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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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34)
  • 조용호 박사
  • 승인 2022.09.2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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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박사/ 아리랑의 기록과 본질에 대한 연구 -1(제16주제)

아리랑의 비밀을, 저서 ‘아리랑의 비밀話원’을 통해 밝혀낸 조용호 박사가 제주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뜻 있는 자리를 가졌다.

한라산에 있는 사)제주도아리랑보존회(이사장 강소빈)가 주최한 '2022 한국아리랑의 원형연구 조용호 박사 초청강연회' 자리에서였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출신이기도 한 조용호 박사는 이날 모두 6개의 주제로 나눠 아리랑에 대한 모든 내용을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조용호 박사는 아리랑에 대해 “‘아리랑’은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 속에 고도한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 특수한 문장이었다.”며 “그래서 아무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었고, 아리랑이라는 뜻조차도 알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반도체, 정보통신(IT), 암호학 및 고대시가문학, 중세국어 등의 분야에 종사하면서 오랜 기간 아리랑과 민요, 고려가요 등에 나타나는 뜻 모르는 후렴구를 연구해 온 조용호(趙容晧) 박사는 아리랑을 600년 전의 한문과 고려어로 된 의사향찰구조로 재구함으로써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풀어내게 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지는 이 자리에서 이에 대한 모든 원고를 긴급 입수, 조용호 박사로부터 연재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차제에 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의 대중화 및 세계화에 대한 폭넓은 발전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를 차례로 연재하기로 했다. 열 여섯번째 주제는 '아리랑의 기록과 본질에 대한 연구'이다.(편집자주)

 

 

 

아리랑의 기록과 본질에 대한 연구 Analysis on the records of Arirang

조용호(趙容晧)

 

Ⅰ. 서 론

아리랑 연구를 시작할 때에 가장 먼저 부딪치게 되는 문제는 아리랑의 뜻은 무엇인가? 아리랑은 언제부터 만들어져 불리기 시작한 것일까? 등과 같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기본적인 것이다.

다양한 주장이 있을 수 있으나,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새롭게 발견되는 기록을 포함한 다양한 자료에 대한 정당한 평가이다. 지금까지의 아리랑 연구는 특정한 기록에 대하여 누락하는 경우가 있었고, 재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는 측면에서 커다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검토 대상으로서의 기록은 적지 않지만 학계에서 널리 인용된 자료를 중심으로 세밀하게 분석하고, 학술적 대상에서 빠져있었던 자료를 포함하여 검토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고찰해 보면, 아리랑 연구는 처음부터 학술적 대상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근대의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 중에서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 와다텐민(和田天民), 이치야마 모리오(市山盛雄) 등은 매우 특별한 노래로서의 아리랑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내국인에 의한 연구로는 최영년,, 최남선, 이광수, 김소운 등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요 연구로서의 아리랑이 학술적 논의의 대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연구는 김지연의 ‘아리랑 발생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김재철, 김태준 등의 언급과 인용을 거치면서 아리랑 연구의 중심설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1945년의 해방과 1950년의 6.25 동란 등 민족적 변혁기를 거치면서 일본, 미국, 중국 등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매스컴을 통해 민간에 확대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접 학문과의 교섭이라는 측면에서 이병도, 양주동, 심재덕, 등에 의해 학술적 논의가 재개되었으며, 이후에 임동권(任東權), 정익섭 등 다양한 주장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의 뜻조차 밝히지 못하게 됨으로써 뜻 없는 후렴구의 노래이고, 발생 시기는 영화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생각으로 고착되기도 하였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기록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황현, 임동권, 어영(於英)설, 고권삼, 님 웨일즈, 메리 테일러 등의 기록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학술적 범주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거나 배제된 상태에 있었다.

본고에서는 새롭게 발견되는 기록을 포함한 연구를 통해 기록 속에 나타나는 아리랑의 본질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주제어 : 메리 린리 테일러, 매천야록, 본조, 신성염곡, 발생설

 

Ⅱ. 선행 검토 사항

모든 연구에 기본이 되는 것은 존재하는 기록에 대한 정당한 해석과 평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몇 가지 측면에서 커다란 착오를 범하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대표적인 것들로는 아리랑과 <본조아리랑>을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고 있는 것, 신성염곡(新星艶曲)을 근대의 노래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 타카하시 토오루(高橋亨)의 논지로 만들어진 ‘아리랑 발생설’을 김지연이 만들었으며 아리랑 발생의 연원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와 같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내용들은 아리랑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며 정확한 해석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2.1 본조 아리랑의 개념 오해

책이나 논문은 물론이고 다양한 매스컴 등을 포함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아리랑을 <본조 아리랑>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리랑과 <본조 아리랑>은 다른 것이다.

