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옹기 생산 절정때 축조된 가마..고산2리 신물동산노랑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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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옹기 생산 절정때 축조된 가마..고산2리 신물동산노랑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1.24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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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에서 나오는 항아리들을 각 마을이나 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고산2리 신물동산노랑굴

 

위치 ; 한경면 고산리 1361-1번지. 속칭 신물동산이라 부르는 동산의 능선을 타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위치해 있다. 가마 남쪽에는 1980년대에 벽돌을 생산하던 제주 벽돌 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벽돌공장 굴뚝이 있는 곳에서 북서쪽이다.
유형 ; 생산기술유적(옹기가마)
시대 ; 대한민국(1950년대)

고산2리_신물동산노랑굴 불벽
고산2리_신물동산노랑굴

 


1950년대에는 신평리에서 작업하던 오쟁이의 허벅, 조쟁이의 항아리 등으로 불리던 유명한 옹기대장들이 양질의 점토가 풍부하고 연료로 쓸 소나무가 많았던 고산 지역으로 옮겨와 가마를 열면서 옹기 생산이 성황을 이루던 시기였다.

토질이 진흙밭이라 농사가 잘 되지 않았던 이 지역 주민들도 가마 일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해 주었고, 가마에서 나오는 항아리들을 각 마을이나 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고산리 노랑굴도 옹기 생산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 축조된 가마로서, 항아리, 허벅, 병 등의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물레대장이었던 고씨가 개인적으로 축조하였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사유지로 소유하고 있다.

자연 경사를 이용하여 북쪽은 낮고 남쪽은 높은 상태로 가마가 길게 축조되어 있다. 굴의 입구는 넝쿨나무들이 우거져 가까이 진입하기가 꽤 어려우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구의 현무암 세 개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부장쟁이 터도 남아 있다. 불벽은 파손되었으나 그 자리는 알 수 있다.

굴문에서 3m 정도부터 뒤로 천정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북제주군 문화유적에는 하단부에 4개의 굴뚝구멍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고 했으나 굴조롬이 무너져서 확인이 안 된다. 남아 있는 가마 외부의 길이는 약 14m이다.

현무암 두 개를 세우고 하나를 얹어 만든 아궁이는 넓이가 57㎝, 높이가 40㎝로서 약간 좁고 낮으며, 부장도 아궁이 쪽은 좁고 소성실에 가까워질수록 넓어지는 유선형을 이루고 있다.

부장의 중앙 바닥은 약간 안이 파인 듯하며, 소성실로 이어지는 바닥 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부장은 높이가 150㎝이다. 불벽은 흔적만 남아 있고 소성실의 뒷부분도 유실되었는데, 남아 있는 소성실의 높이는 160㎝, 길이는 800㎝이다.

가마 출입구는 앞에서 볼 때 왼쪽(동쪽)에 있어서 보통 오른쪽에 만드는 다른 곳의 가마와는 차이를 보이며 이는 작업장에서 드나들기 쉽게 만들어진 듯하다.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는 소성실 내벽은 진흙이 잘 발라져 있으나 파손된 부위를 살펴보면 현무암과 잡석 사이의 흙 속에 모래가 섞여 있다.

천장과 가마 벽이 이어지는 부분은 급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약 50㎝ 간격으로 잿불구멍이 나 있으나 몇 개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바닥은 고르지 못하고 경사도는 약 18도이다.

부장쟁이는 유실되었으나 그 흔적이 남아 있고 화구의 현무암도 그대로 남아 있으나 뒷부분은 많이 파손된 상태이다. 하지만 화구 및 가마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북제주군의 문화유적,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 김나영)
《작성 1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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