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연재) 벽랑공주는 왜 탐라에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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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연재) 벽랑공주는 왜 탐라에 왔을까?
  • 이문호
  • 승인 2023.08.15 15:5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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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호 전북대 공과대학 전자공학부 초빙교수

 

제주도가 탄생한 역사적 비밀을 풀고자 제주도를 집중연구하고 있는 이문호 전북대 초빙교수가 최근  (사)국제문화기술진흥원을 통해 제주관련 논문 2편을 발표했다. 이문호 교수는 '벽랑공주는 왜 탐라에 왔을까?' 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제주도 탄생설화에 등장하는 고양부 삼신인은 인도에서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등신물과 좋은 물을 찾아 나선 부처의 제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본지는 이문호 교수가 발표한 이 논문을 긴급입수, 이를 전문 게재하기로 했다. 제주도 탄생설화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편집자주)

 

 

벽랑공주는 왜 탐라에 왔을까?

 

요 약

()의 신()인 발타라(跋陀羅, Bhadra: 인도 북부지방 탐몰라주(耽沒羅洲: ‘자와 자가 탈락되면서耽羅’)존자가 BC 563-483년경에 900명의 아라한(弟子)과 같이 탐라(BC483-AD1105 고려 숙종 때 탐라 왕국이 고려에 한군현이 됨)에 왔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물(神聖性, Heiligkeit, 4대 원소인 물, , 공기, 흙의 하나)을 통한 불교의 전파와 세계에서 가장 큰 나한(한라는 나한이란 뜻: 拏漢:漢拏 한라산의 한라의 역, 부록: 전주 황방산 서고사(西固寺) 나한전)의 돌() 등신불(等身佛)을 찾기 위해서다.

옛부터 제주 사람들은 남녘에서 불어오는 태풍 등을 한라산이 막아준다고 진산(鎭山Truth Mt.)이라고 부르는데, 성불(成佛)한 거대한 나한이 한라산 화산 폭발시에 불()에 의해 백록담 바위의 등신불로 굳어버린 모양새다.

오늘 날 제주에서 발타라존자의 가장 큰 숨결은 올레길 1번 성산포 시흥리(始興里)에서 26번 구좌면 종달리(終達里) 길이다. 바로 천부경(天符經)의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은 끝이고(始卽終), 끝이 시작(終卽始)”을 타원형 제주 (道路Way)”에서 확실히 보여준다.

 

 

Ⅰ. 서 론 : 선사시대 탐라의 역사

역사 기록 이전의 제주의 先史 역사를 보면, 언제부터 제주에 사람이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김봉옥의 제주 통사에 기록을 요약했다.

① 1979년 제주대 박물과 애월읍 광령리 조개무지 발굴. 기원전 4세기 갈색 무늬 토기 발굴.

② 1985년 대정읍 상모리 선사 유적 공열토기(孔列土器) 발견.

③ 1986년 조천읍 북촌 토기, 골각기(骨角器) 발견.

④ 1988년 한경면 고산리 큰 사발 발견, 1994년 가는 돌칼 6천여 점 발굴로 기원전 8000년 전후 신석기 시대 초기로 상당한 문화 수준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

⑤ 1997년 제주시 삼양동 원형수혈 주거지 유적 발견, 제주시 삼성혈 혈거지 및 삼사석비(三射石碑) 발견,삼양동은 3을나의 집단 적거지, 화복리에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의 화살을 쏜 삼사석비가 있다.

고양부의 삼사석비와 탐라국발상지비

 

제주의 옛 이름을 보면, 신라 27대 선덕여왕(632-647) 황룡사 9층 석탑 4층에 탁라(乇羅) 새겨져 있고 제주 탐라의 옛 이름으로 고려사 지리지에 보면 1105년(숙종 10년) 탐라를 탐라군으로 개칭했다.

1295년 충렬왕 21년에 탐라를 제주(齊州)로 고쳐 목사와 판관을 두었다. 고려 대장경 법주기 탐모라주(耽沒羅洲) 인도어에 비롯됨을 밝혀졌다.

불교가 전해져온 성지로 구전에 의하면 절 오백 당 오백(寺五百 堂五百)이란 말이 있고 한라산 영실 불래악(佛來岳: 속칭 볼레오름)에 존자암(尊者庵)이 있다.

볼레오름(보리수:석가모니가 인도의 보리수 밑에서 도를 깨달은 나무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다. 영실(靈室)은 영수리(靈鷲)가 원음이고 5백 나한으로 둘러싸여 있다.

1488년-1506년까지 제주에 귀향 온 홍유손(洪裕孫 1431-1529) 남긴 글에 존자암에 대한 글이 있는데 존자암은 삼성(三姓: 고을나[髙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이 처음 일어날 때 비로소 만들어졌고 3읍(三邑: 제주목[濟州牧] 정의현[旌義縣] 대정현[大靜縣])이 정립된 뒤까지 오래 정해졌다.

