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학생들의 독립의식 고취..한림리 한림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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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학생들의 독립의식 고취..한림리 한림초등학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4.05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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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고 아름답다 한림 경승지 우리는 이 고장의 꽃이 되련다'

한림리 한림초등학교 

 

위치 : 한림읍 한림리 1384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교육기관(초등학교)

한림리_한림초등학교구교사

 

한림리_한림초등학교

 

한림초등학교 연혁
1914.09.01. 보명의숙(동명리 2177번지 명월성내 서재실옥에 설립. 수업년한 4년의 개량서당, 구우공립보통학교 전신) 개설
1921.05.06. 사립 구우보통학교로 개칭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지 이전까지 제주지역에 설립된 초등 교육기관은 제주, 정의, 대정, 서귀, 조천 등 5개 학교에 불과했다.

제2차 조선교육령 공포로 일군일교(一郡一校)제에서 일면일교(一面一校)제로 정책이 바뀌면서 학교 설립에 활기를 띄게 됐다. 1923년 9월에 구우(舊右)공립보통학교(현 한림초), 신우(新右)공립보통학교(현 애월초), 성산공립보통학교(현 동남교), 구좌(舊左)보통공립학교(현 김녕교) 등 4개교가 신설된다.(제주신보 140214)

1923.09.01. 구우공립보통학교(4년제 3학급) 개교
1933.04.00. 6년제로 연장됨.
1934.07.20. 동명리에 있던 구우공립보통학교를 현위치(한림리 1384번지 2만 여㎡의 부지)로 이전
1935.04.25. 구우면이 한림면으로 개칭됨에 따라 한림공립보통학교로 개칭
1935.05.10. 신창분교장 설치 인가
(※1936.04.15. 일본인 학교인 한림동공립심상소학교 개교)
1938.04.01. 한림서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6년제 7학급)
1938.07.01. 부설 금악간이학교 개설
1941.04.01. 한림서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43.04.01. 금악공립소학교 개편에 따라 학구 분리
1945.08.15. 태평양전쟁 종전(終戰)과 광복의 와중에 휴교
1945.10.03. 재개교(교장 梁斗赫)
1950.04.01. 한림국민학교로 개칭
1954.04.05. 4·3사건으로 폐교되었던 금악리에 한림국민학교 금악분교장 개교
1957.05.13. 금악국민학교 개교로 학구 분리
1955.07.23. 한림국민학교 명월분교장 개교
1968.03.11. 명월국민학교 개교로 학구 분리

1974.03.01. 특수학급 설치 인가
1979.03.13. 병설유치원 개원
1982.03.01. 비양분교장 편입
1993.03.01. 명월교 폐교로 명월교 학생 수용
1993.04.24. 급식소 개소식
1996.03.01. 한림초등학교로 개칭
2003.03.01. 영재학급 설치 인가
2004.02.16. 학교도서관 및 4개 교실 증축
2009.10.31. 운동장 천연잔디 및 우레탄 트랙 조성
2013.02.15. 제88회 졸업(139명, 총 15,043명 졸업)

한림초등학교 발상지인 동명리 2177번지는 조선시대 1831년에 설립된 지방 교육기관 우학당의 재실과 명월진의 서별장의 터전이다. 1914년 이 터에 수업년한 4년의 개량서당인 보명의숙이 설립되었는데 숙장은 면장 임창현이 겸직했다.

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의 교육시설은 종래 삼면일교제(三面一校制)였고, 관립고등보통학교(官立高等普通學校)는 일도일교(一道一校)로 당시에 교육시설은 제주군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으나, 1920년대에 들어 일면일교(一面一校)제가 실시하게 되면서 구우면(舊右面)에도 1923년에 구우공립보통학교(현 한림초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초대교장은 李華玉이었으나, 2대 히라카와 나카요시(平川中吉) 이후 6대까지는 일본인이 교장을 맡았다.

구우공립보통학교 개교 당시는 3·1운동 직후로 일제의 탄압과 기만적인 회유정책이 한창인 탓에 자칫 우리민족의 주체의식이 흔들리고 실의에 빠질 우려가 높은 상황이었다.

이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1925년에 부임한 김채진 선생은 조선어 시간에 한국역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우리민족의 주체성과 긍지를 살리는데 노력했다고 한다.(제주신보 140214)

1931년 5월 구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운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일제의 강압적인 황민화 교육에 반대하고, 극렬 친일 교사의 실력 부족을 이유로 축출운동을 전개하며 동맹 휴학에 돌입하였다.

이에 한림경찰관 주재소에서는 해당 학교 학생 여러 명을 검거하여 신문을 하였다. 그 결과 이 학교 선배이며 한림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 사회 운동을 전개하던 이익우를 중심으로 제주청년동맹 한림지부 활동가들이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이익우는 한림의 여러 후배 청년들을 청년동맹에 가입시키는 데 주도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청년동맹 한림지부에서는 1931년 5월에 있었던 구우공립보통학교 맹휴 사건에 개입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항일 의식을 깨우치게 하였다.

구우 공립보통학교 6학년이었던 김정맹 등이 노예교육의 폐지, 수업료 저감, 교과서 무료 배포, 김선생 전교(轉校)등을 교장에게 요구하고 학생 400여 명에게 동맹휴학을 선동한 사건이 일어났다. 김정맹 등은 이 사건으로 퇴학당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청년동맹 간부 이익우를 비롯하여 윤한진, 홍경옥, 최복렬 등이 검속되었다.

공립 보통학교 편제를 갖추게 되면서부터 민족주의적 색채를 공공연히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우공립보통학교의 경우는 특히 초창기 몇몇 사람의 노력으로 그러한 노선 견지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던 것 같다.

당시 제주도에서 가장 넓은 면이었던 구우면(한림면)의 유일한 공립 보통학교인 구우공립보통학교는 특히 1930년대 한림 지역 항일 운동가들을 배출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특히 문달현 등 교사들의 공로가 컸는데 문달현은 신유의숙의 김성숙처럼 노래를 통해 학생들의 독립의식 고취를 위해 애쓰기도 하였다.


(1) 교가[작사 김문옥]


하늘에 높이 솟은 한라의 영봉
비양에 부딪히는 태평양 물결
장하고 아름답다 한림 경승지
우리는 이 고장의 꽃이 되련다
한마음 한 뜻으로 굳게 뭉쳐서
영원히 빛내자 우리 한림교.
(2) 교목: 향나무이다.
(3) 교화: 영산홍이다.

한림은 축산과 어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여러 지역 주민들이 모여 거주하고 있어 한림초등학교는 다양한 계층의 교육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림초는 21세기 지역정보화 사회의 주역이 될 바른 인성과 실력을 갖춘 자주적이고 창의적인 어린이를 양성하기 위해 기초 기본교육에 충실하면서 꿈과 재능을 키우는 다양한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 실천을 위한 학력향상 학습목표관리제를 통해 기초학력 미달학생 Zero화,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제주어 교육 및 세계자연유산 보전활동, 올바른 독서습관 형성을 위한 책읽기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특히 학교 특색프로그램인 난타, 풍물, 락밴드, 합창부 공연을 을 통해 사회를 위한 재능기부 활동을 펼치고 있어 지역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으며 각종 대회에서도 수상하는 등 우수한 실적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올바른 인성을 위해 지식보다 ‘활동’을 중시하는 체험중심 인성교육, 학생중심 자율 활동 운영, 학부모와 소통을 위한 가족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제주신보 140214)

〈참고문헌〉한림초등학교 홈페이지,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한수풀역사순례길 안내서,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주신보(140214)
《작성 1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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