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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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41)
  • 조용호 박사
  • 승인 2022.10.1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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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박사/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연구 -2(제19주제)

아리랑의 비밀을, 저서 ‘아리랑의 비밀話원’을 통해 밝혀낸 조용호 박사가 제주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뜻 있는 자리를 가졌다.

한라산에 있는 사)제주도아리랑보존회(이사장 강소빈)가 주최한 '2022 한국아리랑의 원형연구 조용호 박사 초청강연회' 자리에서였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출신이기도 한 조용호 박사는 이날 모두 6개의 주제로 나눠 아리랑에 대한 모든 내용을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조용호 박사는 아리랑에 대해 “‘아리랑’은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 속에 고도한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 특수한 문장이었다.”며 “그래서 아무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었고, 아리랑이라는 뜻조차도 알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반도체, 정보통신(IT), 암호학 및 고대시가문학, 중세국어 등의 분야에 종사하면서 오랜 기간 아리랑과 민요, 고려가요 등에 나타나는 뜻 모르는 후렴구를 연구해 온 조용호(趙容晧) 박사는 아리랑을 600년 전의 한문과 고려어로 된 의사향찰구조로 재구함으로써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풀어내게 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지는 이 자리에서 이에 대한 모든 원고를 긴급 입수, 조용호 박사로부터 연재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차제에 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의 대중화 및 세계화에 대한 폭넓은 발전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를 차례로 연재하기로 했다. 열 아홉번째 주제는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연구'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Ⅳ. 주요 논점

아리랑의 후렴구에 대한 초기의 기록으로 이승훈의 『만천유고(蔓川遺稿)』에 나오는 「농부사(農夫詞)」에는 아리랑의 변형으로 추측되는 아로롱(啞魯聾) 형태로 나온다.

 

神農后稷이 始耕稼니 自有生民爲大本이라

鐘鼓 울여라 鐘鼓 울여라 薄言招我諸同伴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事育生涯 勞不憚일셰

( 中 略)

牛羊茅草靑山暮요 鸂鷘長洲白露寒

호미여라 호미여라 黃昏月色이 滿旗竿일셰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日夕農談載酒還이라

 

아로롱(啞魯聾)이란 ‘말 안하고[啞] 우둔하게[魯] 귀 막고[聾] 지낸다’는 뜻이다. 이후 유사한 표현은 아이롱(我耳聾)이라든가, ‘아이롱(啞而聾)·아아이롱(我啞而聾)·아리롱(啞利聾)’ 또는 (6)에서 고권삼이 제기한 아이롱(我耳聾) 등과 같은 형태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아리랑의 뜻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아리랑 노래의 성격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 방법이다. 또한 『蔓川遺稿』에 나오는 다른 문집을 보더라도 기존에 없던 내용을 새롭게 지은 것이 아니라, 전해오던 내용을 바탕으로 추가적으로 지었다는 의미로 파악함이 타당하다. 아로롱(啞魯聾)이라는 형태가 그 이전부터 불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1894년의 기술 중에는 아리랑의 뜻과 성격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월(正月)에 임금이 낮잠을 자다가 광화문이 무너지는 꿈을 꾸고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고, 매우 불길한 꿈이라 생각하여 기거할 다른 궁궐을 알아보게 했다. 2월이 되자 창덕궁으로 이사했고, 곧바로 창경궁까지 포함하여 동쪽 궁궐[東宮] 전체를 수선하라고 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남쪽에서 일어나는 난리 때문에 나라가 나날이 위급한 상황으로 가고 있는데, 실제로는 공교롭게도 궁궐 내부에서 일어나는 묘한 상황이 그것보다 훨씬 더 국가적으로 위급한 상황을 빠르게 만들어내고 있다.

즉 매일 밤마다 궁궐에 전등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광대와 재인[優伶]들을 불러들여 아리랑 타령(阿里娘打令)과 같은 신성염곡(新聲艶曲)을 연주하며 놀고 있다. 타령(打令)한다는 말은 민간에서 가극하고 노래하는 것을 이르는 말인데, 이제는 다름 아닌 궁궐에서도 하는 것이다.

