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참되고 바르게, 슬기롭고 튼튼하게’..봉성리 어도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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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참되고 바르게, 슬기롭고 튼튼하게’..봉성리 어도초등학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4.10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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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봉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복 받은 우리 마을 봉황새 마을'

봉성리 어도초등학교

 

위치 : 애월읍 봉성리 3276번지[봉성로 76]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교육기관(초등학교)

봉성리_어도초등학교

 

애월읍 봉성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이다. 봉성리(어도리) 설촌(設村) 이후 조선시대에는 일정한 장소를 정함이 없이 훈장댁(訓長宅)에서 서당(書堂)을 두어 한문을 중심으로 교육에 임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1923년 이전까지는 각 동(洞)에서 사숙(私塾)을 정하여 수학희망자(修學希望者)에 의해 한문서당에서 선생을 청하여 한문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 이후에는 이민(里民)의 결의에 의하여 중화동(관전못 서측) 전향사(前鄕舍) 및 사숙(私塾)을 설립, 보성서당(普成書堂)이라 칭하고 한문선생 1인, 신학문선생 1인을 두고 한문과 신학문을 배웠으며 한문선생은 강선온(姜宣溫), 신학문선생은 김중선(金重善)이다.

보성서당 설립인은 강희수(姜禧璲) 씨였으며 숙장(塾長)은 강하병(姜夏柄)이었다. 1936년에 보성서당을 어도리 3821-2번지로 이설하였다. 1940년 애월교 부설간이학교로 승격되면서 보성사숙(普成私塾)은 폐지되었다.

어도1구에서는 1936년 재일친우회(在日親友會) 송금(送金)과 어도리 친우회에서 어도리 3821의 2번지 2,640㎡의 터를 사서 재일청년회(在日靑年會) 장학송금과 어도리 청년회 회비로 청년회관을 지어 장학교실(獎學敎室)로 사용하였다.

이때 최봉조(崔鳳祚) 선생이 일정하(日政下)의 복식수업으로 일정신교과서로 수업을 전개하였다.

어도2구(於道二區)는 1936년에 재일친우회(在日親友會) 김유만(金有滿) 씨 송금으로 어도리 1476의 1번지 1,881㎡를 사서 신명서당(新明書堂)을 설립하여 신학문(한글, 한문, 일본어 등)을 교육하였다.

1948년 11월 18일 4·3사건으로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자 2구(二區)에 속해 있는 주민들은 소개(疏開)되고 서당은 자연히 문을 닫게 되었다.

역대 선생은 김두선(金斗宣), 신용호(申龍浩), 이진형(李眞衡), 이화택(李化澤), 이여진(李如珍), 문창휴(文昌烋), 강창호(姜昌浩)였다.

1940년 4월 1일 애월공립심상소학교 부설 어도간이학교 인가를 받았는데 이 때 선생은 박의황(朴義晃)이다.

간이학교는 일본의 아시아대륙 진출 야망에 맞추어 저급의 노동력을 대량으로 양성하고, 아울러 한국민에 대하여 일어교육을 보급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이다. 따라서 수업연한이 2년으로 끝나는 것으로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없었다.

1942년도부터 어도리장 강경주(姜景周) 씨가 어도공립국민학교로 승격 추진하기 위하여 어도리(1993. 4. 1. 북제주군 이(里)명칭에 관한 조례에 의거 봉성리로 변경됨) 3276번지를 중심으로 10여 필지를 구입 또는 토지 기증을 받았다.

1943년 3월에 어도간이학교는 폐교하고 1943년 4월 1일자로 공립국민학교로 인가받아 1943년 6월 3일 개교하였으나, 교사(校舍)가 마련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했다.

1945년 12월 우리나라 한글교과서 제도가 시작되자 초대교장 최봉조(崔鳳祚 1945.12.31.~1948.08.31. 재임) 씨가 취임하였다.

언제 교사가 지어졌는지에 대한 자료는 없고 1949년 1월 26일 4·3사건으로 교사(校舍)가 무장대에 의해 불태워지는 바람에 그 해 3월 10일 폐교(廢校)되고 재학생들은 곽금국민학교와 귀덕국민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을 하게 되었다.

같은 해 9월 1일자로 복교(復校)가 인가(認可)되어 하급생(1~3학년)들은 수학(修學)하였다.

1950년 3월에 현재 학교부지에 가교사(假校舍)를 건축하여 정상교육에 임하게 되었다. 1953. 4. 5. 석조 함석 지붕 2교실을 신축하였고, 1954. 6. 13. 석조 기와 지붕 2교실을 증축하였다.


이후 연혁을 보면
1963년 5월 6일 어음분교장 인가를 받아 그 해 5월 20일 어음분교장 개교
1969년 1월 31일 가교사(假校舍) 2교실 개축
1969년 3월 1일 화전분교장 설립 인가를 받아 그 해 3월 5일 화전분교장 개교
1972년 10월 31일 철근 슬라브 2교실 증축
1980년 12월 18일 급수탱크 및 급식소 시설
1982년 1월 21일 병설유치원 인가 3월 9일 병설 유치원 개원
1988년 3월 1일 화전분교장 폐교
1999년 3월 26일 어음분교장 폐교
1996년 3월 1일 어도국민학교에서 어도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교내에는 학교 설립과 운영에 공로가 있는 분들에 대한 비석이 있다.


송촌강공전일배(松村姜公全一配) 탐라송씨기념비(耽羅宋氏記念碑) 1968년 봄
훈장김공원하기념비(訓長金公元河記念碑) 1968년 봄
도은선생강경주송덕비(道隱先生姜景周頌德碑) 1968년 봄
훈장홍공영구·창구기념비(訓長洪公永球·昌球記念碑) 1968년 9월
유향별감김공재호지남(留鄕別監金公在浩之男) 훈장김두일기념비(訓長金斗日記念碑) 1969년 2월


몸과 마음이 건강하며 슬기롭게 탐구하는 자주적인 어린이를 육성하는 것울 교육 목표로 하고 있으며, 교훈은 ‘참되고 바르게, 슬기롭고 튼튼하게’이다.


학생수는 1978년 444명에 이른 적도 있으나 해마다 줄어서 2013년 4월 현재 64명까지 줄었다가 2016년 3월 현재 89명이 재학하고 있다. 2016년 2월 65회에 이르는 총졸업생 수는 2746명이다.

[교가와 상징물]


(1) 교가(윤석중 작사 문경호 작곡)

1절 : 어도봉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복 받은 우리 마을 봉황새 마을
그 옛날 금마을을 이어받아서 부지런히 잘 배워 참사람 되자.

1절 : 한라산 맑은 정기 고인 샘물이 사철 솟아 새 기운 돋게 해 주네.
태평양 너머까지 힘이 뻗도록 부지런히 잘 배워 새 일꾼 되자.

(후렴) 언제나 푸른 학교 우리 어도는 아름다운 마음씨 사랑의 학교

(2) 교목: 교목은 동백나무로, 늘 푸르고 겨울에도 굳건히 피어나는 빨간 꽃은 성실하고 활기찬 어린이를 상징한다.

(3) 교화: 교화는 금잔화로, 사시사철 어려움을 딛고 청순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꽃을 피우는 것처럼 부지런하고 착실한 어린이를 상징한다.

〈참고 문헌〉어도초등학교 홈페이지,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작성 1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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