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탐라의 만리장성..표선리 환해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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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탐라의 만리장성..표선리 환해장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4.01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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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즉 목사는 그 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크게 수축하였다

표선리 환해장성

위치 : 표선면 표선리 8번지의 동쪽 바닷가 올레길
유형 : 방어유적
시대 : 고려~조선

 

표선리_환해장성일까해비치앞

 

환해장성은 고려 원종11년(1270) 고려 관군이 삼별초의 입도를 저지하기 위해 시작되어 삼별초가 몽골과 고려 연합군을 막기 위해 계속 쌓았으며 조선시대에도 계속 쌓고 보수해 온 해안 방어시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 장성은 바닷가를 따라 둘러쌓았는데 둘레가 300여 리이다. 고려 원종 때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에 웅거하니 왕이 시랑 고여림에게 군사 1,000명을 주어 탐라를 수비하도록 하자 제주에 들어온 고여림과 군사들은 삼별초 군사들을 대비하기 위한 장성(長城)을 쌓았다.

300리는 약 120~150㎞이다. 제주도 둘레가 253㎞이므로 포구, 백사장, 절벽 등을 뺀 섬 둘레의 절반 정도에 성을 쌓은 것이다.

바닷가 성 쌓기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바닷가를 따라가며 성을 쌓고 보수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삼별초 시기를 지나면 환해장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인데 그 효과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왜구가 제주도에 들어오는 목적은 재물을 약탈하기 위함이므로 재물을 약탈하려면 당연히 재물이 있는 곳 즉 마을이 있는 포구로 들어와야 한다. 포구가 아닌 곳으로는 배를 붙이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약탈한 물건을 이동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려 그들로서는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1601년 어사로 제주도를 방문했던 김상헌은 남사록에서왜적이 들어와 도적질하였음에도 이 섬에서 한 번도 뜻을 얻지 못했던 것은 섬을 돌아가며 석벽이 바다 속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하늘이 만든 험지여서 왜적들의 배가 정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라고 하여 제주도의 해안에 배를 붙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기록하였고 실제로도 왜구들은 별도포, 천미포 등 포구시설이 있는 곳으로 침입했었다. 왜구가 들어오지도 않을 곳에 성을 쌓으면서 백성을 고생시킨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 김상헌은 『南槎錄(남사록)』에서 환해장성에 대하여

바닷가 일대에는 돌로 성을 쌓았는데 잇따라 이어지며 끊어지지 아니한다. 섬을 돌아가며 다 그러하다. 이것은 탐라 때 쌓은 만리장성이라 한다.

라고 하여 탐라의 만리장성이라 기록하였다. 탐라시대부터 쌓은 것이라고 잘못 알기는 하였지만 환해장성이 오래되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고지도첩(古地圖帖)』 중 「탐라전도」에는 애월개의 동쪽에 옛 장성이 보이고 있다.

1845년 권즉 목사 때에 마지막 보수작업이 있었다. 조선 헌종11년(1845) 6월에 영국 선박 1척(사마랑호)이 우도 앞바다에 1개월이나 정박하여 삼읍의 연안을 측량하고 돌을 모아 회를 칠하여 방위를 표시하므로 목사 권즉이 군사를 동원하여 변에 대비하였다.

이 때 대정현 사계리 사람 유명록이
"저 양이와 힘으로써 정면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싸우지 않고 파괴할 수는 있습니다. 소인에게 화약을 주시면 배에 몰래 싣고 접근하여 화약에 불을 놓아 양이와 함께 죽겠습니다."

하니 권직 목사가 그 충의심에 감탄하여 우대하고 화약을 준비하고 날을 정하여 시행하려던 중 영국 배는 홀연히 돛을 달아 동북쪽으로 떠나가 버렸다.

권즉 목사는 그 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크게 수축하였다 한다. 오늘날 해안에 남아 있는 자취는 바로 이 때의 것이다.

이와 같이 바닷가에 성(환해장성) 쌓기는 고려 때 삼별초와 관련하여 축성이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도 계속하여 보수되었다. 무너지면 쌓고, 또다시 무너지면 쌓아올리는 일이 대를 이었다. 장장 600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환해장성은 군사적인 목적 외에도 해풍으로 인한 농작물의 염분 피해를 줄이는 역할도 했다.

환해장성은 대부분 제주 바닷가에 흔한 현무암으로 허튼층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현지의 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바닷가에서 파도에 닳아 둥글둥글한 돌을 이용한 곳이 많다.

남아 있는 성의 구조를 보면 성의 아래쪽 너비는 보통 1.5m 정도 되는데 양쪽에는 비교적 큰 돌을 쌓으면서 그 속에 비교적 작은 잡석을 채워가는 겹담 형식으로 쌓았다.

완전히 수직으로 쌓지는 않고 위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져 위 너비는 1m 정도가 된다. 폭은 1~1.5m가 대부분인데 애월리에 남아 있는 환해장성은 폭이 5m 정도 되는 곳도 있다.

성의 안쪽에는 군인이 순찰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회곽도라 한다. 회곽도의 폭은 1m 정도, 높이는 1~1.2m 정도이며, 회곽도에 서면 성 바깥쪽을 바라볼 수 있다.

표선리 8번지의 동쪽(해비치리조트의 동쪽)에 남아 있는 성담은 문화재 당국에서 만든 자료에는 없지만 환해장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을 옛어른들이 환해장성이었다는 말을 했고, 남아 있는 돌들을 볼 때 온평리나 신산리의 환해장성이 무너진 곳과 비슷하다.

현대에 전투경찰이 해안을 감시하기 위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사각형의 초소를 만들고 무너진 돌을 이용하여 외담을 쌓았기 때문에 원형이 대부분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소와 외담으로 남아 있는 구간은 약 100m 정도이다. 회곽도였던 곳은 전투경찰의 교통로로 이용되었었고 지금은 올레길이 되어 있다.
《작성 1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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