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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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한민족의 혼(魂), 그 영원한 비밀의 암호 코드를 해독하다!(46)
  • 조용호 박사
  • 승인 2022.10.2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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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 박사/ '아리랑의 선행연구- 1(제22주제)

아리랑의 비밀을, 저서 ‘아리랑의 비밀話원’을 통해 밝혀낸 조용호 박사가 제주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뜻 있는 자리를 가졌다.

한라산에 있는 사)제주도아리랑보존회(이사장 강소빈)가 주최한 '2022 한국아리랑의 원형연구 조용호 박사 초청강연회' 자리에서였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출신이기도 한 조용호 박사는 이날 모두 6개의 주제로 나눠 아리랑에 대한 모든 내용을 소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조용호 박사는 아리랑에 대해 “‘아리랑’은 너무나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 속에 고도한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 특수한 문장이었다.”며 “그래서 아무도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 것이었고, 아리랑이라는 뜻조차도 알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반도체, 정보통신(IT), 암호학 및 고대시가문학, 중세국어 등의 분야에 종사하면서 오랜 기간 아리랑과 민요, 고려가요 등에 나타나는 뜻 모르는 후렴구를 연구해 온 조용호(趙容晧) 박사는 아리랑을 600년 전의 한문과 고려어로 된 의사향찰구조로 재구함으로써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풀어내게 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지는 이 자리에서 이에 대한 모든 원고를 긴급 입수, 조용호 박사로부터 연재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차제에 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의 대중화 및 세계화에 대한 폭넓은 발전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를 차례로 연재하기로 했다. 스물 두번째 주제는 '아리랑 선행연구'이다.(편집자주)

 

 

아리랑 선행연구 Precedent researches on Arirang

조용호(趙容晧)

 

Ⅰ. 서 론

아리랑에 대한 글을 쓰거나, 학술비평 또는 논문 등을 쓰는 경우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분야에 대한 선행연구라 할 수 있다. 선행연구(先行硏究)라는 것은 연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존에 있는 역사 기록, 노랫말, 학술 자료 등을 포함하여 먼저 기록해 놓은 결과를 고찰하고, 비평을 통해 깊이 있게 살펴보는 것을 뜻한다. 선행연구를 정확하게 검토해야 제대로 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리랑에 있어서도 선행연구검토는 가장 먼저 살펴야 하는 기본이 되는 고려사항이다. 특히 기존에 고려되지 않았던 자료라든가, 잘못 이해된 부분, 새롭게 발견된 기록 등은 반드시 추가하여 정당하게 고찰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하는 연구가 잘못된 결론으로 유도될 수 있다. 정확한 검토를 통해 비로소 아리랑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아리랑 연구는 처음부터 학술적 고찰의 대상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근대의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 중에서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 와다 텐민(和田天民), 이치야마 모리오(市山盛雄) 등은 매우 특별한 노래로서의 아리랑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내국인에 의한 연구로는 최영년,, 최남선, 이광수, 김소운 등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요 연구로서의 아리랑이 학술적 논의의 대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연구는 김지연의 아리랑 발생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김재철, 김태준 등의 언급과 인용을 거치면서 아리랑 연구의 중심설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1945년의 해방과 1950년의 6.25 동란 등 민족적 변혁기를 거치면서 일본, 미국, 중국 등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매스컴을 통해 민간에 확대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접 학문과의 교섭이라는 측면에서 이병도, 양주동, 심재덕, 등에 의해 학술적 논의가 재개되었으며, 이후에 임동권(任東權), 정익섭 등 다양한 주장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의 뜻조차 밝히지 못하게 됨으로써 뜻 없는 후렴구의 노래이고, 발생 시기는 영화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생각으로 고착되기도 하였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기록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황현, 임동권, 어영(於英)설, 고권삼, 님 웨일즈, 메리 린리 테일러 등의 기록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학술적 범주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거나 배제된 상태에 있었다.

본고는 새롭게 발견된 기록을 포함하여 아리랑의 선행연구에 대하여 정당하고 객관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주제어 : 선행연구, 매천야록, 메리 테일러, 본조, 아리랑 발생설

 

Ⅱ. 연구의 흐름

전래되던 아리랑이 역사 기록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이다. 아리랑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자료 중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이른 기록은 1894년의 『매천야록』이다.