아리랑과 관련된 기록 속에서 본조라는 개념은 별조로 부터 만들어졌다. 시발점이 되는 것은 와다텐민의 책이다. 1921년, 와다 텐민[和田天民, 久保田天南 畵, '조선의 향기(朝鮮の匂ひ)', 京城:ウツボヤ書籍店, 1921]에서 별조(別調)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이를 바탕으로 1930년, 김지연은 <별조 아리랑>이라는 곡명을 수록하였고, 이후에 '조선의 민요'(성경린⋅장사훈 공저)에는 11절로 된 <본조 아리랑>이라는 곡명이 나오게 된다.

<본조 아리랑>은 영화 아리랑이나 아리랑과 다르다. 후렴구가 뒤에 나오며, 가사가 다르고, 일부의 내용이 빠져있다. 가사가 다른 부분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대신에 “아리랑 띄여라 노다 가세”라고 되어 있다.

영화 아리랑에 나오는 가사 중에 2절과 4절의 내용도 없다. <본조 아리랑>이라고 붙인 이유는 경기 지역에서 불리던 노랫말이기 때문이다.

<본조 아리랑>은 경기 아리랑의 한 종류를 기술한 것이다. 문제는 성경린⋅장사훈이 <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후의 연구자들이 잘못 이해한 측면이 크다. 원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결과이다.

 

2.2 신성염곡의 발생 시기 오류

황현의『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바와 같이 아리랑은 신성염곡(新聲艶曲)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신성염곡이라는 표현은『매천야록』에서 처음 나타난 용어는 아니다.

『성종실록』(1499년)은 물론『고려사절요』(1453년), 『고려사』(1454년) 및『세종실록』(1454년) 등에도 나타나며, 고려시대에 유행한 특정한 문학 장르에 연원이 닿아 있다.

즉 조선 초기에 간행된 고려시대의 역사적 기록 속에는 13세기 이후인 고려 후기에 해당하는 특정한 음악적 형태에 대해 신성(新聲), 신성음사(新聲淫詞), 신조(新調)라든가 의미는 같지만 표현을 달리한 후전(後殿) 또는 북전(北殿)이라는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신성(新聲)이라는 표현은 1894년대에 처음 나타난 근대의 노래라는 의미가 아니다. 신성(新聲)의 신(新)의 의미를 ‘새로운’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하여 近代의 노래라든가 신민요 등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신성(新聲)이란 신성음사(新聲淫詞)를 뜻하며, 고려시대에 유행한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등과 같은 북전(北展)또는 후전(後殿)의 노래를 뜻한다.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와 유사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문학에서 신조(新調)나 신성(新聲)이라는 표현은 비교문학적으로 곡(曲)이라는 문학 장르와 관련이 있다.

곡(曲)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신성(新聲)이란 의미는 새로운 소리 또는 노래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신성이라는 표현이 역사상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기원전 11세기 전후, 은나라 주왕(?~BC 1046)이 즐겨듣던 애조를 띤 슬픈 음조의 노래인 신성백리(新聲百里)에서 기원한다. 이때에 비로소 이런 형태의 음악이 처음 나타났다.

국문학의 경우 13세기 이후 여말선초에 이르는 기간에 해당하는 고려 망국 시점에 만들어진 애조를 띤 내용의 시 형태들을 유사한 예로 들 수 있다. 신성이라는 용어는 원곡과 교섭이 이뤄지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2.3 아리랑 발생설의 왜곡

1930년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朝鮮)에는 총독부 촉탁 김지연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민요(朝鮮民謠) 아리랑」이 기고되었다. 아리랑의 어원과 더불어 몇 개의 아리랑 가사들을 소개하였는데, 이는 아리랑 연구에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아리랑 발생설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롱(我耳聾)설⋅아리랑(我離娘)설⋅아난리(我難離)설⋅아랑(阿娘)설⋅아랑위(兒郞偉)설을 소개하면서 어영(於英)설에서 변형된 알영(閼英)설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다양한 주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이병도(李丙燾)의 아라(樂浪)설(1959년), 양주동(梁柱東)의 아리嶺설(1959년), 임동권(任東權)의 의미소실(意味消失)설(1969년), 정익섭의 얄리얄리 전음설(1969년), 원훈의(元勳義)의 아리고 쓰리다설(1978년), 조용호(趙容晧)의 여말선초 암호문론(2002년) 등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김지연의 아리랑 발생설은 경복궁 부흥공사나 신라시대라는 역사적 사실과의 연관성, 밀양 지역에 기반을 두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설화, 건축과 관련된 민속 등과 결부되어 있어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설로 자리 잡았고, 지금까지도 아리랑 연구에 기본이 되는 설로 등장하고 있다.

