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병선(兵船)도 감출 수 있는 대포.. 하도리 한개창(별방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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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병선(兵船)도 감출 수 있는 대포.. 하도리 한개창(별방포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1.19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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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개창의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개창은 포구를 뜻한다.

하도리 한개창(별방포구)

 

위치 ; 하도리 3354번지의 북쪽. 별방진 북쪽 바닷가
시대 ; 미상(조선시대 추정)
유형 ; 어로시설(포구)

하도리_한개창포구(서재철)도대불
하도리_한개창포구

 

하도리는 약 600년 전 제주고씨, 제주부씨, 양천허씨 등이 이 주변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고 구전되고, 성종12년(1481)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토끼섬 일대를 도의여개, 마을 이름은 도의여ᄆᆞ을로 표기한 것을 보면 포구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도리에는 포구가 5개 있다. 면수동의 서슬포, 굴동의 원개, 東洞의 東洞포구, 신동의 한개창, 빌렛개성창이다. 옛날에는 가장 동쪽 창흥동과 지미봉 사이의 용목잇개(龍項浦)도 포구로 사용했었다.

그 중에 한개창의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개창은 포구를 뜻한다. 한개창은 서쪽 개대가리와 동쪽 조랑개코지로 말미암아 후미진 곳에 있다.

포구는 좌측으로 한개창코지와 우측 좌우로 놓인 암반을 의지 삼아 그 안에 자리잡았다. 또 한개창코지 앞 ᄌᆞᆨ은소여는 톳이 자라는 여로 그 높이가 조간대 중층에 위치하여 조금만 썰물이 되어도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북풍막이 되기에 족하다.

단지 북동풍이 불었을 때 바로 포구 입구로 파도가 밀려들기 때문에 포구 동쪽에 쌓은 방파제가 피해보는 수가 있다.

김상헌(金尙憲)은 『남사록(南槎錄)』에서 한개창을 두고 대포(大浦)라고 하면서 병선(兵船)도 감출 수 있다고 하였다. 대포(大浦)는 ‘한개’의 한자 차용의 표기다. 별방진에 붙어 있기 때문에 별방포라고도 한다. 제주삼현도에도 별방포(別防浦)라고 나온다.

한개창은 이름처럼 그리 넓은 편은 아니나, 바람을 막아주는 "코지"와 수중암초인 "여", 선식충을 막아주는 담수 그리고 수심 등 여러 가지 입지 조건이 뛰어난 편이다. 포구 안에서 솟던 기머리물(알물+웃물)은 방파제 축조 때 매립되었고, 겡에집알물은 물양장공사로 매립되었다.

알찍물은 포구안 동측에 있었으나 매립되고 없다. 그 외에도 가마귓물, 들렁물이 있었으나 현재 물이 솟는 것을 볼 수는 없다. 또 성안통물이 포구로 흘러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바닷물이 조수에 따라 들어가고 나오는 정도이다.

별방포는 안에 둘, 밖에 하나의 칸살을 거느리고 있다. 안에 있는 서쪽 칸살을 겡이집알, 동쪽의 칸살을 한개라고 부르며 바깥은 개창뒤라고 부른다.

‘겡애집알’ 은 사리 썰물 때 바닥이 드러났으나, 한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배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개창뒤는 수심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언제든지 배를 댈 수 있는 곳이며, 그 바닥은 모래로 깔려 있어 더욱 안전하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해녀항쟁 때에는 우도 해녀 136명이 이 포구로 들어왔다고 한다.
과거에는 대형 화물선들도 정박했었으나 오늘날에는 작은 어선들이 정박한다.

1999년에는 해양수산청에서 등대를 설치하였고, 2000, 2001, 2003년에는 방파제를 정비하였다.
위 사진은 1969년에 청년회가 별방진 치성 위에 세운 철제도대불(서재철 촬영)이다. 지금은 치성을 복원하면서 없어졌다.《작성 150708, 보완 17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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