내용 중에는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 신성염곡(新聲艶曲)’이라는 표현이 있다. 아리랑(阿里娘)의 뜻은 젊은 여자를 뜻하며, 동시에 신성염곡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1896년 헐버트(H. B. Hulbert)는 「조선의 성악」, 조선 노래 모음집(The Korea Repository)에서 아리랑을 아르랑(영문은 Ararung)으로 표기하였다. 음식에서 주식인 쌀밥과 같은 위상의 노래이며 뱃노래에서 불리는 곡이라고 하였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비숍(Isabella Bishop)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1897)과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의 『한반도(韓半島)』(1901) 및 알렌의 『조선견문기(Things on Korea)』(1908) 등에 다시 수록되어 전한다.

1912년 전국에 걸쳐 조사된 자료에는 아리랑⋅아르랑⋅아라랑⋅아라리 타령이라는 표기가 있고, 노래 곡명으로는 <아리랑가(歌)>⋅<아리랑 타령>⋅<어르렁 타령(打令)>⋅<아르렁 타령(打令)> 등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난다.

아리랑은 <어르렁 타령(打令)>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고, <사랑가(歌)>라는 형태로도 존재한다.

1918년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에는 메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가 금강산 장안사에서 들었던 구슬픈 가락의 한 소절을 수록하였다. 이 기록은 2014년에 국문으로 번역되면서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26년 영화 아리랑이 상영되면서 주제가로 사용되었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가사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고 「아리랑 등 자작 전부를 말함」(『삼천리』, 1937. 1)에서 회고하였다.

전체 4절중에 1절은 <아리랑>이며, 2절은 1918년에 채집된 가사와 내용이 같다. 장안사에서 들었던 아리랑의 전체 가사는 영화주제가 아리랑의 일부 내용에 해당되고 있다.

1927년 이광수의 「조선민요에 나타나는 조선 민족성이 한 단면」에 일역되어 있는 내용을 국문으로 옮기면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가서 발병난다’와 유사한 내용이 된다.

다만 <아리랑>을 민요라고 하면서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부분은 기술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후렴구 부분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930년 2월 잡지 '삼천리'에 실린 아리랑에는 또 다른 형태의 노랫말이 있다. 가사 전체는 3절로 되어 있는데, 특이한 점은 ‘나를 버리고’가 ‘날 버리고’라는 형태로도 불렸다는 사실이다.

1930년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朝鮮'에는 총독부 촉탁(總督府囑託) 김지연(金志淵)이라는 이름으로 「朝鮮民謠 아리랑」이 기고되었다. 아리랑의 어원과 더불어 몇 개의 아리랑 가사들을 소개하였는데, 이는 아리랑 연구에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 중에 나오는 6개의 아리랑 발생설(發生說)은 조선총독부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아리랑 연구의 연원이 되고 있다. 아리랑 가사 중에는 영화 아리랑에 나온 것과 거의 동일한 가사를 <신(新) 아리랑>이라고 다르게 명명하였다.

바야흐로 <신아리랑>이라는 명칭이 출현한 것이다. 1920년대부터 전통아리랑에서 변형된 노래들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곡목에 변동은 없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정식 곡목으로서 사용하게 된다. 이외에도 다수의 <신아리랑>이 나타났으며, 신민요라는 명칭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버리고가는님은

十里를못가서발병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豐年이온다네 豐年이온다네

三千里江山에 豐年이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山川에草木은 젊어가고

人間에青春은 늙어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青天하늘엔 별도만코

우리네살림사리 말도만타

 

아리랑과 비교하면 ‘가시는 님’이 ‘가는 님’, ‘십리도’가 ‘십리를’로, ‘발병난다’가 ‘발병나네’로 되어 있고, 노래의 구성은 4절까지 되어 있다.

1949년에는 <본조(本調) 아리랑>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조선의 민요(성경린⋅장사훈 공저)에 11절로 구성된 새로운 아리랑의 명칭이다.

