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귤림서원의 학관..이도1동 장수당(藏修堂)(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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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귤림서원의 학관..이도1동 장수당(藏修堂)(복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8.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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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사재(四齋)중 하나로 그 중 으뜸..300년 동안 제주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이도1동 장수당(藏修堂)(복원)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421-3번지(오현길 61) 오현단 경내
시대 ; 조선중기(1660)
유형 : 교육기관

 

이도1동_장수당

 

현종1년(1660) 제주목사 이괴(李襘)가 현재의 오현단 옆에 삼읍(三邑)의 자제를 교육하는 장소로 건립하였으며, 김진용(金晋鎔)을 교수로 임명하였다. 장수(藏修)는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藏] 닦는다[修]는 뜻이다.

김진용은 광해군10년(1618년)에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 귀양온 간옹 이익(李翊, 1629~1690)에게 수학하였다. 간옹 이익은 광해군7년(1615년)에 대북파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강화도에서 죽게 한 것과 인목대비를 폐비하는 것에 반대하는 극언극간의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샀던 인물이다. 김진용은 고홍진 문영후 등과 더불어 이익이 배출한 걸출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이다.

김진용은 이익에게서 수학하여 인조13년(1635)에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인조21년(1643)에 경학전강에 급제하여 숙녕전(肅寧殿) 참봉(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제주에 머물렀다. 김진용이 제주에 은거하면서 훈학에 힘쓰는 한편 효종10년(1659)에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괴(李禬)에게 건의하여 고득종(高得宗)의 옛 집터(현 오현단)에 제주 교육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장수당(藏修堂)을 세워 육영에 평생을 바쳤다.

효종9년(1658)에 제주로 부임한 이괴 목사는 남달리 학문을 중시하여 김진용으로 하여금 인재를 육성하게 하였고, 김진용과 더불어 장수당이라는 학사를 창건하였다. 장수당은 후일 귤림서원의 효시가 되기 때문에 제주에서는 최초의 사학으로 자리매김된다.

장수당은 12칸으로, 35명의 학생이 수학하였으며, 김진용은 장수당에 은거하면서 삼읍(三邑: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학생들을 훈학하는 데 힘썼다. 그로 인해 제주의 유학이 왕성해지고, 풍속이나 교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김진용은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 현종4년(1663)에 생을 마감했는데, 그로부터 약 170년이 지난 순조31년(1831)에 유림의 건의로 이예연 목사가 김진용의 업적을 기려 그의 위폐를 영혜사(永惠祠, 일명 象賢祠)에 모셨다.

그러다가 헌종15년(1849)에 장인식(張寅植)목사 때 위패를 고득종(高得宗)의 봉향처인 향현사(鄕賢祠: 1667년 현액된 귤림서원의 별사. 일명 靈谷祠)로 옮겨, 고득종과 더불어 향사하고 향현으로 받들어 왔다.(오마이뉴스 장태욱 글) 고종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이 추향 제도가 없어졌다. 후인들은 김진용이 살았던 곳(현재의 봉개동 419번지 일대의 마을)의 이름을 명도암이라 칭하였다.

장수당은 현종1년(1660) 제주목사 이괴가 진사 김진용의 건의로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옛 터에 세웠던 10칸의 강당이다. 이괴 목사의 장수당기나 대제학 조경의 장수당기에는 목재를 구하고 역부를 고용하는 것까지 일체의 공사를 말아 장수당을 지은 김진용의 업적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제주장수당기(濟州藏修堂記) ; 현종2년(1661)에 제주목사 이괴(李襘)의 부탁으로 조경(趙絅)이 쓴 것이다.

