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최초의 산마감목관..서홍동 김대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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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최초의 산마감목관..서홍동 김대길 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4.20 0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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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마공신(獻馬貢臣) 김만일(金萬鎰)의 셋째 아들..인조8년(1630)에 무과에 급제

서홍동 김대길 묘


위치 ; 서귀포시 서홍동 808-1번지
시대 ; 조선중기
유형 ; 묘

서홍동_김대길묘 뒤

 

서홍동_김대길묘 측

 

선조42년(1608) 정의현(旌義縣) 의귀리(衣貴里)에서 헌마공신(獻馬貢臣) 김만일(金萬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주(慶州) 김씨 입도조(入島祖)인 김검룡(金儉龍)의 8세손이다. 자는 경보(慶甫), 호는 장전(長田)이다.

아버지인 김만일은 대대로 부유한 집안에서 일찍이 목축사업에 뜻을 두어 육마(育馬)사업에 공을 들인 결과 사업은 크게 번창하였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조정에서는 전마(戰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전쟁의 피해로 전국 대부분의 목장이 제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따라서 전마를 보충할 방법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제주에서 말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해진 수량의 진상마(進上馬)와 국영목장에서 차출하는 말만으로는 크게 부족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사둔마(私屯馬) 500필을 조정에 헌납하였고, 이후 광해군과 인조 대에도 정부가 요청하면 그의 사둔마를 제공하는 등 합계 1,000필 넘는 말을 헌납하여 헌마공신이 되었다. 그가 죽은 뒤 아들 김대길(金大吉)과 사손(嗣孫) 김여(金礪) 또한 2백필의 말을 헌납하였다.

김대길(金大吉)은 인조8년(1630)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녹산장(鹿山場)에 말을 방목하여 양축한 후에 일정량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효종9년(1658)에 그의 아버지가 하였던 것처럼 말 208필을 바치자 당시 제주목사 이괴(李禬)는 장계를 올려 김대길에게 종6품의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직을 주어 자손들인 경주 김씨 문중에게 종문세습직(宗門世襲職)으로 세습하게 함으로써 감목관직이 폐지된 고종25년(1895)까지 약 210년간 83명에게 세습되어졌다. 즉 김대길이 최초의 산마감목관이다. 1668년에 별세하였다.

김석익의 『탐라기년』에는 〈효종9년(1658)에 김만일의 아들 김대길과 큰 손자 김려가 또 산장(山場:현재의 녹산장)에서 방목하던 2백여 마리를 바쳤다.

이때에 조정에서 김대길을 산마감목관으로 삼고 6품의 관등을 내리고, 특별히 명령하여 그 자손으로 그 직분을 세습하게 하니 이로부터 음사(蔭仕)가 끊이지 않았다. 김대명은 벼슬이 보성군수에 이르니 김대길의 형이다.

김려는 벼슬이 흥덕현감에 이르니 김대길의 아들이다. 김려의 아들 김우천은 숙종39년(1713)에 본도의 감진(監賑)을 맡아 비축했던 곡식 140석을 진휼하는 데 도와, 이에 부호군(副護軍)에 가자(加資)되었고, 우천의 아들 김남헌은 벽사찰방에 가자되었다.〉라고 기록되었다.

김대길의 묘는 삼매봉 북동쪽 태평로의 일방통행 도로의 중간에서 약간 동쪽 길 북쪽 밭 안 경사진 땅에 한라산을 바라보는 북북서 방향으로 자리잡았다.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이 모두 갖춰져 있다. 산담의 왼쪽 앞에 묘역 안과 밖으로 통하는 계단이 마련되었다.

비석에는 資憲大夫中樞府事行監牧官金公 配貞夫人谷山康氏 墓라고 되어 있다. 비석 뒷면과 옆면에는 가계와 후손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었고, 앞면 왼쪽에 작은 글씨로 반득이왓에 있던 묘를 이장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비석을 고쳐 세운 이는 10대손 熙殷이다.
《작성 1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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