한가지 유의할 것은 성산포 혼인지에서 벽랑공주와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결혼한 것으로 봐서 인도에서 발타라존자와 같이 온 일행으로 추정하며 그때 오곡 씨앗과 소, 말, 돼지 등 짐승도 같이 싣고 왔다.

1601년 김상헌(金尙憲 1570-1652) 남사록에 존자암기가 나오고 1918년 이능화(李能和 1868-1945) 조선불교 통사에 보면 발타라존자 권속 9백 아라한(阿羅漢; 불법을 닦아 세상 사람들에게 공양을 받을 만한 공덕을 갖춘 사람)과 더불어 탐 몰람주(탐라)에 나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법주기에는 발타라존자가 석가가 돌아가신 뒤 기원전 540년 전후 9백의 아라한이 탐라에 나눠 살았다. 이때는 2540년 전이다. 이는 옛 삼한(三韓) 시대이며 중국 춘추시대다. 근거는 제주 마을마다 절왓(寺田) 또는 절터왓(寺地田) 땅이름이 있고 그곳에 기와 조각이 나온다.

서광서리 넙게오름의 정상에 물통 근처에서도 기와장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탐라국이나 고려 시대부터 절을 지은 흔적인 절왓으로 추정되어 오랜 세월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고촌(古村)으로 보아 진다. 존자암 터는 불래악(佛來岳)의 중턱 해발 1200m 지점에 있다.

한라산 등신불(1950m)은 오늘도 바람을 막아(Wind Castle)주면서 하늘에 빗줄기를 바람에 태워 제주 산하에 골고루 뿌려주고 있다. 장엄한 한라등신불을 산방산과 가파도에서 보면, 절로 고개 숙여진다. 태풍이 불 때는 부딪치는 바람에 의해 등신불은 소리 내어 운다.

제주의 지정학적 (地政學Geopolitical) 위치로 BC200년경에는 중국 진시황제가 불노초(不老草)를 캐러 500여명이 성산포 인근인 서귀포에 들렸고 정방 폭포벽에 서씨과차(徐市過此) 글귀를 남겼다.

발타라존자가 찾았던 세계에서 가장 좋은 물은 1998년에 제주도민에 의해 화산 암반수인 삼다수를 찾았다. 또 한라산 정남향 산남(山南) 모슬포에서 한라산(1950m)을 봤을 때, 368개의 오름인 큰 나한(羅漢)들이 백록담 등신불 주위를 호위(護衛)한다.

겨울철 북쪽에서 오는 시베리아 찬바람이 백록담등신불의 돈내코 세로 300m 가로 260m암벽을 넘으면, 찬바람이 온풍으로 바꿔지고 그바람은 제귀지풍(濟歸之風)이 되어 서귀포,중문 등이 겨울철 기온이 2-3도가 상승한다.

반면 여름철 서귀포 바다에서 불어오는 남풍이 한라산 백록담을 넘고 99골(谷)계곡을 지나는 귀제지풍(歸濟之風)일 때는 제주시는 무더위가 푹푹 찐다. 원인은 돈내코 같은 암벽이 없기 때문이다.

발타라존자 일행의 뗏목배는 타원형 탐라의 동쪽 끝이 뾰족하게 나온 성산포 섭지코지(곶串Cape)에 쿠루시오 해류가 부딪치면서 닻을 내렸다. 혼인지에서 발타라존자의 3을나가 바로 결혼을 해 굴(窟)속에서 신혼생활에 들어간다.

발타라존자의 900명의 아라한들이 성산 포 섭지코지(제주에서는 ‘지혜가 많은 사람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어원은 지혜의 신 頭陀第一마하가섭(摩訶迦葉 섭은 나뭇잎 엽)의 이름 섭(葉)자와 지혜의 지(智), 코지는 곳(Place)이 합성어인 ‘섭지코지’로 추정되며 발타라존자 일행이 상륙한 곳이란 뜻으로 저자는 풀이한다.

신양리 마을지에서는 俠地가 구개음화하여 섭지로 뜻은 의협심 인재의 땅으로 풀이)에 상륙했고 혼인지의 동굴에서 신혼방을 꾸렸다. 성산포시흥, 혼인지, 온평리-구좌 종달 리가 고양부3을나의 탐라 정착 초기 집성촌, 현재, 초기집성촌을 중심으로 한라산 산북 방향중산간로 1136을 타고 도보로 4시간이면 조천삼양의 3을나의 Head Quarter 집성촌에 도착하고, 반대로 한라산 산남은 1119를 타고 5-6시간이면 서귀-중문에 도착한다.

