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강원도 이주 전 살던 집..애월리 한담동 장한철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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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강원도 이주 전 살던 집..애월리 한담동 장한철집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4.08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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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을 만나 유구(琉球)[오키나와]의 호산도(虎山島)에 표착..표해록(漂海錄) 저술

애월리 한담동 장한철집터

위치 ; 애월리 2532번지(애월로1길26)
시대 : 조선
유형 : 위인선현유적(생가 터)

애월리_장한철생가

 


장한철(1744년생)은 조선 후기 대정현감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녹담(鹿潭). 아버지는 이차방(李次房)이다. 입신양명에 뜻을 두고 웅혼(雄渾)한 마음을 기르고자 그의 나이 25세인 영조44년(1768)에 산방산(山房山)을 오르고, 이듬해에는 한라산을 정복하였다.

영조46년(1770) 향시에 합격하고 대과에 응시하려 출항(장한철 일행의 출항포구가 어딘지는 불분명하다)하였으나 풍랑을 만나 유구(琉球)[오키나와]의 호산도(虎山島)에 표착하였다.

온갖 고생 끝에 영조47년(1771) 2월에 서울에 도착하여 식년시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하자 5월 8일 귀향하여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였다.

장한철의 『표해록』은 그 후손(인동장씨 입도 14세손)이 재정리하여 새롭게 선보였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27호로 지정되었으며, 세계4대 해양문학의 백미로 불린다. 표해록은 필체가 여러 명으로 나타나는 바 장한철의 『표해록』이 필사본인지 편집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주요 줄거리는 〈장한철은 비롯한 일행 29명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제주를 떠나 육지로 향하던 중, 상륙 직전에 태풍을 만나 지금의 오키나와 열도의 한 무인도에 표류했다. 그러다 다시 닷새 만에 안남의 한 상선에 발견돼 구조됐으나, 제주 사람이란 이유로 다시 바다에 버려져 표류하게 됐다. 이어 청산도에 표착하기까지 21명의 희생자를 내고 8명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는 내용이다.

장한철의 표해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상황들은 다음과 같다.
〈장한철의 표류일정〉1770년 27세에 향시 합격하고 대과에 응시하고자 12월 25일(음력) 제주항을 떠났으나 유구(오키나와) 호산도(무인도)에 표착. 1771년 1월 베트남 상선에 구조된 후 제주 사람임이 들통나 나룻배에 태워져 망망대해에 버려졌다가 다시 전남 노화도에 닿아 청산도를 통해 전남 강진을 걸쳐 서울 입성. 회시에 떨어져 1771년 5월8일 귀향하여 표해록 지음.

〈당시 식자층의 대외관〉남자로 태어나제주 안에만 머물러 사는 것은 가마솥 안 물고기와 다르지 않다는 말을 언급

〈뱃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비판〉고래를 만나 당황하고 겁에 질려 관세음보살을 독경하는 뱃사람들에게는 비판적이나, 설문대할망에게 비는 모습에는 비교적 관대하게 반응함.

〈베트남 상선에 오른 후 제주인임을 속인 이유〉1609년 유구국 왕이 일본에 잡혀가자 두 왕자가 보물을 가득 싣고 왕을 구하러 가는 길에 제주에 표류하였는데 제주 판관 문희현과 제주목사 이기빈에 의해 갈취, 도륙 당한 일이 있어 그 후 제주인들이 유구나 안남배들을 만나면 제주인임을 스스로 감췄다고 한다. 문희현과 이기빈은 그 일이 탄로나 북청 등으로 유배되었다.

〈장한철의 연애담〉강진에서 만난 젊은 과부와의 연애담을 1인칭으로 기술
〈해양환경〉그가 경과한 경로를 더듬어 해로와 물의 흐름, 계절풍의 변화 등이 담겨 해양지리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설화〉백록담과 설문대할망 전설, 류쿠태자에 관한 전설 등이 기록된 설화집으로서 문헌적인 가치가 높다.

표해록의 내용 중에는 안남 상선에 승선하여 “우리나라는 예의로 치자면 천하제일이오. 그러기에 우리는 반드시 서로 아끼고 존경하여 어질고 아름다운 풍속을 그들에게 보여야 하오.”라며 자존심을 일깨우는 장면이 나오고, 왜구들이 장한철의 옷을 벗기고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았지만 그의 꿋꿋한 성품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쉽게도 장한철은 그 후 계속 제주도에 거주하지 않아 강원도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묘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있다. 강원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추정을 하는 정도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장한철의 표해록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난 장한철은 1770년 12월 25일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류쿠제도(琉球諸島, 오키나와)에 표착을 한다. 『표해록』은 장한철이 류큐제도에 표착한 뒤 일본으로 가는 상선을 만나 구조된 뒤, 우여곡절 끝에 한양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한 뒤 귀향하여 쓴 책이다. 당시의 해로와 해류(海流), 계절풍 등에 관한 해양 지리서로서 문헌적 가치가 높고, 제주도의 삼성(三姓)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 백록담과 설문대 할망의 전설, 유구 태자에 관한 전설 등 당시 제주도의 전설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어 설화집으로서의 가치도 높다.〉

그 후 영조50년(1774) 홍상성(洪相聖)이 제주순무어사(濟州巡撫御使)에 부임하여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인 시취(試取)를 실시하였을 때 김경회(金慶會), 강봉서(姜鳳瑞) 등과 함께 합격하였다. 영조51(1775) 5월 26일 친림근정전 경과 정시 문과(親臨勤政殿慶科庭試文科)의 별시에 급제하였다.

강원도 흡곡현감을 거쳐 정조12년(1788) 2월 홍계선(洪繼善)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에 부임하여 정조13년(1789) 1월까지 재임하였다. 대정현감 재임 중인 1788년 9월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대정현 사람 이환(李還)과 함께 기민을 구제하는 데 힘써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사망 시기는 알려진 바 없으며, 저술로는 일기체로 된 한문 필사본의 『표해록』과 『녹담집(鹿潭集)』이 있다.

이 집에서 장한철이 태어난 것은 아니고 그가 살았던 집이다. 장한철 집터는 애월로1길에 울타리가 붙어 있는 집터는 20m×15m 정도의 직사각형으로 안거리가 남서향으로 배치되었고 밖거리가 있는 서쪽에 대문이 있다. 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었을 뿐 전통적인 제주 민가의 배치와 구조를 볼 수 있다.

이 집에는 장한철의 후손 장응집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빈집으로 남아 있다. 2011년 10월에는 한담 일주도로변에 표해기념비도 세워졌고, 2014년 2월 20일에는 녹담 장한철 선생 생가 복원추진위원회 창립총회가 있었으며, 제주시를 통해 2억7000만원을 들여 부지를 매입했고 앞으로 생가가 복원되면 국내외 문인들이 입주하는 창작실을 설치해 관광자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2014년에는 한담포구에서 곽지해수욕장까지 1.2㎞ 해안산책로를 장한철산책로로 명명하였다.

《참고문헌》표해록,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문화재청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주일보 140417, 제주환경일보 140327, 제주신문 140116 장영주 글
《작성 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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