〈탐라는 남쪽 바다에 있는데 땅이 사방 4백 리이고 예속된 현이 둘이니, 하나의 작은 제후국이라 할 만하다. 우리 헌묘(獻廟 태종(太宗)) 때에 성주(星主)가 참람된 작호를 고치고 국내에 편입되기를 청한 일로 인해 마침내 강등하여 주(州)로 삼고 관리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관할하는 지역이 넓은 것이나 주거하는 백성이 많은 것이나 땅과 바다의 물산이 풍부한 것이나 체통이 존귀한 것이 다른 주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만 거대한 파도가 치는 수천 리의 험난한 길을 무릅써야 하기 때문에 그 곳의 목사가 된 자들은 모두 실망하고 두려워하며 조심하고 위축되어 마치 살아날 수 없을 듯이 여긴다. 그러다 임지에 도착해서는 연회를 벌이고 오락을 즐기지 않으면 가렴주구를 일삼으니, 이 때문에 제주의 백성이 문명의 교화를 입지 못한 지 오래이다.

효종 9년(1658)에 연성(延城) 이후(李侯)가 제주 목사가 되었다. 이후는 아침에 명을 받고 저녁에 출발하면서 난색을 표하는 기미가 없었다. 이때 이후는 막 전직에서 해임되어 돌아온 터라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지도 않았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훌륭하게 여기며,
“동서남북 어디든 오직 명을 좇는다고 하였는데, 이후가 바로 그 사람이구나!”
하였다. 이후가 바다를 건넌 지 3년이 넘어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했다.

“제가 비록 노둔한 사람이지만 서울을 떠나던 날에 삼가 성상의 하교를 읽어 보니 학교를 일으키는 것이 가장 으뜸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그 말씀을 깊이 새기고 있었습니다. 처음 정무를 볼 때에 문무 속관과 두 현의 현감과 교수와 원로들과 선비들이 모두 자리에 있었는데, 제가 마침내 말하기를, ‘학교는 왕정의 근본이다.

내가 왕명을 받아 이 땅을 다스리는데, 만일 정사의 근본을 생각하여 진작하지 않는다면 그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보니 이 주의 백성들은 치아가 가지런하고 광대뼈가 나왔으며 입술이 두툼하고 흰 피부에 키가 큰 것이 서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드문데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은 어찌 그리 적은가.

어업과 상업의 이익을 취하는 데에 빠져서 진작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발로 쇠뇌를 당기고 손으로 활을 당기는 무술에 종사하여 빨리 이루고 학문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주를 다스리는 자가 과거에 힘쓰도록 널리 장려하는 도리를 잃은 것인가.’ 하였습니다.

좌중에 진사 김진용(金晉鎔)이 일어나 대답하기를, ‘합하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저는 꺼리거나 피할 줄 모르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주가 비록 궁벽하지만 한라산이 진산(鎭山)으로 자리하고 옥빛 바다에 둘러싸여 오색구름과 상서로운 기운의 다섯 가지 색채가 어우러집니다.

여기서 생산되는 단사(丹砂), 석영(石英), 귤, 유자, 진귀한 나무와 준마 등 어느 한 가지도 다른 주에서 당해낼 수 없는데, 유독 인재를 배출하는 것만 특산물만 못하단 말입니까. 옛날 고씨(高氏) 부자와 형제는 여러 대에 걸쳐 문학으로 이름과 지위가 빛났습니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이유의(李由義)와 최산해(崔山海)가 학교를 세우고 학풍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도지개 옆에는 굽은 나무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후에는 그렇지 않아서 수령들은 대부분 억세고 가혹한 무관들이었고, 열에 하나 문관이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제주 사람들을 경시하여 무(武)를 우선할 뿐 문(文)을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천행으로 은혜로이 합하께서 탄식하며 학문을 일으키려 하시니 참으로 개미들이 쉼 없이 배울 때(부지런히 공부할 때임을 말한다. 개미는 하찮은 벌레이지만 끊임없이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계속하여 마침내 큰 둑을 만들 듯이 학문도 때때로 익히고 닦아야 함을 비유한 것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개미는 수시로 흙을 물어 나르는 일을 배워 익힌다.〔蛾子時術之〕” 하였다.)입니다. 하지만 선비를 기르고자 하면 학사(學舍)가 없어서는 안 되고, 학사를 세우고자 하면 좋은 장소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향교 서쪽 과수원 동쪽에 땅이 있는데 고(故) 판윤 고득종(高得宗)의 유지(遺址)입니다. 고씨 종족은 영달한 기회를 이용하여 모두 꾀꼬리처럼 높은 나무로 옮겨가고(제주에서 서울로 옮겨간 것을 말한다.

