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인고(忍苦), 단련(鍛鍊), 홍익인간(弘益人間)..세화리 세화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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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인고(忍苦), 단련(鍛鍊), 홍익인간(弘益人間)..세화리 세화초등학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4.0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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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깨끗하게 사는 우리들, 세화 세화 우리 세화 해맞이 학교.'

세화리 세화초등학교

 

위치 : 구좌읍 세화리 1391-1번지(구좌로 65)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교육기관(초등학교)

세화리_세화초등학교
세화리_세화초등학교평면도1948년(제주큰동산)

 


주요 연혁
1938. 05. 20. 세화공립심상소학교설립인가(4학년4학급)
1938. 06. 05. 개교
1941. 04. 01. 세화공립국민학교로 개칭(6년제 6학급)
1948. 09. 01. 송당분교 병설수용(1개학급)
1948. 12. 03. 4.3사건으로 7개교실 및 부속건물 소실
1950. 06. 01. 세화국민학교로 개칭
1951. 04. 01. 송당분교 분리(2학급)
1981. 02. 05. 병설유치원 설립인가
1981. 03. 05. 병설유치원 개원(1학급 40명)
1988. 06. 05. 개교 50주년 기념 50년지 발간
1992. 04. 16. 급식소 및 도서실 준공
1996. 03. 01. 세화초등학교로 개명
2014. 02. 14. 제72회 졸업 (총 졸업생수 4,208명)

일본제국주의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 2세 국민의 식민지 교육을 강화하기 위하여 소위 조선교육령을 발표하고 1938년에 1면 2개의 공립 보통학교 설치를 허가하는 시책을 펴게 되었다.

이때에 구좌 관내에는 근대 교육 물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중 1923년도에 개설된 공립 김녕보통학교가 서부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동부지역에는 사립 하도보통학교, 중앙지역에는 구좌중앙보통학교가 있었다.

동부지역인 세화리를 중심으로 초등교육기관인 보통학교 설립문제가 주민들의 일치된 열망이었다.

당시 구좌면장 전인홍과 세화리 구장(현재 이장) 김시화를 중심으로 세화리민들이 모두 학교 설립 추진회를 발의하고, 학교 설립에 소요되는 학교 부지를 매입 기부하는 시설비 부담을 자원하게 되었다. 현재 세화리 1391번지 일대 농지를 학교 설립 위치로 선정하였다.

1938년 5월 20일 세화공립심상소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지만 개교에 앞서서 학교 건물이 건축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세화리 공회당에서 가교사를 사용하여 1938년 6월 5일 세화공립심상소학교가 개교하게 되었다.

교실은 1939년 10월에 정규 교실로 목조 스레트 2개 교실이 증축되었고, 1940년에는 1~2학년 전교생 160명이 최초로 정규 교실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초대 개교 추진 교원 겸 담임으로 김녕보통학교에 재직하던 송문평이 부임하였다. 입학 신입생 모집은 5월에 시행되었으며, 동부 구좌지역인 세화리, 상도리, 종달리, 평대리, 한동리에서 입학 지원자가 많이 몰려왔다.

입학 정원이 1학급 80명이기 때문에, 입학연령 9~12세까지 선발하였다. 그 중에 여학생은 10명이 포함되었다.

1940년 4월 1일 초대 교장으로 사또오미쓰오(佐藏光男)가 취임하였고 다음해 4월 1일에 세화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어 6년제 6학급이 인가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통해 전시 비상교육을 강행하였지만 지역주민과 학부모들은 온갖 고통을 참아가면서 학교 교실 건축비를 부담하고 6학년 6교실이 완성될 수 있도록 증축하였다.

학교장 사택(관사 1동)과 학교 우물(지하수 굴착) 1개소를 마련하여 학교 시설확충에 열성을 다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1944년부터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심상소학교 명칭이 세화공립국민학교로 바뀌었다.

1944년 4월에는 제2대 교장으로 일본인 오꾸까와 슈케이(奧川主計)가 제주 보통학교(현재 북초등학교) 교감직에서 승진되어 부임하였다.

1944년 하도보통학교가 공립학교로 개편되어 하도교 교장을 겸직하다가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될 때까지 재직하였다.

당시 초등학교 취학 적령기 아동들의 취학률은 50% 선을 밑돌았으며, 시설과 마을 공회당 등을 임시 교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식교육기관 이외에 학령을 초과한 사람들에 대한 교육과 문맹퇴치적 성격이 강한 비정규 교육 기관인 공민학교가 초등 교육의 일부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공민학교는 1946년 5월 미군정하에서 ‘공민학교 설치 요령’이 제정되면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그 제정배경은 광복당시 12세 이상 남한 인구의 78%에 달했던 문맹자를 교육하기 위한 성인 교육 또는 문맹 퇴치 운동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공민학교는 13세 이상의 초등학교 학령을 초과한 청소년 및 성인을 단기간 수용하여 공민으로서 필요한 기초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미군정은 1947년 5월 1일 세화국민학교에 세화공민학교를 설립하였다.

