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농민들의 권익보호와 민족의식 고취..종달리 한원택지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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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농민들의 권익보호와 민족의식 고취..종달리 한원택지사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7.25 0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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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조합 설립 ..고문의 영향으로 1938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작고하였다.

종달리 한원택지사묘

지역 ;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3092-1번지. 문중공동묘지 내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묘
생몰년 ; 1912년 11월 19일 ∼ 1938년 10월 10일

 

종달리_한원택지사묘

 

구좌읍 종달리 909번지에서 출생한 한원택(韓遠澤) 지사는 1931년 11월 2일 농민조합을 설립하고 농민들의 권익보호와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의 책임자인 신재홍(申才弘)과 채재오(蔡載五) 고사만(高仕萬) 등과 함께 김기생(金己生)의 집에서 농민조합 설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참석 농민 수십여 명에게 ‘농민의 피를 짜는 악질 조합 반대, 농민 대중의 이익에 배치되는 면(面) 행정 반대’ 등의 표어를 발표하고, 농민들의 권익보호와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다.

1932년 1월 제주도 해녀 사건 때에 배후에서 이들을 지도하였던 강창보(姜昌輔), 혁우동맹원이었던 문도배(당시 23세)·한원택(당시 19세)·김시곤 등 비밀결사도 이 일로 조직이 탄로되어 검거되는 등 78인의 애국지사가 검거되었다.

이 일로 1933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1년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한원택 선생은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일제의 계속적인 감시와 옥중 고문의 영향으로 1938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작고하였다.

그는 이미 그 시대에 전통혼례식을 하지 않고 요즘의 운동회 때처럼 신식혼례식을 치러서 동네 사람들이 구경가기도 했었다고 하며, 형무소에서 출소 후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중 서울에서 유명한 의사가 직접 약을 싸들고 와서 1주일 간 치료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제민일보 2003년 8월 13일, 한라일보 2003년 8월 13일)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 지사의 묘는 종달리에 있는 문중의 공동묘지에 부인과 합장묘로 마련되었다.

2008년 제주븍별자치도지사 명의로 세워진 비석에는 〈愛國志士韓遠澤 志士夫人光山金氏 合墓〉라고 새겨져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상석과 혼유석, 향상, 동자석이 설치되었다.
《작성 17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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