鑄出하야 常平通寶의 百枚의 値로 使用하야도 猶以不足 故로 八道 富豪를 調査하야 願納錢을 募集하얏다. 願納錢이란 意味는 國家가 巨創한 治宮室之役을 行하니 民間 富豪者들이 臣民된 義務心의 發露로 衣食하고 남은 餘裕잇는 金錢을「나라에 봇태여 씁시사」하고 自願而納金이란 意味이다. 그러나 事實은 그와 正反對이엿다. 卽 强制徵收이다. 한술 더 뜨느라고 徵收都監된 者들이 前日에 自己와 私嫌잇는 者 中 밥슐이나 먹는 이를 富豪라고 끌고 들어 徵收簿에 巨額을 얼마 만이라고 딱 적기만 해노흐면 땅땅 두다려 가며 밧는 形勢이엿다. 범강장달이 갓튼 者라도 안이 내고는 姓名三字를 保全할 道裡가 업다. 잇때에 百姓들은「願納」소리에 귀가 압흘 지境이니 하물며 벼섬이나 폭에 놋코 먹는 所謂 富豪야 말해 무엇하리요 富豪民 中 글짜나 하는 이가「但願我耳聾하야 不聞願納聲」이란 歌詩를 作한 것이 其時 賦役軍의 입으로 노래를 唱케 되엿다. 아이롱(我耳聾) 漢字音을 無識한 賦役軍이고 또는 音이 轉變하야「아리랑」이 되여 卽 노래에「先소리」掛聲이 되엿다 한다.

아이롱(我耳聾)설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이 주장은 대원군(大院君)이 경복궁 부흥공사를 위해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돈을 징수하게 되자, 원납(願納)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 되어 단원 아이롱(但願 我耳聾)이라는 노래가 나왔고, 아이롱(我耳聾)이라는 말이 전변(轉變)하여 아리랑이 되었다는 설이다.

(乙)八能堂 金德長氏說(舊 順興郡 西部) (八能이라 號한 은 善歌, 善舞, 善詩, 善辭令, 善圍碁, 身丈大, 善用錢, 善誤入 八能事를 指稱)

景福宮 復興 工事時에 所要人夫 總數를 八道에 配當식혀 京城으로 召集하야 一個月 以上 或 四五個月식 賦役에 服從케 하고 疲勞를 慰撫하며 怨嗟를 防止키 爲한 一方便으로 舞童(十四, 五歲 美貌의 童男으로 善舞者)를 採用하엿나니 壯丁의 肩上에 舞童이 立하야 黃明紬手巾을 兩手에 들고 舞하면 賦役軍은 歌하얏다. 이 곳 實益主義로 일 만히 식히기 爲한 民衆的 娛樂獎勵인대 其時 役軍들은 各其 地方所長인 노래든가 或은 自己所懷를 述하는 歎聲과 並出하는 노래도 잇섯다. 卽 幾個月을 客地 봉누방에서 새오잠을 자니 離家之懷를 못 익이여 아리랑「我離娘」曲을 불넛다고 한다.

아리랑(我離娘)설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경복궁 부흥공사 시기에 강제로 전국 팔도에서 소집되어 온 역군(役軍)들이 집을 떠난 그리움을 못 잊어 아리랑(我離娘) 곡을 불렀다는 설이다.

 

(丙)尙州 姜大鎬氏說
秦始皇이 萬里長城을 築할 때에 賦役民이 休息치 못하고 勞勞役役함을 自歎爲歌曰 「魚游河」「我多苦」라 하얏나니 景福宮 工事가 此築城에 比等하며 노래도 此를 模倣하야 「魚游河」「我難離」라고 하얏다 한다. 卽 고기는 물에서 自由롭게 놀건만 이놈의 八字는 고기만도 못하야 이 苦痛의 役事에서 몸을 뺏치지 못하는고? 卽 我難離此役고 하는 「아난리」가 音轉으로 「아라리」가 되엿다 한다.

아난리(我難離)설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경복궁 공사에 동원된 역군들의 고생이 심해지면서,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조 때 불렀던 노래를 모방하여 어유하(魚遊河) 아난리 차역(我難離 此役)이라는 노래를 불렀으며, 아난리가 음전(音轉)되어 아라리가 되었다는 설이다.

 

(丁)密陽居住하든 金載璹氏說
只今으로부터 幾百年 前 密陽郡守 李某의 令孃은 阿娘이라 稱하얏다.「阿娘豈識嶺南樓, 千里曾隨大人駕」라는 詩에 據함. 阿娘은 年方 二八에 容貌極美한데 內衙深閨에서 針工을 힘쓰며 內則篇을 慣讀하니 其聲은 珠玉을 盤에 궁글님과 彷彿하얏다. 官婢가 吏屬家에 가면 極口稱道하야 遠近傳播함에 一郡男女가 聞風思慕하야 願一見之하얏고 其中에도 當時 通人으로 잇든 者가 阿娘을 一見에 心醉하야 그 淑德貞烈과 雪膚花容이 欲忘而難忘이요 不思而自思되여 如狂如醉하얏다. 以此之極에 一計를 案出하니 卽 綾羅錦繡의 옷감과 金玉珊瑚의 佩物로 그 乳母의 歡心을 사서 如此如此히 하야 阿娘을 一逢케 하야 달나고 哀乞하얏다. 其如此如此之計는 곳 時屬晩春에 百花滿發하고 日正三五에 月色이 明朗하니 嶺南樓로 둘이 달 구경을 가자 함이다. 乳母는 阿娘을 誘引하야 嶺南樓에 달 구경을 하고 樓下 竹田으로 나려 왓다. 不意에 通人이 와서 阿娘의 玉手를 잡고 대밧(竹田)으로 드러가 野慾을 채우고저 하얏스나 貞操의 觀念이 强한 阿娘은 通人을 痛罵하고 終是不應하니 此則 通人 短刀下에 竹田 孤魂이 되든 悲劇이엿다. 愛女를 不識間에 失한 其父는 居未幾에 遞任되고 新倅가 到任하면 非夢似夢之間에 칼을 목에 고 流血이 狼藉한 處女鬼가 니의 怨讐를 갑하 달나고 出現함에 등내마다 食劫昏倒하야 其後는 密陽倅 되기를 죄다 忌避하얏다. 맛츰 聰明膽大한 李上舍가 自願하야 密陽郡守가 되여 其 寃鬼의 哀訴를 詳聽하고 通人과 乳母를 問초하야 그의 積年之恨을 푸러 復讐를 하야 주엇다고 한다. 이럼으로 密陽人民이 阿娘의 貞烈을 思慕하야 「아랑」노래를 불넛다고 한다.