성산포 인근 우도(牛島)는 소머리섬, 불가에서는 진리의 상징, 바다에 심우도 (尋牛圖)를 그려놓은 게 우도, 소는 우직, 성실, 온순하고 끈질긴 성격으로 농경 중심사회에서 동력 수단으로 밭을 갈았다. 영어의 알파베A 자도 소의 머리 형태에서 나왔다. 모슬포 앞바다에 가파도는 부처의 가피(加被) 입고, 마라도의 마라는 번뇌(煩惱)를 께라는 은유적으로 쓴 가파도-마라도 이름을 작명한게 아닌가 추정한다.

본 논문은 저자가 쓴 제주의 門 수정판 2024년 발간예정을 기본으로 했다. 또한, 이문호의 제주의 문을 참조했다.

본 논문의 구성은 1장 서론에서 기록 이전의 제주의 先史 역사, 2장에서는. 쿠루시오 해류(黑潮, Kuroshio current 해류=벽랑(碧浪)공주, 수로만리의 거센 파도를 ‘공주(公主)’로 의인화( 擬人化), 3장에서는 벽랑공주, 4장에서는 발타라존자 아라한 3을나의 점성술을 이용한 항해술과 집성촌의 설계, 5장은 결론이다. 부록은 한라산 어원해석이 첨부된다.

 

Ⅱ. 쿠루시오 해류 (黑潮,Kuroshiocurrent해류=벽랑(碧浪)공주), 수로만리의 거센파도를 ‘공주(公主)’로 의인화(擬人化)

 

발타라존자는 인도 뱅갈만-인도양에서 쿠루시오(黑潮,Kuroshiocurrent)해류를 타고 필리핀-일본해-탐라탐라 성산포 온평리 혼인지에 왔다.

온평리 입구에는 마을을 지키는 영등 할망상이 있는데, 영등 서북풍 바람이 1월에 우도(牛島)로 들어와 봄의 풍요를 곳곳에 주고 다니다가 2월 초 한림 귀덕리 포구에서 태평양 바다로 나간다.

관련 일화는 바다에서 고깃배가가 난파됐는데 영등 하르방을 만나 “관세음보살”을 계속 암송하면 고향으로 갈 수 있다고 했고 마침내, 고향에 당도하였고 이 말이 소문이나 어촌에서는 송구신영(送舊新迎) 영등굿을 해마다 하며 쪽배에 액(厄)을 테워 바다에 띄운다.

또한, 제주에는 “당(堂) 5백 절 (寺)5백” 이란 말이 있다. 신의 18,000있다고 하여 “신(神)의 고장”이고, 절(寺)의 각 마을마다 있다고 하여 “절(寺)의 고장에서” 나온 말인데, 절을 지었던 자리인 절왓(田)은 오늘날 그대로 전해지며 기왓장 등이 발굴되고 있다.

쿠류수오해류(벽랑공주)

 

쿠루시오 해류는 북태평양 중위도 아열대 순환의 서안 경계류로서, 북적도 해류의 일부가 필리핀 동쪽해역과 동중국해를 지나 일본 남쪽으로 북상한 후 북위 36° 부근에서 동쪽으로 흘러가 북태평양해류와 연결되는 해류이다.

쿠로시오란 일본어로 흑조(黑潮), 영어로는Kuroshio라고 하며, 해수의 색이 암흑색으로 보이는 것에서 유래했다. 난류인 쿠로시오 해류는 영양염과 식물성 플랑크톤, 혼탁물이 적어 바닷물이 매우 맑기 때문에 태양 빛 중 청남색을 많이 투과시켜 검게 보이는 것이다.

일본의 남쪽에서 쿠로시오해류는 폭이 약 100km이며, 해수면의 수위가 연안 쪽에 비해 외해(外海) 쪽이 약 1m 높다. 해류의 흐름은 사행(蛇行) 또는 직진(直進)하며 계속 변동하고, 최대 유속은 약 2.0∼2.5 m/s로 매우 빠르다.

사행하는 쿠로시오의 주변에는 다수의 난수성 또는 냉수성 소용돌이(eddy)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발타라존자 일행 900명은 인도 북부 뱅갈만 을지나 인도양-필리핀–쿠류시오를 타서 일본해를 지나면 성산포 섭지코지(곶串)인 온평 포구에 닿는다.

인도와 탐라 하늘길은 5-6천Km, 비행기로 약 8시간, 해류는 돌고 돌아오기 때문에 약 1만 km, 보름 이상 뗏목배가 걸릴것으로 보아 진다.

제주해를 돈 쿠류시오해류는 남해 진도항의 울돌목을 거치고 황해로 올라타 백령도와 장산곶(長山串)에 인당수(印塘水)를 거친다. 바로 이순신 장군의 명랑대첩과 심청이 이야기가 있다.

