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마을을 지켜온.. 유수암리 유수암천(태암천, 용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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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마을을 지켜온.. 유수암리 유수암천(태암천, 용천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12.23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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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고지 이상 산간 마을 중 시간당 13,000리터의 생수는 유수암천뿐..

유수암리 유수암천(태암천, 용천수)

위치 ; 유수암리 1937번지의 서쪽. 마을 중심부. 유수암천의 주소는 유수암리 3234번지이나 이는 주변 도로 등 공유지를 모두 포함하는 번지이다.
시대 ; 미상(고려시대 추정)
유형 ; 수리시설(용천수)

 

유수암리_유수암천



애월읍 유수암리는 해발 200~250m 높이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유수암, 거문덕이, 개척단지 등으로 이뤄져 있다.

유수암리 마을 홈페이지에는 “유수암 큰물은 우리 마을 형성의 밑바탕이었으며 마을 이름이 淵源(연원)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유수암천(流水岩泉)’은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항파두리성을 근거지로 삼고 고성리의 ‘구시물’과 ‘옹성물’, ‘유수암천’을 식수로 사용하게 되면서 그 형태가 이뤄지게 됐다고 전한다.

유수암천의 머릿돌 곁에 세워진 비석 내용;

 『한라산서북 나래 드리운 곳에 우뚝 솟은 절마루! 그 아래 十里墟(십리허)에 蜂巢形(봉소형)을 이루었고 甘泉(감천)이 湧出(용출)함에 이름하여 流水泉(유수천)이라 하였다.

극심한 旱魃(한발 : 가뭄)에도 끊이지 않으며 여름에 차갑기가 빙수와 같고 겨울에 따스함이 溫泉(온천)을 疑心(의심)할지 내 이 맑은 물은 온 마을에 疫疾(역질)을 예방하고 成人病(성인병)을 볼 수 없으니 醴泉(예천)에 비할지로다.

4·3사건으로 동네가 초토화되어 인적이 끊이기 일 년 이 샘은 흐름을 그치고 식수조 바닥에 겨우 고였을 뿐이었는데 마을이 재건됨에 큰비가 내리지 않았음에도 차츰 흐르기 시작한 것을 볼 때 과연 靈泉(영천)이라 아니할 수 없음이로다.

고려중엽 항파두성에 삼별초군이 웅거할 즈음 泰岩寺(태암사) 들어오며 손길닿아 판석과 장여의 고목판으로 상하식수조, 세소조, 세탁조등으로 개수됨이 그 몇 번이런고!

일제말 聯隊以上(연대이상)의 병마를 본리에 주둔함에 상하식 수조를 확장 상조를 복개하였더니 해방후 장전, 소길리에 식수를 공급키 위해 개수배관시설도 하였고 지금은 집집마다 상수도시설을 하더니 더더욱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이 영천을 잊지 않고 이응호 사장이 애향심을 발휘하여 거금을 쾌척함에 본리의 자부담과 정부의 지원으로 향민의 조언을 들어 우하문교원의 안으로 새롭게 개수 단장하여 선선히 후손들에게 물려주기에 이르러 향민일동은 깊은 감사를 표하고 이 유수암천을 영원히 애호할 것을 바라 이 단석에 명하는 바이다.』

유수암천이 지금처럼 깔끔한 모습을 갖춘 것은 1987년 10월이다. 주민들은 지금도 유수암천이 마을을 지켜왔다고 얘기한다.

항상 깨끗한 수질과 풍부한 수량으로 인해 설촌 이래 단 한번도 호열자(콜레라)같은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았고, 마을 주민들 중에서도 중병을 앓다가 죽은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 샘은 극심한 가뭄에도 그치지 않으며 여름에는 빙수와 같이 차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또한, 식수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군마 급수용으로 도처에 물이 필요했던 삼별초군은 그만큼 물의 소중함을 깨달아, 원천(源泉)은 더럽혀지지 않도록 두 칸으로 나누어 식수조와 저수조를 만들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현장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고려 원종12년(서기1271) 항몽 삼별초군이 항바드리성에 웅거할 때 함게 따라온 한 고승이 아름다운 산과 맑은 샘을 발견하고 김통정 장군에게 보고하자 그가 이곳에 암자를 짓도록 지시하고 암자 이름을 ‘태암감당’이라 붙였다.

그의 어머니의 처가 이곳 암자에 기거하면서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과의 전투에 무운을 기도하는 기도를 드렸다. 정성어린 기도는 허공 속에 메아리가 되었는지 적의 침략으로 철옹성 같던 항파두리성은 함락되고 김통정 장군은 전사했다.

그의 가족도 이 암자를 떠나 멀지 않은 곳에 토굴을 파고 들어가면서 부하에게 토굴 속에 불빛이 보이지 않으면 입구를 막고 무덤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토굴 속에 불빛이 사라지고 인기척이 없자 토굴 입구를 막고 무덤을 만드니 이를 종신당이라 부른다.

지금은 태암감당이나 종신당의 흔적은 희미해지고 우뚝 선 절산(108계단)과 고고한 자태로 700년을 지켜온 팽나무와 무환자나무는 옛날의 역사를 간직하려는 듯 말이 없고 유유히 흐르는 샘물만이 무슨 사연을 말해 주려는 듯 지금도 변함 없이 흐른다.〉

또한 최근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태암천이라는 명칭과 함께 표토 증간층에 저류되는 물이 용출되는 것으로 우기와 건기의 차이는 있지만 200고지 이상 산간 마을 중 시간당 13,000리터의 생수가 솟아나는 곳은 제주도 일원을 통틀어 유수암천뿐이라고 하였으며, 삼별초와 함께 들어온 선승(禪僧)이 태암감당(泰岩龕堂) 보전(寶殿)을 창건할 때 이 샘물을 처음으로 손질한 주체로 비정하였다.

현재 유수암천에는 두 칸으로 나눠 식수조와 저수조를 만들고 수로를 통해 다시 20여m 떨어진 곳에 세 칸으로 구분된 빨래터를 만들어 놓았다. 또한 이곳에서 흐른 물로는 면적 250㎡ 되는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예전에 인근 장전리·소길리 주민들도 이 물을 식수용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깨끗함과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유수암천에는 과학적으로 물을 사용했던 선인들의 지혜가 그대로 담겨 있다.

유수암천 위에 지붕처럼 덮은 큰 돌에는 流水岩泉이라 새겨져 있고 비석에는 流水壧泉銘이라 새겼다.

처음에는 바위 틈에서 물이 나온다고 岩을 쓰고, 지금은 큰 돌을 덮어 굴처럼 보이므로 壧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성 1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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