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국가에서 운영하는 여관.. 와산리 동원(멸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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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국가에서 운영하는 여관.. 와산리 동원(멸실)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1.26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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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여러 곳에 ‘원’이란 글자가 붙은 지명만 남게 되었다.

와산리 동원(멸실)터

 

위치 ; 조천읍 와산리 1303-6번지 일대.동부산업도로에서 산굼부리로 가는 네갈래길 동남쪽 음식점 길섶나그네 자리
시대 ; 조선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멸실)
유형 ; 옛 건물 터

대흘1리_동원터(송장환).
대흘1리_동원주둔소터

 

원(院)은 고려․조선시대에 출장하는 관원을 위해 각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문 곳에 두었던 국영 숙식시설이다.

고려 때부터 두었는데 공양왕3년(1391)에는 그 유지를 위해 대로(大路)․중로․소로의 원으로 구분해서 원위전(院位田)을 지급하였고, 사찰에서 사회사업의 하나로 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조선초에 들러서는 폐쇄되거나 관리가 소홀하여 공용여행자에게 불편이 있었기 때문에 세종27년(1445)에는 이를 정비․보완하는 한편 원 주변의 유능한 주민을 골라 원주(院主)로 삼아 그 관리를 맡기고, 고려 때와 같이 대로․중로․소로 등 그 이용빈도를 감안해서 원주전(院主田)을 주었는데 이는 후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


조선왕조는 개창과 더불어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고려 말 이래의 각종 법령 및 판례법과 관습법을 수집하여 1397년(태조 6)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제정, 시행하였다. 그 전에 왕조 수립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한 정도전(鄭道傳)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바친 일이 있었지만 개인의 견해에 그친 것이었다.

《경제육전》은 바로 수정되기 시작하여 태종 때에 《속육전(續六典)》이 만들어지고, 세종 때에도 법전의 보완작업이 계속되지만 미비하거나 현실과 모순된 것들이 많았다. 국가체제가 더욱 정비되어 감에 따라 조직적이고 통일된 법전을 만들 필요가 커졌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후대에 길이 전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최항(崔恒)․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강희맹(姜希孟)․임원준(任元濬)․홍응(洪應)․성임(成任)․서거정(徐居正) 등에게 명하여 편찬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1460년(세조 6) 먼저 〈호전(戶典)〉이 완성되고, 1466년에는 편찬이 일단락되었으나 보완을 계속하느라 전체적인 시행은 미루어졌다.

예종 때에 2차 작업이 끝났으나 예종의 죽음으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성종대에 들어와서 수정이 계속되어 1471년(성종 2) 시행하기로 한 3차, 1474년 시행하기로 한 4차 《경국대전》이 만들어졌다.

1481년에는 다시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하여 5차 《경국대전》을 완성하였고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하여, 1485년부터 시행하였다.(두산세계대백과사전)

원은 사용자의 제한으로 점차 퇴락하여 공용여행자의 접대는 각 주현의 객사인 관(館)․역(驛) 그리고 민간업자들도 맡았다.

또한 임진왜란 후에는 참(站)마다 참점(站店)이 설치되기도 하여 이것이 후에 주점․주막으로 부른 거릿집으로 발전함에 따라 원은 점차 모습을 감추어 전국 여러 곳에 ‘원’이란 글자가 붙은 지명만 남게 되었다.

보제원․홍제원․이태원(이상 서울)․조치원(충남)․장호원(경기도)․동제원(東濟院, 제주시 화북동) 등이 그 예이다.(동아대백과사전)

원은 고려 시대에도 있었으나, 주로 조선 세조 때부터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을 위하여 역과 역 사이의 중요한 곳에 설치한 국가에서 운영하는 여관으로서 처음에는 관원만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일반 나그네도 이용하였다.

각 원에 원주를 두고 원주전도 따로 나누어 주었으며, 스님을 원주로 삼은 곳이 많았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전국에 1310개소 한성부 4, 개성부 5, 경기도 117, 충청도 212, 경상도 468, 전라도 245, 황해도 79, 강원도 63, 함경도 37, 평안도 79 (동아대백과사전)에 원이 있었다고 하며, 제주에는 동원, 서원, 의귀원, 하원, 동제원 등 여러 곳에 있었다.

조천읍 대흘1리 마을에서 남쪽으로 3km 정도 올라가면 번영로와 만나는 곳에 동원(東院)옛터가 있다.

동원은 번영로 주변 꾀꼬리오름 북쪽, 지금의 음식점 길섶나그네 자리에 있었다. 조선시대 당시 제주목에서 정의현 가는 길에 쉬어가던 곳이 동원이다.

그때는 동원에 3호 정도가 거주하면서,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살았던 주막번데기의 작은 마을이었다. 특히 목사, 판관 등 고관이 쉬어갈 때는 인근 주민들을 동원해 편의를 도모하곤 했다.

동원과 서원은 1910년대에 제작된 탐라약도에 도로표시와 함께 선명하게 ‘院’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제주목지도〉에는 ‘제중원(濟衆院)이라고 표기된 동원은 일명 보문원(普門院)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 원이 설치된 것은 제주목과 정의현의 중간쯤 되는 위치이며 가까운 곳에 물이 있기 때문이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5.1Km, 정의현청이 있었던 성읍에서 16.8Km이다.

물은 교래리 쪽으로 400여m 되는 곳에 원물이라는 샘이 있어 마르지 않고 와산․대흘 주민들이 이곳 물을 길어다 먹었을 정도로 물이 좋았다.(한라일보 2003년 8월 13일)

4․3사건 이전에는 원을 중심으로 조그만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옛 지적도에 7필지가 ‘垈’로 표기된 흔적이 있다.

1948년 말에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고 불태워지면서 마을이 없어진 후 지금까지 재건되지 않은 것이다. 인근에는 조선말기 제주에 근무했던 관리들을 기리는 송덕비 4기가 남아 있다.
《작성 1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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