《시경》 〈벌목(伐木)〉에 “쩡쩡 울리며 나무를 베거늘 꾀꼴꾀꼴 새가 우네.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서 높은 나무로 옮겨가네.〔伐木丁丁, 鳥鳴嚶嚶, 出自幽谷, 遷于喬木.〕”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미개한 남방에서 문명한 북방으로 옮겨 왔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그 터는 빈터가 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저는 기뻐서 마침내 김진용을 데리고서 그 터에 갔습니다. 그 터는 한라산의 정맥을 차지하고 있는데 지대가 높고 건조하며 넓고 밝았습니다. 그윽한 곳에 자리잡았지만 지세가 높고, 성에 이웃해 있지만 경내가 고요하며, 북쪽으로는 큰 골짜기를 마주하였는데 물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습니다.

학자가 물결을 관찰(물결을 본다는 것은 근원을 탐구하는 것으로 학자가 공부하는 학교를 가리킨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물을 관찰하는 데에 방도가 있으니, 반드시 그 급한 여울물을 보아야 한다.〔觀水有術, 必觀其瀾.〕”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여울물을 보면 그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한다면 이곳을 놔두고 어디로 가겠으며, 동재와 서재를 짓는다면 어느 곳이 이보다 낫겠습니까.

그리하여 학사의 건축을 계획하고 김진용에게 그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재목은 산림을 벌목하고 바다에 띄워 가져다 썼고, 기와는 이지러지지 않는 것을 사용하였으며, 일꾼은 일이 없는 사람을 고용해서 썼고, 흙벽을 바르는 일은 미장이들이 자기 일처럼 와주었습니다.

공사가 한 달을 넘기지 않아 대들보며 용마루며 지도리며 말뚝 등이 각각 제자리를 찾아 건물이 우뚝하게 눈앞에 세워져 시원스레 공부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공사가 끝나고서 나는 외람되이 학사의 이름을 ‘장수당(藏修堂)’이라고 지었습니다.

이것은 《예기》의 ‘생각하고 익히고 놀고 쉰다.’는 뜻(《예기》 〈학기(學記)〉에 “군자는 배움에 있어 생각하고, 익히고, 쉬고, 논다.〔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息焉遊焉.〕”라고 하였다.)을 취한 것입니다.

제주의 인사들이 학생과 선비를 막론하고 아래로 이장과 노인과 농민들까지 모두 감탄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들이 백 년 동안 들어보지 못한 성대한 일입니다.

아마도 위에서 성인이 나와 일시동인(一視同仁 =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면서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으로, 한유(韓愈)의 〈원인(原人)〉에 “성인은 일시동인한다.〔聖人一視而同仁〕”라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다.)하는 교화를 안팎의 구분 없이 넓히자 우리 사또께서 계승하여 베푸셨기 때문인가 봅니다.’ 하였습니다. 저는 제주 사람들이 성인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또 강회(講會) 자리를 열어 세 읍의 향교 유생들에게 책을 들고 강에 응하게 하여 그 중 뛰어난 사람을 뽑아 스무 명을 얻었고, 또 가르칠 만한 어린 학생을 열여섯 명을 선발하였습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제가 반드시 의관을 차려 입고 유생들의 강연을 듣고서 잘하는지 잘못하는지 가늠하여 권면하니,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 면려하고 노력하여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 년이 되지 않아 경서를 배송(背誦)하는 자들이 열 중 예닐곱이 되었습니다.