임금은 이것을 전담하는 원임대신으로 하필이면 민영주(閔泳柱)를 임명했고, 그에게 수많은 배우를 거느리고 아리랑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게 했다. 관람하다가 잘하는 부분과 못하는 부분에 대해 평하기도 하고, 결과에 따라 상방에 명하여 금과 은을 상으로 주라고 지시까지 했다.

이러한 야간 행사는 대조규개(大鳥圭介)가 무력으로 궁궐에 침범하던 시기까지 계속되다가 그 후 그만두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는 아리랑 타령(阿里娘 打令)이라는 표현을 통해 아리랑은 여자를 뜻하는 랑(娘)으로 정의하였으며, 타령(打令), 신성염곡(新聲艶曲) 등의 표현을 통해 노래로 불린 것을 알 수 있고, 연곡(演曲), 우령(優伶), 궁중의 곡연음희(曲宴淫戱)등의 표현을 통해 가극으로도 상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리랑은 가극 속에서 불린 노래이며, 당시 궁궐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었으므로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알려져 있었다.

아리랑 연구는 이와 같은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시작되었어야 했으나,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경우 아리랑의 뜻에 대한 설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1930년대를 훨씬 지난 시점인 1955년에 와서야 출판된 이유로 수많은 어원설 중의 하나 정도로만 여겨져,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더구나 아리랑의 뜻이 랑(娘)이 되면 떠나는 사람이 남자가 아닌 여자가 되어 노랫말의 내용과 반대가 되는 이유도 있었다. 『만천유고(蔓川遺稿)』의 경우도 197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유로 단지 아리랑과 유사한 형태의 발음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해야할 사실은 설이 아닌 역사적 기록(記錄)이라는 측면이다. 즉 어떠한 이유로 아리랑의 뜻을 아리랑(阿里娘)이라든가 아로롱(啞魯聾)과 같은 형태로 표현하였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던 것이었으나,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기록과 설을 혼동한 잘못된 연구의 소산이다.

한편 1894년 8월 27일에 발간된 조선어 학습서에는 인천(仁川)에서 불린 것으로 알려진 아리랑의 형태가 나오기도 한다. 다만 노래의 제목은 가(歌)라고만 되어 있다.

1896년에 헐버트는 「한국의 성악(Korean Vocal Music)」이라는 글에서 구아리랑의 한 종류를 소개하면서 아리랑은 남편을 사랑한다[I love my husband]는 뜻의 한자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비숍(Isabella Bishop)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1897)과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의 『한반도(韓半島)』(1901) 및 알렌의 『조선견문기(THINGS on KOREA)』(1908) 등에 재 수록되었다. 특히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는 아리랑을 여자 이름인 아란(阿蘭)이라는 형태의 한자로도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초기의 기록들은 아리랑을 여성 또는 여성과 관련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광수는 아리랑의 뜻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았는데, 이를 기점으로 소실(消失)된 것으로 판정한 아리랑의 뜻에 대한 다양한 설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즉 영화 아리랑이 1926년 10월 1일 상영되고 3년이 훨씬 지난 시점인 1930년 6월, 조선총독부 촉탁연구원으로 있던 金志淵은 총독부 기관지 『조선(朝鮮)』을 통해 「朝鮮民謠 아리랑, 朝鮮民謠의 硏究(二)」를 발표하였다.

아리랑 발생설(發生說)이라는 이름으로 아리랑과 유사한 한자 발음에 배경설화를 곁들인 아이롱(我耳聾)설·아리랑(我離娘)설·아난리(我難離)설·아랑(阿娘)설·아랑위(兒郞偉)설·알영(閼英)설 등 6개의 설을 제시하였으며, 몇 종류의 아리랑 가사도 함께 소개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아리랑 연구의 연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조용호는 “최초로 제기된 金志淵의 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유사한 형태의 발음과 이에 대한 설화적 설명을 곁들이면 아리랑이 된다는 연구방법의 기원과 그것이 갖는 사상적(思想的) 배경 및 추구하는 목적(目的)에 대해서는 결코 단 한 번도 학술적(學術的)인 회의(懷疑)의 대상이 된 바 없으며,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도 없었다.