채집된 가사로는 <신 아리랑>⋅<별조 아리랑>⋅<아리랑 타령> 등은 물론 지역 명칭이 붙은 <원산 아리랑>⋅<밀양 아리랑>⋅<강원도 아리랑>⋅<서울 아리랑>⋅<정선 아리랑> 등이 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적 내용임을 시사하는 두 개의 자료인 아리랑 발생설과 아리랑 가사를 하나로 합쳤을 때 실증적이지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 즉 아리랑의 뜻을 채집된 노랫말에 대입하면 발생설 내용과 어떠한 연관성도 찾을 수 없다.

결국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인의 공통 심성인 조선심과 민족성을 파악하는 과정 속에서 조선인의 핵심이 아리랑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리랑의 기원에 대하여 변형하고 희화화하여 뜻을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조선민족의 혼 아리랑에 대한 존엄성을 박탈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리랑 연구의 목적이었다. 한민족의 혼이 크게 훼손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아리랑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Ⅲ. 아리랑의 본질적 모습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아리랑 연구의 내용 중에서 잘못 이해되거나 왜곡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통해 본질적인 성격을 알 수 있게 된다. 주요한 역사적 기록 속에는 다양한 형태의 본질적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3.1 암호 사상⋅정치 상황⋅뱃노래

근래에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2014년)라는 책이 번역 출판되었다. 1918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내용이 1992년에 영문으로 간행되었고, 2014년에 국문으로 번역 출판된 것이다.

구슬픈 장안사의 아리랑, 1918년 가을.

우리는 커다란 일주문을 통과하여 영원한 안식처라는 뜻의 장안사로 들어섰다. 저녁상은 한 참을 기다려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저녁상이 들어왔다. 이미 늦은 식사였고, 너무 배가 고파서 우리는 젓가락을 들고 말도 없이 밥만 먹었다. 그때 바로 옆방에서 낮고 구슬픈 가락이 들려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저 곡은 옛날 조선 실향민의 노래라오. 왠지 나는 저 노래만 들으면 <볼가강의 뱃노래>가 연상되던데, 아무튼 이 노래의 가사에 대한 해석은 수십가지가 넘소. 어떤 가사를 붙여 부르든 곡조 자체에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오. 일종의 암호 같은 거랄까.” 브루스가 설명했다.

그 당시에 이미 1926년 영화 아리랑에서 불리던 것과 똑같은 아리랑이 강원도 금강산 장안사에서도 불리고 있었다. 가사의 형태와 관련하여, 아리랑은 영화 아리랑에서 처음 만들어 졌다는 주장이 학계에 공인되어 있었는데, 이 기록의 출현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리랑>은 영화 아리랑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이전에 불리고 있던 다양한 아리랑 중의 변이형일 뿐이다.

당대인들은 아리랑을 암호문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정치적 상황을 나타내고, 뱃노래의 성격이 있다고 전한다. 이러한 상황은 『매천야록』에 나오는 아리랑(阿里娘)이라는 표기는 물론 헐버트가 뱃놀이의 전통에 기인한다는 기록과도 관련이 있으며, 님 웨일즈(Nym Wales)가 아리랑(Song of Ariran)(1941년)에서 제기한 비밀결사의 노래(secret revolutionary version)라는 기록과도 관련이 있다.

 

2. 허사 아닌 실사⋅신성염곡⋅가극의 노래

아리랑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자료 중의 하나는 매천야록이다. 1894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내용 중에는 아리랑의 뜻과 성격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매일 밤마다 궁궐에 전등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광대와 재인[優伶]들을 불러들여 아리랑 타령(阿里娘打令)과 같은 신성염곡(新聲艶曲)을 연주하며 놀고 있다. 타령(打令)한다는 말은 민간에서 가극하고 노래하는 것을 이르는 말인데, 이제는 다름 아닌 궁궐에서도 하는 것이다.

아리랑이 뜻 없는 후렴구가 아니라 실사이며, 여자를 뜻하는 랑(娘)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타령(打令), 신성염곡(新聲艶曲) 등의 표현을 통해 노래로 불린 것을 알 수 있고, 연곡(演曲), 우령(優伶), 궁중의 곡연음희(曲宴淫戱)등의 표현을 통해 가극으로도 상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리랑은 가극 속에서 불린 노래이다. 당시 궁궐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었으므로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었다.