제가 또 사서삼경, 《소학》과 《통감》 책을 혹은 열 질, 혹은 아홉 질, 혹은 네 질을 마련하니 독서하는 자들이 책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또 공부하는 사람들이 닷 되의 밥(= 전국 시대 윤문이 닷 되의 적은 밥을 먹으며 공부하면서도 만족하였다는 고사가 《장자》 〈천하(天下)〉에 나온다.)을 먹으며 오래 굶주리면서도 만족했던 윤문(尹文)처럼 할 수 없는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전(本錢)인 늠미(廩米)를 마련하기로 의논하여 관에 저장된 수백 섬의 곡식을 떼어 공부하는 양식으로 충당하고, 거룻배 큰 것 1척을 빼내서 학사(學舍)로 이적하여 이를 운용하여 부족분을 메우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또 이것이 오랫동안 이어나가기를 도모하기에 부족할까 염려하여 쓰지 않는 군량 3백 곡(斛)을 나누어 공부하는 학생들을 넉넉하게 해줄 것을 건의하였는데 상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얼마 후 임기가 만료되어 제주를 떠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김진용 등이 제가 일을 하고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떠난다고 생각해서 모두 입을 모아 말하기를, ‘문옹(文翁) = 한 경제(漢景帝) 때에 문옹이 촉군태수(蜀郡太守)로 나가서 성도(成都)의 저잣거리에 학교를 세우고 부역을 면제시키는가 하면 성적이 우수한 자를 관리로 임용하는 등 획기적인 문교 정책을 실시하여,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고 교화가 크게 일어난 결과 제(齊)ㆍ노(魯)처럼 변화시켰던 고사를 말한다.

《漢書 卷89 循吏傳 文翁》)이 촉(蜀) 지역을 유학의 교화로 다스리자 촉 땅이 변하여 문헌의 고장이 되었다고 하고, 유자후(柳子厚 =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志铭)〉에 “형상(衡湘) 남쪽에서 진사가 된 자들은 모두 자후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자후가 입으로 강론하고 손가락으로 써가며 직접 가르침을 준 것을 받아 문장을 지은 것은 모두 볼 만한 법도가 있었다.”라고 하였다.)가 유주(柳州)의 자사(刺史)가 되어 손가락으로 써가며 문장을 가르치자 형양(衡陽)과 상수(湘水) 지역에서 진사에 합격한 사람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능히 지방의 풍속을 변화시켰다는 명성은 지금까지 사적에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사또께서는 학교를 세워 학문을 진작시키고 돈과 곡식을 넉넉히 하여 한미한 선비를 길렀습니다. 그밖의 정사는 사또를 앞에 두고 이루 다 칭송할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사양하며 감히 칭찬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내 정사가 어찌 옛 사람에게 미치겠는가.’ 하니, 김진용 등이 또 말하기를, ‘장수당의 현판을 어찌 글도 없이 지금 사람과 후세 사람에게 보이겠습니까. 합하께서 한 말씀 남겨주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만일 친부가 자식의 중매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이라 혐의쩍어 하신다면 서울에 사람을 보내 옛것을 독실하게 좋아하고 문장을 잘하시는 분에게 부탁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제가 감히 여러 사람의 뜻을 꺾을 수 없어 편지를 보내 집사를 번거롭게 하니, 집사께서는 저와 평소에 알고 지낸 사이이고, 또 이 일이 어찌 개인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실로 바닷가 먼 지방에 성상의 교화를 펴는 것이니 군자가 말하기 즐거워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집사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아, 나는 손에서 글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이루었다는 말에 감격하였다. 언제나 가슴속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기에 마침내 보잘것없는 말로 다음과 같이 부탁에 답한다.