공민학교는 성인반을 설치하여 성인에게 국문을 해득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성인반의 교과는 국어, 사회생활, 산수, 과학을 내용으로 하였다.

수업 일수는 70일 이내에 200시간 이상을 받고, 농번기를 피하여 하계와 동계의 농한기를 이용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평균적으로 매일 3시간 정도의 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공민학교는 초등학교 의무 교육의 보편화 및 문맹률 감소에 따른 학생수 감소로 1950년대 중반부터 쇠퇴하였다.

1948년 9월 1일에는 송당분교(2개 학급)를 두었다. 이 시기 세화초등학교 학생은 6개 학년에 각1학급씩이었으며 400명 정도가 재학하였다.

제주 4·3 사건 중인 1948년 12월 3일 밤 무장대가 습격하여 마을을 점령하다시피 했는데 40가호 정도의 집과 세화초등학교, 향사를 불태운 후 새벽 2시께 물러갔다. 이 날 마을에서는 노약자와 어린이를 포함하여 48명 정도가 희생되었다.

당시 세화지서에는 본서 직원 15명과 응원경찰인 충남부대 20명 등 35명 가량의 경찰이 있었으나, 무장대가 모두 물러갈 때까지 지서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시 세화초등학교 교장은 김여찬이었으며 교사로는 강재민, 김석진, 문봉칠, 이연복, 이응우, 장범규, 장원옥(女), 홍군언 등이 근무하였다. 이연복은 서청 출신이었으며 횡포가 심했다고 한다.

이 때 방화로 초등학교 목조기와 7개 교실 및 부속건물(교장관사, 숙직실, 창고)이 소실되었다. 이 날 숙직교사였던 문봉칠 교사는 화재 속에서도 학적부를 구해 내는 책임감을 보였지만 1~5회까지의 졸업대장이 모두 소실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렇지만 집에 있던 모친, 아내, 자녀 등은 무장대에 희생되었으며 부친도 큰 부상을 입었다. 문봉칠 교사는 입법의원을 지낸 문도배가 좌익이었고 사촌이었기 때문에 토벌대로부터도 의심을 받아 예비검속 때 몇 차례 잡혀가서 문초를 받기도 했다. 증언에 의하면 이 습격에서 초등학교 학생으로는 4학년 지경우(11살) 학생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건물이 전소되었지만 학교운영과 수업은 멈추지 않고 천막교실과 학교 주변 개인주택의 마루, 마당 등을 이용하여 수업이 진행되었다.

운동장 안에 초가로 가교사를 지어 흙바닥에 짚을 깔고 책상도 없이 수업을 하기도 하였으며, 6회 졸업생은 교실이 없어 운동장 서쪽에 있는 포플러 나무를 배경으로 졸업기념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역대 면장인 부대현, 고학수, 김창근, 김남석과 마을리장(특히, 세화리와 상도리)과 학구민들이 학교 건설에 앞장서고, 주민들의 노력과 봉사를 통해 복구되었다. 1950년 3월에는 교실 일부가 복구되었고, 1950년 6월 1일 세화국민학교로 명칭을 바꾸어 다시 문을 열었다. 이어서 한국전쟁 발발로 피난민 아동들을 수용하는 특별학급이 운영되었다.

1950년도 이래 법률 제86호로 공포된 교육법 제96조에 의해 국민의무 교육이 시행되면서, 취학률이 급격하게 증대되어 종달국민학교와 평대국민학교가 생김으로써 학생들이 나누어 나갔다. 1951년 4월 1일에는 송당국민학교를 분리하였다.

1964년 도 단위 교육자치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제2대 부대현교육감(세화리 출신)이 세화국민학교의 시설 현대화를 추진하여 교사를 현대식 콘크리트 2층 12개 교실로 신개축하였다.

따라서 1970학년도부터 12학급을 수용하는 동부지역의 대표적인 중심학교 크게 발전하였다. 1981년 3월 5일 병설 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92년 4월 16일 도서실 및 급식실을 준공하였다.

1996년 3월 1일 세화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1970년대에 일주도로 확장에 따라 운동장 일부가 줄어들었으며, 2016년 현재 교사 대지는 3,412㎡, 체육장은 8,360㎡이다.

교훈은 1938년~1945년에는 교육칙어(敎育勅語)를 근거로 〈인고(忍苦), 단련(鍛鍊)〉, 광복 당시에는 교육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내세웠었고, 1996년부터는 건강·자주·지혜(體·行·知)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교가와 상징물]


(1) 교가[작사 윤석중/작곡 이동수]


바닷물에 낯을 씻고 떠오르는 해/한라산이 밝아온다 해맞이 가자
환하게 깨끗하게 사는 우리들/세화 세화 우리 세화 해맞이 학교.
(2) 교목 : 굳센 의지, 협동, 자주 정신을 상징하는 팽나무이다.
(3) 교화 : 화합, 고상함, 정직함을 상징하는 철쭉이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주큰동산의 글,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작성 1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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