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1936년 개량서당 신풍학당 설립..신풍리 오천년 의연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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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1936년 개량서당 신풍학당 설립..신풍리 오천년 의연 기념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8.1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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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지 않을 그 공적을 돌에 새겨 길이 전하도다"

신풍리 오천년의연기념비

위치 : 신풍리 723번지 신풍리사무소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기념비

 오천년의연기념비

 

신풍리_오천년기념비 뒷면

 

신풍리는 조선시대 향리들이 거주했던 마을로 많은 유학자와 유생들을 배출했다. 이런 영향으로 주민들의 교육열도 높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 향교 설립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신식교육을 하기 위한 신풍학당이 설립되기도 했다.

1909년 정의현 성읍리에 정의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자 각 마을에 서당을 금했기 때문에 서당문을 닫기도 하였으나, 1925년 가시리에 가서 좋은 재목을 사다가 현재의 이사무소 자리에 향사를 지어 서당으로도 썼다. 청봉 오주언(吳周彦)을 사장(師長)으로 삼고 책접의 책을 교재로 하여 향사에 서당을 열었다.

1927년 4월 학교 운동회장에 고기잡는 왜인들이 난입하여 무인지경으로 방자하였다. 이 때 고은삼(온평리) 등 화가 난 청년들이 몽둥이로 때려 물리쳤다. 이것이 잘못되어 왜인 2명이 죽었다. 이에 가담한 오주언이 투옥되어 마을에서 구명운동을 펴기도 하였다. 오주언은 마을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1936년 재일동포 오천년씨가 나라를 찾으려면 후진을 교육시켜 동량(棟樑)을 기르는 길밖에 없다며 4000원을 내놓아 개량서당을 건립하였다.

그는 귀향하여 부모님께 “에쓰게 농사를 지어도 반 이상을 세금과 공출로 빼앗기고 제사상을 차릴 곡식도 남지 않는 것은 나라가 없기 때문이며 나라를 찾는 길은 오직 후진을 교육시켜 동량을 길러 일본에 항거하여 나라를 찾는 길밖에 없습니다”라고 설득하여 자신이 가지고 온 돈과 사채 4,000원(당시 1,000원이면 상토 1만평을 살 수 있었다고 함)으로 신풍학당을 설립하고 강사를 초빙하여 신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오주언이 감옥에서 풀려나온 후 1936년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을 알아야 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일깨워 개량서당인 신풍학당을 설립하여 신구학문을 겸하여 가르쳤다.

오천년씨는 더 넓은 학교 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일하였으나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서당 이름을 신풍서당(新豊書堂)이라 하고 훈장실은 좋은 풍속을 심는 방이라는 뜻으로 수풍헌(樹風軒)이라 하였다.

훈장은 김정옥, 오승국, 김문평으로 이어져 오다가 광복 후 학교 인가를 받지 못하여 문을 닫았다. 김중보·오성남·오임국·오승국·김병조 등이 신풍서당에서 학업을 익혔다.(2006, 냇가의 풍년마을)

마을회관 입구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吳千年義捐紀念碑)가 있다. 서당 설립 당시에 처음 세운 것을 광복 후인 1959년에 일본식 이름을 지우고 다시 세운 것이다. 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平生所志 克誠克篤 特捐巨額 俾我獎學 賴此厚恩 幼稚活躍 不朽其功 千秋片石(평생동안 가진 뜻은 진실로 성실하고 돈독하여 특별히 거액을 내놓아 우리들의 배움을 장려하였네. 이 두터운 은혜에 힘입어 어린이들이 활약하게 되었으니 썩지 않을 그 공적을 돌에 새겨 길이 전하도다.)
《작성 17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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