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 유수암리 태암사(태산사)(멸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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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 유수암리 태암사(태산사)(멸실)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12.26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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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높은 언덕으로 큰 장수가 병영을 이루어 앉아 있는 형국

유수암리 태암사(태산사)(멸실) 터

 

위치 ;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1918번지, 1931번지 일대. 속칭 절동산 지경
시대 : 고려시대
유형 ; 불교유적(절터)

유수암리_태산석표석

 

유수암리_태산암표석 전경

 


애월읍 유수암리 속칭 절동산이라고 불리는 곳은 태암사(泰岩寺) 또는 태산사(泰山寺)터라고 한다. 유수암리 마을지에서는 태산사를 부정하고 태암사 터라고 했다.

이 절동산은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동산의 하단부에는 '유수암천'이라는 샘이 있다.

태산사는 이 유수암천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안내판 등에 의하면 유수암천의 남쪽에 현재 마을운동장이 있는데 이곳이 태암사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은 꽤 높은 언덕으로 큰 장수가 병영을 이루어 앉아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1271년 삼별초군을 따라온 선승(禪僧)이 유수암천을 발견하고 이 샘을 근거로 절동산 근처에 암자를 지어 불사를 시작했는데 이를 태암감당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음은 유수암리지의 태암사 관련 기록이다.


〈이 때에 고승은 절산 밑에 샘이 있음을 보아 조금 서쪽에 불전을 지을 절터로 정하고 우선 현재 1931번지로 추정되는 곳에 감당(龕堂)을 지어 가지고 온 불상을 진설하고 태암감당(泰岩龕堂)이라 하였으며, 이어 불전(佛殿)을 창건하고 뒤따라 선실(禪室)과 객실(客室)도 지어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절 이름을 태암사(泰岩寺)로 정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토성 안의 번영과 함께 태암사도 활발하게 움직여 토성 안의 권속들은 자주 여기에 모여 불공을 드렸으며, 이후 토성이 함락되고 삼별초군이 토평되자 숨어 있던 낙오병이나 잡부들은 정황을 살펴가며 이곳으로 모여들어 불사는 한때 성시를 이루었고 이들의 자손들에 의하여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위 토지가 척박하고 교통이 불편하며 지대가 높아 추위가 심하여 사람들은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하고 구심점이 될 스님도 비게 되므로 절은 유명무실해지다가 조선 초기인 1400년대 말 자연훼철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태암감당비가 1700년대 초까지 존재했다는 기록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초석이 있었는가 하면 석체(石體)와 석폐(石陛)가 있었으며 그 때에 절 뒤에 심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염주알로 쓰는 도욕낭(무환자나무)이 팽나무 군락과 함께 그 때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다.


이전에 발행된 여러 문헌에는 泰山寺 또는 千古寺 등으로 표기된 것을 보았다. 이는 근거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이번 流水岩里誌 편찬 과정에서 위원들은 앞으로 泰岩寺라 정리하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유는 작고한 어르신들의 생전의 증언에 절터에는 泰岩龕堂이라는 표석이 있었는데 그 주변 울타리 잣벽 속에 묻혔다는 내용과 泰岩○○라고 조각되어 파손된 비석이 남아 있는 것 등을 살펴볼 때 泰岩寺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최근에 泰岩合龍堂이라는 표기도 있었는데 이는 龕자를 두 글자로 본 오류임이 분명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泰岩○○ 비석이 위 사진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2글자 泰岩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山과 石 사이가 너무 떨어져 있고 山의 아래 획이 너무 길어 아무리 봐도 泰山石 3글자로 보인다. 이 표석은 유수암천 남쪽에 있는데 그 옆에는 둥글게 조각된 돌 2개가 있다.


이것들이 태산사의 증거라고 하는데 하늘타리의 글에 의하면 이 표석은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원래 항몽유적지 관리실 뒤 밭에서 뒹구는 것을 밭 임자가 1994년 발견해 그냥 놓아 두었다가 1998년에 밭 임자가 바뀌면서 밭주인이 집으로 가져갔지만 쓸모가 없으므로 항몽유적지 관리실에 연락하여 가져가도록 했고 당국에서는 이 표석에 대한 고증 결과 큰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방치하고 있었는데 유수암 마을에서 가져가기를 원하므로 주었다는 것이다.


반면, 산드륵의 참 좋은 세상이라는 블로그에서는 태산석 표석과 2개의 석고(石鼓?)가 원래 유수암천 남쪽에 있던 것이며 제주에서 이런 유물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분명한 이유도 없이 1994년 항몽유적지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태산사 터에서 사라진 비석을 찾아 헤매다 항몽유적지에서 방치된 것을 찾았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유수암리지와 같은 맥락이다.


후일 척화라는 스님이 사찰을 중건하여 천고사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은 절터만 남은 태암사가 그때 처음 지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천고사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태산석 표석은 아직 정체가 분명하지 않으나 이 표석이 있는 곳이 태암사의 입구였을지 모른다. 오늘날에는 이 표석이 있는 곳에서 절동산(현 유수암리 운동장)까지 올라가는 72단의 나무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현재 계단이 조성된 동서 양쪽 밭(1922번지, 1922-1번지)에서는 상한년대가 1100년 정도 되는 백상감청자편, 15세기 정도의 것으로 보이는 분청사기조화문발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태암사(태산사) 사찰에 관한 문헌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절터의 주변에 아름드리 무환자나무가 있다.

이는 옛 태암사(태산사)의 스님들이 염주를 만들 때 사용하려고 심은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볼 때 태암사의 창건연대는 상당히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작성 150505, 보완 1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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