뜻 모르는 후렴구로 판정한 당대의 아리랑에 대하여 다양한 종류의 의미를 부여한 것은 어떠한 시대적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며 의도하는 목표가 무엇이었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후에 나타난 설들도 최초에 제기된 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이제 근본원인의 실체를 규명해야 할 때이다.”라는 논지를 통해, “아리랑 발생설은 조선총독부가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찬양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만들어낸 식민사관의 결정체”라고 논하였다.

이는 그간 아리랑의 연원으로 간주되어오던 ‘아리랑 발생설’을 조선총독부에 의한 식민사관으로 판정한 최초의 논고이기도 하다.

고권삼은 아리랑을 아이롱(我耳聾)으로 표기하면서 조선 초기에 정치적 방임주의에서 나왔음을 논하였다. 아리랑은 여말선초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이병도는 아리랑을 고개와 연결시켜 고찰하였는데, 이를 통해 아리랑과 아리랑 고개 간의 관련성이 제기되었다. 즉 아리랑 고개는 고대국가인 낙랑의 남쪽에 있는 자비령의 이름으로 낙랑(樂浪)은 ‘아라’로 발음되므로 아리랑 고개는 자비령 고개라는 견해이다.

이에 대해 양주동은 부회(附會)라고 반박하면서, ‘아리’는 (光)의 고어이고, ‘랑’은 령(嶺)의 전음으로 아리랑 고개란 광명한 고개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리령이 아리랑으로 바뀌는 규칙이 불명확하고, 아리랑에는 아리랑 고개라는 구절이 나오는 노래도 있지만 나오지 않는 노래[주로 구아리랑, 긴아리랑 등]도 있고, 아리랑 고개가 나오는 노래에는 아리랑 고개라는 한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리랑 고개 고개, 아리 아리랑 고개, 아리 아리랑 고개 고개, 아라리 고개, 아리 아리 고개, 아리 아리 아리 고개, 아리 아리랑 아리랑 고개 등과 같이 변형된 모습도 각편 속에 존재하므로, 이를 같이 설명하고 풀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외에 정익섭은 ‘얄리 얄리’로부터 전음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임동권은 김지연의 주장에 대해 일부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기도 하고[아랑설 · 알영설], 또 다른 주장에 대해서는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반박도 하면서[아이롱설·아리랑설·아난리설], 이병도와 양주동의 설에 의미가 있다고 보기도 하였다. 아리랑의 뜻이 소실되어 후렴구 형태로 변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광수의 주장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이상에서 제기된 설들이 ‘아리랑 아라리요’를 동시에 설명하지 못하고 있고, 아리랑 고개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일반화하지 못하고 있다. 아리랑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라리요’와의 형태적 결합에 의하여 존재하며, 아리랑 고개와도 관련성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원훈의는 ‘아리랑 쓰리랑’을 하나의 문장으로 보고 ‘아리고 쓰리다’라는 고어의 형태로 풀이하려 하였다.

조어적 측면에서의 문장 형태를 고려하였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주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어원 연구의 진행 단계에서 보면 아리랑이라는 단순 후렴구 형태에서 문장형태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 쓰리랑에 대한 풀이가 맞는 것인지의 여부를 떠나 아리랑 고개라든가 아리랑 아라리요 또는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등의 후렴구를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한편 메아리가 산울림[山音]이라는 고어적인 뜻에 착안하여, 메아리의 ‘아리’를 ‘아리랑’의 뜻과 연결시키려는 연구도 있었다.