 

아랑(阿娘)설이라고도 불린다. 정조관념이 강하여 통인에게 살해당한 아랑(阿娘)이 한을 품고 밤에 원귀로 나타나는 전설을 바탕으로 밀양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다는 설이다.

 

(戊)尙玄 李先生의 說
家屋을 建築할 時에 上樑文을 지음은 恒例인대 卽 「抛樑上」「抛樑下」「抛樑東」「抛樑西」「抛樑南」「抛樑北」의 六句로 作詩하나니 卽 上樑을 祝賀하는 뜻이라. 그리고 「兒郞偉」라 書하나니 兒郞偉는 卽 터主가 이 집을 잘 직히여 世世繁昌하도록 하야 달나는 祝文이다.「兒郞偉, 築室時頌禱之文也, 起於六朝時 其後宋楊誠 齋, 王介甫集中, 亦見之, 文用騈語, 末附詩 上下東西南北等凡六章」

 

아랑위(兒郞偉)설이라고도 불린다. 가옥을 건축할 때 상량문으로 쓰는 아랑위는 번창을 기원하는 축문인데, 그 기원은 중국의 육조 시대에서 비롯되었다는(起於六朝時) 설이다.

 

(己)新羅 舊都인 慶州
石窟庵 附近에 閼英井(알영정)이 잇고 佛國寺 附近에 閼英川이 잇는대 石窟庵에서 佛國寺로 가자면 한 險峻한 고개를 넘나니 그 고개가 卽 至今의 아리랑 노래의 掛聲 아리랑고개라는 고개가 그로부터 起源이 되지 안엇나 生覺되며, 三國史記를 按하야 보건대 新羅始祖 朴赫居世의 王妃의 名은 閼英이니 龍이 閼英井에 나타나며 오른편 엽구리로 女子를 誕生하얏슴으로 井名을 應하야 名을 閼英이라 하얏다 한다. 자라매 德容과 賢行이 잇서서 時人이 王과 妃를 二聖이라 하얏슬 뿐 안이라 王이 六部를 巡撫할 제 妃가 陪從하야 親히 農桑을 勸獎하얏슴으로 百姓들이 그 惠澤을 노래하노라 閼英(알령) 閼英(알령)한 것이 卽 今日의 아리렁이 된 것이 안인가 한다.

又는 아리렁을 發音上으로 보아서 音便關係로 알(閼) 영(英)이 變하야 (아령)이 되고 아령이 變하야 (아리렁)이 된 듯 하니 그 理由는 (아리렁)의 리렁의 母音 ㅣㅓ가 合하야 ㅕ가 됨으로 리렁이 (령)으로 되고 령의 子音 ㄹ이 (아)에 올나가서 (알)이 되야 알영(閼英)의 그 本音대로 된 것이다. 그러면 慶州에 閼英井․閼英川이 잇고 其 中間에 또 고개가 잇스며 아리령의 發音上으로도 以上과 갓튼 關係가 잇스니 일로 미루어 보면 아리령 노래가 或은 新羅 때 부터 發生된 것이 안일가 한다.

 

알영(閼英)설이라고도 불린다.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이 농상을 장려한데 감격한 백성들이 부른 노래이며, 신라 때부터 발생한 것이라는 설이다.

발생설은 경복궁 부흥공사나 신라시대라는 역사적 사실과의 연관성, 밀양 지역에 기반을 두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설화, 건축과 관련된 민속 등과 결부되어 있어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설로 자리 잡았고, 지금까지도 기본이 되는 설로 등장하고 있다.

발생설에 이어서 나오는 것은 아리랑의 종류에 대한 것이다. 나중에 『이요 이언 급 통속적 독물등 조사(俚謠 俚諺 及 通俗的 讀物等 調査)』(1912년)이 발견되기 이전까지는 가장 많은 가사를 싣고 있는 자료이다.

 

(다음에 계속)

 

 

조용호(趙容晧)박사는..

조용호(趙容晧)박사

 

문학박사(文學博士).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아리랑 원형연구』 및 『아리랑의 비밀화(話)원』, 『아리랑 영웅(英雄)』, 『아리랑 연구사(硏究史)』, 『아리랑 원형학』, 『아리랑 연구사』, 『아리랑 연구총서 1』, 『아리랑 연구총서 2』 등 저자(著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진.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아리랑 연구기획위원장. 민요학회 임원. 모바일 반도체그룹 본사부사장. 한국지사장. 시인.

(블로그) '아리랑의 비밀話원, 그 오랜 세월을 당신을 기다리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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