 

1. 이순신 장군 명량대첩의 울돌목

조선조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명량(울돌목 鬱陶項: 전라남도 진도와 육지 사이의 해협)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이 명량해협[鳴梁海峽],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반도(花源半島)와 진도(珍島)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우리나라에서 조류(潮流)가 가장 빠른 곳으로 유명한데, 지형적으로 폭이 좁은 데다가 수심이 얕아 조류가 이곳을 지나면서 물살이 빨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조수간만의 차가 큰 편으로, 밀물과 썰물에 의한 바닷물의 이동이 많은 것도 이곳의 물살이 빠른 요인이 된다. 해협 중 폭이 가장 좁은 곳은 약 300m 정도이며, 유속은 수심 전반에 걸쳐 평균 5.5m/s,바다 표층은 최대 6.5m/s에 달한다.

특히 조차가 가장 큰사리(대조,大潮) 때 가장 빠르다. 좁은 지형에 대량의 물이 지나면서 소용돌이가 일어나기도 하며, 물살로 인한 소리가 매우 큰 것이 특징인데, 예로부터 바위가 우는 것 같다는 의미로 '울돌목'이라 불렸고,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명량(鳴梁)'이다.(출처: doopedia.co.kr)

명량 해협의 해저 지형 단면도

 

명량해협은 임진왜란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 함대를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이 해전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던 배경은 조류가 빠른 명량해협의 지리적 요건을 이용한 데 있었다.쿠류수오 해류의 급한 물살이 불후의 이순신 장군을 낳았다.

 

2. 심청이 이야기

아버지 심봉사 눈을 뜨게하기 위해 공양미 3백석에 팔려 제물이 되는 곳이 인당수(印塘水), 경기도 백령도(백령도에는 심청이 사당이 있다 [그림 4])와 장산곶(串) 사이 물길이 세기로 유명하다.(출처: https://blog.naver.com/ttpp2002/221095900554)

백령도 심청각과 심청이

 

이 바닷물 해류도 쿠로시오 해류다. 15세 이하 동정녀 처녀를 공양(供養)하면서 건너는 바다.

 

(다음 호에 연재 계속 됩니다)

 

이문호 교수 프로필

이문호

 

출생 1945. 1. 15. 제주특별자치도
소속 전북대학교(초빙교수)
 
학력 및 경력
 

학력 :1990 일본동경대 정보통신 공박,

       1980 전남대전기과 공박,

       1985 미국미네소타대전기과포스트닥,

       1972-1980, 남양MBC 송신소장,

       1980-2018,8 전북대  전자과 교수,통신기술사 현재 초빙교수

 

수상
2015년 미래창조과학부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
2013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상 학술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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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23-10-11 03:48:59
@ 제주도에 관한 깊은 역사와 설화를 접하게 되어 고맙습니다. 관광 여행으로 제주도에 여러번 갔었다. 그냥 새로운 남녘의 기후 생태가 육지와 달라 휴양지로 많이 가는 섬으로만 알았었다. 웬지 이국적인 구경거리에 가는 곳마다 유서깊은 의미가 스며 있는 것을 수박겉핤기 정도로 스치곤 했다. 제주에 근무하면서 그곳의 여러정보와 구석의 이모저모를 접했었다. 특히 학술적이고 토속적인 요소가 가미된 주요한 내용을 교수님의 다양한 게재물을 통해서 많이 아주 세밀히 알게 되었다. 이번에 제주도에 관한 현실적이고 기록적인 내용을 쉽게 풀어 설명한 논문을 올려주셔서 감사하다. 누구나 시간의 흐름속에 정신은 무뎌간다. 육지로 떠나와 있어 흐릿해지는 제주의 기억을 새로운 각도로 담금질해주는 계기가 된다.

선인장 2023-10-11 03:47:11
@ 제주도에 관한 깊은 역사와 설화를 접하게 되어 고맙습니다. 관광 여행으로 제주도에 여러번 갔었다. 그냥 새로운 남녘의 기후 생태가 육지와 달라 휴양지로 많이 가는 섬으로만 알았었다. 웬지 이국적인 구경거리에 가는 곳마다 유서깊은 의미가 스며 있는 것을 수박겉핤기 정도로 스치곤 했다. 제주에 근무하면서 그곳의 여러정보와 구석의 이모저모를 접했었다. 특히 학술적이고 토속적인 요소가 가미된 주요한 내용을 교수님의 다양한 게재물을 통해서 많이 아주 세밀히 알게 되었다. 이번에 제주도에 관한 현실적이고 기록적인 내용을 쉽게 풀어 설명한 논문을 올려주셔서 감사하다. 누구나 시간의 흐름속에 정신은 무뎌간다. 육지로 떠나와 있어 흐릿해지는 제주의 기억을 새로운 각도로 담금질해주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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