 

本調아리랑

 

이씨(李氏)의 사촌(四寸)이 되지 말고

민씨(閔氏)의 팔촌(八寸)이 되려무나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 가세

(이하(以下) 후렴은 생략(省略)함)

문전(門前)의 옥토(沃土)는 어찌 되고

쪽박의 신세(身世)가 왼 말인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十里)도 못 가서 발병 난다

풍년(豊年)이 왔다네 풍년(豊年)이 와요

삼천리(三千里) 강산(江山)에 풍년(豊年)이 와요

 

<본조 아리랑>은 영화주제가 아리랑이나 아리랑과 다른 것이다. 후렴구가 뒤에 나오며, 가사가 다르고, 일부의 내용이 빠져있다. 가사가 다른 부분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대신에 “아리랑 띄여라 노다 가세”라고 되어 있다.

영화 아리랑에 나오는 가사 중에 2절과 4절의 내용도 없다. <본조 아리랑>이라고 붙인 이유는 경기 지역에서 불리던 노랫말이기 때문이다. <본조 아리랑>은 경기지역 아리랑의 한 종류를 기술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리랑>은 1912년에 전래되던 형태가 발견된 이래 지속적으로 관련 자료가 나타나고 있다. <어르렁 타령(打令)>을 비롯하여, 장안사에서 들은 <메리 아리랑>, 영화주제가 <아리랑>, 잡지 『삼천리』의 <아리랑>, <신아리랑>, <본조 아리랑> 등을 통해 연속성의 측면에서 아리랑이 전개되어온 변천의 과정과 연원을 알 수 있다.

 

Ⅲ. 선행연구 비평

모든 연구에 기본이 되는 것은 존재하는 기록에 대한 정당한 해석과 평가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지금까지 연구들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

문제가 되고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아리랑과 <본조아리랑>을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고 있는 것, 신성염곡(新星艶曲)을 근대의 노래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 타카하시 토오루(高橋亨)의 논지로 만들어진 아리랑 발생설을 김지연이 만들었으며 아리랑 발생의 연원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와 같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내용들은 아리랑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며 정확한 해석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3.1 본조 아리랑의 개념 오해

책이나 논문은 물론이고 다양한 매스컴 등을 포함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아리랑을 학술적으로 <본조 아리랑>이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리랑과 <본조 아리랑>은 다른 것이다. 아리랑과 관련된 기록 속에서 본조라는 개념은 별조로 부터 만들어졌다.

시발점이 되는 것은 와다텐민의 책이다. 1921년, 와다 텐민[和田天民, 久保田天南 畵, '조선의 향기(朝鮮の匂ひ)', 京城:ウツボヤ書籍店, 1921]에서 별조(別調)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이를 바탕으로 1930년, 김지연은 <별조 아리랑>이라는 곡명을 수록하였고, 이후에 '조선의 민요'(성경린⋅장사훈 공저)에는 11절로 된 <본조 아리랑>이라는 곡명이 나오게 된다.

<본조 아리랑>은 영화 아리랑이나 아리랑과 다르다. 후렴구가 뒤에 나오며, 가사가 다르고, 일부의 내용이 빠져있다. 가사가 다른 부분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대신에 “아리랑 띄여라 노다 가세”라고 되어 있다.

영화 아리랑에 나오는 가사 중에 2절과 4절의 내용도 없다. <본조 아리랑>이라고 붙인 이유는 경기 지역에서 불리던 노랫말이기 때문이다. <본조 아리랑>은 경기 아리랑의 한 종류를 기술한 것이다.

문제는 성경린⋅장사훈이 <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이후의 연구자들이 잘못 이해한 측면이 크다. 원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결과이다.

 

3.2 신성염곡의 발생 시기 오류

황현의『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바와 같이 아리랑은 신성염곡(新聲艶曲)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신성염곡이라는 표현은 『매천야록』에서 처음 나타난 용어는 아니다.

『성종실록』(1499년)은 물론 『고려사절요』(1453년), 『고려사』(1454년) 및 『세종실록』(1454년) 등에도 나타나며, 고려시대에 유행한 특정한 문학 장르에 연원이 닿아 있다.