심재덕은 ‘메’는 ‘뫼’의 전음이며, ‘뫼’가 탈락되어 ‘아리’가 남았고, ‘아리’는 ‘노래’를 뜻하는 ‘소리’라는 뜻을 갖게 되므로 아리랑은 ‘산의 노래’라는 논지이다. 이러한 견해가 제시된 이래 ‘아리’가 ‘소리(노래)’라는 개념은 지속적으로 또 다른 변형된 설을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설이 주창자인 심재덕이 “아리랑은 아리라로, 아리라는 아리로, 그래서 다시 아리는 요(謠)라는 뜻으로 해명되었다고 보며 아리랑 타령이나 아리랑 고개 같은 말의 그릇된 점은 동시에 시정될 것으로 믿는 바이다.”라고 오해(誤解)한 바와 같이 아리랑과 아리랑 고개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견해라든가, 아리랑에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후렴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매천야록』등에 나타나는 기록과 무관한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조용호는 지금까지의 논의가 ‘아리랑’이나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거쳐 ‘아리랑 쓰리랑’까지 설명하려던 단계를 넘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를 해독하고,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를 동일한 규칙으로 풀어낸 후, 이를 노랫말 전체로 확대하였다.

아리랑 후렴구에 나타나는 ‘아리랑 쓰리랑’이라는 후렴구를 ‘아리랑은 신성한 아가씨[女郞]’라는 뜻으로 해독하였는데, 이는 황현이 기록으로 남긴 ‘아리랑’의 뜻은 랑(娘)’이라는 아리랑(阿里郞)의 개념과 일치하며, 노랫말 속에 특정한 의미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기록에 입각하여 아리랑의 뜻과 노래의 의미를 고증한 연구이다.

 

Ⅴ. 결론

아리랑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며, 왜곡된 연구를 바탕으로 뜻을 모르는 노래로 희화화되기는 하였지만, 노래 가사의 연원에 대한 분석이나 기록에 나타나는 내용을 통해 아리랑의 뜻과 노래가 갖고 있는 성격들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아리랑의 뜻은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과 일치하거나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타나는 1894년의 기술을 통해, 아리랑의 뜻과 성격을 세부적으로 알 수 있다. 아리랑(阿里娘)이라는 표현에 대해 아리랑의 뜻은 여인(女人)을 뜻하는 랑(娘)이거나 또는 다른 의미로서의 아리랑(阿里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타령(打令), 신성염곡(新聲艶曲) 등의 표현을 통해 노래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시노부 쥰페이나 최영년이 거론하는 바와도 일치한다. 망국적 음조가 있었던 시기와 관련이 있는 애가적 음조를 띤 노래이다.

아리랑이 어떠한 이유로 신성염곡(新聲艶曲)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비교문학적으로 신성염곡이라는 개념은 연원이 오래 되었는데, 국문학에서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아리랑은 뜻을 모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아리랑 연구는 기록에 대한 고증을 바탕으로 시작되었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하였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경우 아리랑의 뜻에 대한 설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1930년대를 훨씬 지난 시점인 1955년에 와서야 출판된 이유로 수많은 어원설 중의 하나 정도로만 여겨져,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더구나 ‘아리랑’의 뜻이 랑(娘)이 되면 떠나는 사람이 남자가 아닌 여자가 되어 노랫말의 내용과 반대가 되는 이유도 있었다. 『蔓川遺稿』의 경우도 197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유로 단지 ‘아리랑’과 유사한 형태의 발음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해야할 사실은 설이 아닌 역사적 기록(記錄)이라는 측면이다.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했던 것이었으나,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기록과 설을 혼동한 잘못된 연구의 소산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아리랑에는 기록에 나타나는 모든 성격들이 포함되어 있게 된다.

향후의 연구는 기록을 포함하는 다양한 조건들을 만족하는 어원과 기원에 대한 제시가 가능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제19주제 끝)

 

 

조용호(趙容晧)박사는..

조용호(趙容晧)박사

 

문학박사(文學博士).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아리랑 원형연구』 및 『아리랑의 비밀화(話)원』, 『아리랑 영웅(英雄)』, 『아리랑 연구사(硏究史)』, 『아리랑 원형학』, 『아리랑 연구사』, 『아리랑 연구총서 1』, 『아리랑 연구총서 2』 등 저자(著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진.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아리랑 연구기획위원장. 민요학회 임원. 모바일 반도체그룹 본사부사장. 한국지사장. 시인.

(블로그) '아리랑의 비밀話원, 그 오랜 세월을 당신을 기다리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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