젊었을 적에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를 읽었는데, 제주의 풍속이 순박하고 검소하며 예의와 겸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예의와 겸양은 참으로 유가의 도와 일맥상통하며, 검소함은 단릉씨(丹陵氏 요(堯) 임금)의 유풍이 아닌가. 제주가 특별히 바다 밖에 있어 아득히 세상과 서로 소통하지 않아 혼돈(混沌)이 아직 열리지 않고 소박함이 흩어지지 않아 그러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누가 ‘기자(箕子)의 어진 교화가 다만 서쪽에만 입혀지고 동쪽으로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였던가. 더구나 우리나라 성스러운 임금들께서 계승한 덕이 해외까지 미친 것이 지금까지 거의 삼백 년이다. 제주의 백성 중에 한 명이라도 교화에 복종하지 않은 자가 있는가. 부리기 쉬운 백성이라고 이를 만하니, 지금 사또께서 제주를 다스린 것은 진실로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과 같다.

제주의 유생이 눈과 귀를 한 번 새롭게 하여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얻은 것처럼 시서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는 일은 사또께서 학교를 중시하신 데서 시작되리니, 그 공이 어찌 백성을 기르고 풍속을 변화시키는 정도에 그치겠는가.

사또의 이름은 회(禬)이고 자는 자정(子正)으로, 삼사(三司)를 거치고 지방관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는데 모두 반드시 치적을 세웠다. 김진용은 조덕(趙德 = 한유(韓愈)가 헌종(憲宗)에게 〈불골표(佛骨表)〉를 올리고 나서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된 뒤에, 그 지방의 무지한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향교를 세우고 수업을 받게 하면서 조덕에게 그 교육을 맡겼다는 내용이 나온다.《東坡全集 卷86 潮州韓文公墓碑》)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도리상 이름을 써주는 것이 마땅하다. 숭정대부원임 행이조판서겸 대제학(崇政大夫原任 行吏曹判書兼大提學) 한양 조경(漢陽 趙絅〉(龍洲遺稿 =조선 중기의 문신 조경(趙絅:1586~1669)의 시문집.)

조경(趙絅)은 이 글에서 이괴를 한유(韓愈)에 김진용(金晋鎔)을 조덕(趙德)에 비유하여 기리고 있으며, 후에 조경은 정온(鄭蘊)의 묘지명(墓地銘)도 썼다.

이괴 목사가 쓴 장수당기도 전한다.


〈지난 무술년(효종9년=1658) 봄 제주목이 비자 효종대왕께서는 해외의 창생이 조정의 은택을 입지 못할 것을 깊이 염려하시고, 대신들에게 문관 중에서 택하여 천거하라고 명하시자 대신들은 신(臣) 괴(襘)에게 명을 받도록 하였다.

나는 같은 해 4월에 고을에 도착하여 성화(聖化)를 선양하려면 흥학(興學)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우선 3읍의 교생을 모아 고강(考講)하였다. 손수 농사를 짓는 여가를 틈타 사서(四書)와 소학(小學)을 배워서 음독과 훈석에 통하는 자가 많았는데 그 글 읽는 소리가 맑고 명랑하여 기질이 밝고 뛰어난 자 20명을 뽑아 관에서 책과 양식을 지급하고, 향교 곁에 초가 6칸을 지어서 이들이 머물도록 하였다. 또 일찍이 경서를 읽은 잘르 선발하여 훈장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였다. 나 또한 매월 삭망(朔望)에 직접 그들과 강론하고 그 능부(能否)를 상벌(賞罰)하였더니,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분기하여 위태로운 흉년에도 대단한 병고(病故)가 없으면 감히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이와 같이 한 지 2년이 되자 20명 가운데 혹자는 사서일경을 읽고, 혹자는 사서이경을 읽는가 하면, 혹자는 사서삼경을 익히 암송하니, 비록 양남(경상도와 전라도)의 선비로서 평소 문학에 종사한 자라 하더라도 이들보다 더 잘할 것이 없었다. 토민인 진사 김진용은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식년시(式年試)에 경전(經典)을 강론하여 연획(連劃)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기꺼이 벼슬하지 않고 병을 핑계로 스스로 세상을 물리치며 산야에 숨어사는 자이다. 그는 옛사람들의 글을 많이 읽었으므로 임명하여 좌수(座首)로 삼았다.