 

3. 주식인 쌀밥과 같은 위치⋅뱃노래⋅한(恨)⋅고난 극복

미국인 헐버트는 「조선의 성악」, 조선 노래 모음집(The Korea Repository)에서 아리랑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조선의 성악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대략 782가지 종류의 단가형식으로 된 대중 애창곡인데, 이들 노래들은 발음이 아주 부드러운 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 총칭된다. 일반 조선 대중들에게 이 노래는 조선 음식중 주식인 쌀밥에 해당한다. 즉 다른 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든지 아리랑을 쉽게 들을 수 있다. […] 또한 이 후렴구 노랫말은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조선 사람들의 풍습을 보여준다. […] 노랫말의 범위는 전설, 자장가, 음주가, 가정생활, 여행, 사랑 등 그 주제가 다양하다. 조선인들에게 있어 아리랑은 서정적이고, 교육적이며, 시사적인 측면들이 다 들어있는 노래이다. (文學博士 趙容晧 譯)

조선의 성악에서 아리랑이 차지하는 비중은 음식중 주식인 쌀밥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가장 두드러진 대중 애창곡이며, 단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오랜 기간 불리어 왔으며, 언제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고, 수많은 변형이 가능하다.

후렴구는 뱃놀이와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많다. 아리랑의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어 보이며, 주제는 다양하다. 아리랑을 주식인 밥에 비유하고 있다. ‘아리랑은 쌀’이라고 오역 하고 있는 자료들이 있는데, 수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후렴구는 뱃놀이와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많다고 하였는데, 1912년에 채록된 가사들을 분석해 보면, 아리랑 노래의 가장 본질적인 소재는 물[水]이나 배[船]와 관련이 있다.

 

4. 슬픈 음조⋅중류층 애호⋅조선을 대표⋅감동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는 헐버트가 채보한 곡조를 바탕으로 아리랑을 표현하였다. 노래에서 느껴지는 무량한 감개를 한역하여 아란곡(阿蘭曲)이라는 형태의 시로도 표현하고 있다.

중류층 이하의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으며, 슬픈 음조의 노래라는 것은 헐버트의 기록과 동일하다. 아리랑은 깊은 감동을 주는 노래로, 이미 조선을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5. 후정화⋅애조

1921년, 와다 텐민[和田天民, 久保田天南 畵, 조선의 향기(朝鮮の匂ひ), 京城:ウツボヤ書籍店, 1921]은 아리랑의 후정화적 성격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一. 아리랑>

온돌(溫突) 지피는 연기 온 동네 가득하고, 조선 약주(藥酒)의 짙은 내음 코를 찌르는 초저녁 무렵의 주막집[酒家] 앞을 지나는 사람은 종종 맑고 가는 음절의 장단으로 들려오는 아리랑의 노래를 듣게 된다.

슬픈 가락이 노래 속에 가득하고 여운은 끊어질듯 말듯 길게 늘어져, 어쩐지 사람을 비참하고 처량한 느낌에 빠뜨려 견디지 못하게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리랑 노래는 이전에 민비(閔妃)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으로 당시 궁녀(宮女)들 사이에 한창 유행(流行)하다가 이윽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널리 불리어졌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후정화(後庭花)」에 비유하기도 했다. 후정화란 진(陳)나라가 망할 시기에 불리어진 애조(哀調)를 띤 곡조의 노래를 말한다. (文學博士 趙容晧 譯)

아리랑이 발생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나 조선 말기에 궁궐에서 한창 유행하다가 이윽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널리 불리어졌다. 노래는 <후정화>에 비유될 정도로 애조를 띤 곡조이다.

 

6. 전국적 분포⋅근대에 유행⋅애조⋅민족 노래

김소운은 최남선이 경상·전라·강원·서도 등지의 아리랑을 제시하고 분류한 이래, 경성(京城)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지방의 것, 서부 조선을 주로 한 것, 강원도 부근의 강원 아리랑, 부산 등지에서 듣는 남부 조선의 것, 전라도의 특이한 아리랑 등이 있음을 제시하였다.

아리랑에 대한 율조(律調)를 논하면서 <江原 아리랑> <京畿 아리랑> <西道 아리랑> <嶺南 아리랑> 등을 악보와 함께 소개하였다. 이때 비로소 지역명을 사용한 아리랑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상과 같이 중요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아리랑에는 다양한 형태의 본질적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더 세밀하게 살펴 나가면 숨겨져 있는 많은 내용들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계속)

 

조용호(趙容晧)박사는..

조용호(趙容晧)박사

 

문학박사(文學博士).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아리랑 원형연구』 및 『아리랑의 비밀화(話)원』, 『아리랑 영웅(英雄)』, 『아리랑 연구사(硏究史)』, 『아리랑 원형학』, 『아리랑 연구사』, 『아리랑 연구총서 1』, 『아리랑 연구총서 2』 등 저자(著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진.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아리랑 연구기획위원장. 민요학회 임원. 모바일 반도체그룹 본사부사장. 한국지사장. 시인.

(블로그) '아리랑의 비밀話원, 그 오랜 세월을 당신을 기다리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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