즉 조선 초기에 간행된 고려시대의 역사 기록 속에는 13세기 이후 고려 후기에 해당하는 특정한 음악적 형태에 대해 신성(新聲), 신성음사(新聲淫詞), 신조(新調)라든가, 의미는 같지만 표현을 달리한 후전(後殿) 또는 북전(北殿)이라는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신성(新聲)이라는 표현은 1894년대에 처음 나타난 근대의 노래라는 의미가 아니다. 신성(新聲)의 신(新)의 의미를 ‘새로운’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하여 근대의 노래라든가 신민요 등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신성(新聲)이란 신성음사(新聲淫詞)를 뜻하며, 고려시대에 유행한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등과 같은 북전(北展)또는 후전(後殿)의 노래를 뜻한다.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와 유사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문학에서 신조(新調)나 신성(新聲)이라는 표현은 비교문학적으로 곡(曲)이라는 문학 장르와 관련이 있다.

곡(曲)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신성(新聲)이란 의미는 새로운 소리 또는 노래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신성이라는 표현이 역사상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기원전 11세기 전후, 은나라 주왕(?~BC 1046)이 즐겨듣던 애조를 띤 슬픈 음조의 노래인 신성백리(新聲百里)에서 기원한다.

이때에 비로소 이런 형태의 음악이 처음 나타났다. 국문학의 경우 13세기 이후 여말선초에 이르는 기간에 해당하는 고려 망국 시점에 만들어진 애조를 띤 내용의 시 형태들을 유사한 예로 들 수 있다. 신성이라는 용어는 원곡과 교섭이 이뤄지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3.3 아리랑 발생설의 왜곡

1930년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朝鮮)'에는 총독부 촉탁 김지연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민요(朝鮮民謠) 아리랑」이 기고되었다. 아리랑의 어원과 더불어 몇 개의 아리랑 가사들을 소개하였는데, 이는 아리랑 연구에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아리랑 발생설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롱(我耳聾)설⋅아리랑(我離娘)설⋅아난리(我難離)설⋅아랑(阿娘)설⋅아랑위(兒郞偉)설을 소개하면서 어영(於英)설에서 변형된 알영(閼英)설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다양한 주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이병도(李丙燾)의 아라(樂浪)설(1959년), 양주동(梁柱東)의 아리嶺설(1959년), 임동권(任東權)의 의미소실(意味消失)설(1969년), 정익섭의 얄리얄리 전음설(1969년), 원훈의(元勳義)의 아리고 쓰리다설(1978년), 조용호(趙容晧)의 여말선초 암호문론(2002년) 등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특히 김지연의 아리랑 발생설은 경복궁 부흥공사나 신라시대라는 역사적 사실과의 연관성, 밀양 지역에 기반을 두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설화, 건축과 관련된 민속 등과 결부되어 있어 쉽사리 무시할 수 없는 설로 자리 잡았고, 지금까지도 아리랑 연구에 기본이 되는 설로 등장하고 있다.

채집된 가사로는 <신 아리랑>⋅<별조 아리랑>⋅<아리랑 타령> 등은 물론 지역 명칭이 붙은 <원산 아리랑>⋅<밀양 아리랑>⋅<강원도 아리랑>⋅<서울 아리랑>⋅<정선 아리랑> 등이 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적 내용임을 시사하는 두 개의 자료인 아리랑 발생설과 아리랑 가사를 하나로 합쳤을 때 실증적이지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 즉 아리랑의 뜻을 채집된 노랫말에 대입하면 발생설 내용과 어떠한 연관성도 찾을 수 없다.

결국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인의 공통 심성인 조선심과 민족성을 파악하는 과정 속에서 조선인의 핵심이 아리랑인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리랑의 기원에 대하여 변형하고 희화화하여 뜻을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조선민족의 혼 아리랑에 대한 존엄성을 박탈하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리랑 연구의 목적이었다. 한민족의 혼이 크게 훼손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아리랑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어서 계속)

 

 

조용호(趙容晧)박사는..

조용호(趙容晧)박사

 

문학박사(文學博士).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아리랑 원형연구』 및 『아리랑의 비밀화(話)원』, 『아리랑 영웅(英雄)』, 『아리랑 연구사(硏究史)』, 『아리랑 원형학』, 『아리랑 연구사』, 『아리랑 연구총서 1』, 『아리랑 연구총서 2』 등 저자(著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진.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아리랑 연구기획위원장. 민요학회 임원. 모바일 반도체그룹 본사부사장. 한국지사장. 시인.

(블로그) '아리랑의 비밀話원, 그 오랜 세월을 당신을 기다리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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