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치적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외도2동 김정목사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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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치적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외도2동 김정목사선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1.0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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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북포구 성창을 축성하면서 돌을 져 나르다가 화북포에서 쓰러져 객사에서 사망

외도2동 김정목사선정비

 

위치 ; 외도2동 240번지의 남쪽. 월대 소나무 주변
시대 ; 조선
유형 ; 碣(선정비)
비문 ; 使相金公亻政淸德恤民萬世不忘□

외도2동_김정선정비 정면

 

김정(金亻政, 1670~1737) 목사는 영조11년(1735) 1월 제주목사겸호남방어사로 제수되어 그 해 4월에 도임하여 2년 6개월간의 임기를 마칠 때까지 제주도민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김정은 제주목사로 재임 중 글보다는 치적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이다.

노봉문집이라는 저서가 있으나 김정이 제주도에서 쓴 글 중에서도 시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산문도 김정이 목민관의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쓴 상량문이나 제문과 같은 종류의 글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화북포가 얕고 비좁아 배 출입이 불편했기 때문에 출입하는 배의 편의를 위하여 영조11년 김정 목사는 직접 부역을 독려해 길이 약 63m, 폭 6m, 높이 약 4m의 방죽을 쌓기도 했다. 그 위에 영송정을 지어 공사 선박의 출입 검문소로 삼았다.

그러나 김정은 화북포구 성창을 축성하면서 스스로 돌을 져 나르다가 화북포에서 쓰러져 끝내는 객사에서 사망하였다.

화북포 인근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는 "자기 고향에 가서 곡식을 가져와서 대정과 정의에서까지 장정을 불러다가 역사를 했다"든지 "공사를 감독하러 갈 때에는 ᄀᆞ으니ᄆᆞ르에서부터 돌 한 덩어리씩을 꼭 날라갔기 때문에 일꾼들이 불평없이 힘든 일을 했다"는 말이 있다.

김정이 운명하였을 때 “제주 사람들은 슬퍼하며 호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김석익(金錫翼)의 『탐라기년(耽羅紀年)』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방파제 인접한 곳에 관민이 애도의 뜻을 담은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그가 화북포구 공사를 시작하면서 하늘에 아뢴 고유문(告由文)의 일부를 보자.


"…위태로운 데서 편안해진 것은 옛날의 탁라였고, 험악한 데서부터 편안해진 것은 탐진(耽津)에 댄 때부터이니, 탁라가 탐라가 되었나이다. 이 때부터 후세에까지 벼슬아치가 왕래하여 국호를 없애고 고을을 두어 공납이 그치지 않았나이다.

모든 나라의 제사에 이 섬 물건이 모두 나가나 왕명이 드날리는 화북포를 돌아보면 큰 바다의 끝이 되고 이 섬의 목구멍과 같사옵니다. … 오래도록 지탱하여 배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옵소서."

고유문에는 임금으로부터 임명받은 관리로서의 사고방식이 가득차 있긴 하지만 공사를 시작하면서 품었던 그의 엄숙한 각오와 염원이 잘 드러나 있다.(2004년 제주MBC「오름바당」33쪽)(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 김상오)

김정 목사가 외도동에 대해서 어떤 선정을 베풀었는지는 따로 나타난 치적이 없다. 1998년 발행된 ‘제주시 문화유적지도’에는 온전한 것으로 나와 있던 이 비석은 중간에서 두 동강이 난 것을 접합시켜 놓은 상태이다. 좌대는 귀부로 되어 있다.
《작성 15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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