내 임기가 만료되어갈 때 김진용이 내게 일러주기를 ‘사또께서는 부임한 이래로 재생(齋生)을 불러모아 공부를 권함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셨으며 제생(諸生)들 또한 좇아 교화되어 힘써 배워서 문학이 크게 변했으니 덕을 입음이 큽니다.

그러나 단지 이와 같이 해 놓기만 하고 떠나 버리신다면 제생들은 다시 의지할 곳이 없어 모두가 배움을 포기하고 돌아가 농사를 짓게 될 것이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자 진용이 말하기를 ‘성 남쪽에 폐허가 된 집터 하나가 있는데 곧 옛 판윤 고득종이 살던 터입니다.

고판윤의 두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헌달하였기에 평소 명당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만약 이곳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장수(藏修)하는 곳으로 삼고 얼마간의 책과 양식을 마련해 주면 영세불후의 성대한 일이 될 것입니다’고 일러 주었다.

마침내 진용과 함께 가서 살펴보니, 한라산의 정맥이 넘고 빗기며 북으로 달리다가 엉기어 하나의 언덕을 이루었는데 앞에는 대해(大海)를 맞아 좌우로 품고 있어 명당이라 일컫는 것도 과연 빈말이 아니었다. 이에 장인을 부르고 재목을 모아 학사 11칸을 짓고 장수지당(藏修之堂)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동몽 15인을 더 뽑아서 앞서의 20명에 더하니 35명이 되었다.

또 본주에는 적곡 3분모가 있는 외에 또 300곡의 모곡을 모아 기록하는 일이 있으니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 연유를 갖추어 감해 줄 것을 계문(啓聞)하여 거학(巨學)하는 양식으로 삼았다. 또 부족할 것이 염려되어 콩 150곡, 밭벼 50곡, 보리 50곡, 목면 2동을 변통하여 지급하고, 배 1척을 정기적으로 지급하여 육지에 나아가 계속하여 양식을 사 옮기게 하되 유사 2명을 뽑아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창시의 본말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경자년(현종1년=1660) 4월 목사 이괴가 기록하다.(연안이씨삼척공파 보학교실 카페)

그리고 진사(進士) 김진용을 교수로 삼고 떠났다. 이후 이괴는 귤림서원 곁에 이약동 목사와 함께 1669년(현종 10)에 목사 이인이 창건한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되었다. 이후 영혜사에는 순조19년(1819)에 목사 조의진이 유림의 장계에 의하여 이형상ㆍ김정(金)을 뒤이어 배향하고, 순조31년(1831)에 목사 이예연이 유림의 장계에 의하여 김진용(金晋鎔)을 추가 배향하였다.

한편 영혜사는 처음에는 편액이 없다가 헌종7년(1841)에 목사 이원조가 상현(象賢)이라 이름을 붙였고, 헌조14년(1848)에 목사 장인식이 영혜(永惠)라 이름을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영혜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제액하였다고 전한다. 후에 이예연 임형수를 추가 배향하였다가 고종8년(1871)에 철폐되었다.(제이누리 2013.01.21.)

장수당은 제주의 사재(四齋)중 하나로 그 중 으뜸이었으며, 귤림서원의 학관으로서 300년 동안 제주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이 장수당의 옛터에 고종12년(1875) 이희충(李熙忠)목사가 경신재(敬信齋)를 지었는데, 1910년 제주농업학교가 설립되면서 헐렸다.(오현고등학교총동창회) 현재 장수당은 2003년 면적 77.8㎡로 새로 지은 것이다.
《작성 17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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