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연재) 벽랑공주는 왜 탐라에 왔을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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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연재) 벽랑공주는 왜 탐라에 왔을까?(2)
  • 이문호
  • 승인 2023.08.17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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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호 전북대 공과대학 전자공학부 초빙교수

 

제주도가 탄생한 역사적 비밀을 풀고자 제주도를 집중연구하고 있는 이문호 전북대 초빙교수가 최근  (사)국제문화기술진흥원을 통해 제주관련 논문 2편을 발표했다. 이문호 교수는 '벽랑공주는 왜 탐라에 왔을까?' 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제주도 탄생설화에 등장하는 고양부 삼신인은 인도에서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등신물과 좋은 물을 찾아 나선 부처의 제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본지는 이문호 교수가 발표한 이 논문을 긴급입수, 이를 전문 게재하기로 했다. 제주도 탄생설화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편집자주)

 

(전 호에  이어서 계속)

 

Ⅲ. 벽랑공주

 

발타라존자 일행은 오곡씨앗과 소, 말, 돼지 짐승들과 같은 것들을 뗏목 배에 실어 인도에서 탐라까지 바다 길 약 1만 Km을 건넌다. 그 바다 길은 ‘수로만리(水路萬里)’. 전설에 의하면 벽랑공주는 벽랑나라의 공주인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유인즉, 거친 파도길(벽랑(碧浪))인 쿠로시오 해류를 헤치고 나오기 위해 파도가 잔잔해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되어 쿠로시오 해류를 “아름다운 공주”로 의인화한 이름이 “벽랑공주”로 추정된다.

거친 파도가 잔잔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동정녀를 바다에 공양하는 심청이에서 보듯, 고대(古代)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액(厄)을 막기 위해 인신공양(人身供養) 풍속이 있었다.

또한, 동정녀 처녀 3명도 900명 아라한들과 같이 동행했다. 아라한 900명이 지도자 고, 양, 부 세 사람의 세그룹 Leader, 각각 세 그룹은 고을나(300명), 양을나(300명), 부을나(300명)이 뗏목 배를 타고와 혼인지(婚姻地성산포)에서 결혼했다.

혼인지는 연못옆 들판, 발타라존자가 물의 신(神), 연못옆에 결혼식장을 꾸린 것은 당연한 일. 그 후 한라산과 가까운 평야 들판인 삼양(三陽)에 고을나, 삼양 인근 도련(道連)에 양을나 집단 촌락을 형성하고 움집(몽고에 유목민 집과 비슷하지만 집 입구에 정낭 설치, 竪穴住居(수혈주거로 반지하 가옥. 원형 또는 사각형으로 땅을 파고 둘레에 기둥을 세워 이엉을 덮어 만들었다.

바닥은 대개 진흙을 깔고 움집 안에는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을 설치했다. 날이 갈수록 움집은 지상 가옥에 가까워지며 화로나 저장 구덩이는 밖으로 돌출시킨 감실(龕室)에 설치됐다. 겨울 양식인 고구마저장 땅속 구덩이를 파서 저장했다.

60-70년대 까지만 해도 제주 웃드르(上野) 중산간 농촌에서 사용되었다)에 살았으며, 부을나는 삼양에 가까운 조천에 대흘(大屹) 와흘(臥屹) 선흘(善屹)이라는 곳에 살았다. 또 한, 인근 화북리(禾北里)에서 화살을 쏘아(삼사석三射石) 거주지를 정하였다.

그 방법은 화살이 멀리 나간 사람이 제일 큰 형이고 그다음 멀리 나간 순서로 거주지를 정했다. 한라산 영실에 수도사(修道寺), 각마을에 포교사(布敎寺)를 설치했다. 삼양리위 마을인 회천(回泉)리에도 고,양,을나제2에 집성촌이 형성됐다. 삼성혈 (三姓穴)에는 고,양,부 3姓 제단(祭壇)을 쌓아 모셨다.

 

Ⅳ. 발타라존자 아라한 3을나의 점성술을 이용한 항해술과 집성촌의 설계

강문규 한라산 생태문화유산연구소장의 발표에 의하면, 3을나의 집성촌 설계를 별자리를 보고 집성촌을 나눴다고 했다[8]. 고대 인도와 중국은 점성술문화(Astrology Culture)가 발전되었는데, 발타라존자 일행도 쿠루시오 해류 약 1만 Km를 항해해 올 때도 하늘에 북두칠성 별자리를 보면서 탐라를 찾았다,

탐라시대 전기에 취락이 형성된 안덕면 화순리 안덕계곡 하류지역인 남부화력발전소 상단 일대에는 고인돌과 바위에 새긴 북두칠성 별자리가 잘 남아 있다.

별자리를 이용한 집성촌 설계는,제주시 일도동(지금의 칠성로 일대(북두칠성의 자루 부분인 별 세 자리가 있는 지역)은 삼을나의 맏형이, 이도동과 삼도동은 밑에 동생 둘이 주걱 부분의 4개 별자리를 두개씩 차지하고 있는 형태로 나눠 살았다.

칠성로 끝에는 바다 해변 밑에서 산지천이 솟아나는 곳으로 집거지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고 이도동은 가락코천, 삼도동은 병문천을 끼고 있다.

성산포 집성촌이경우도 북두칠성 별자리(자루3, 주걱4)가 마을 형태로 투시됐는데, 제1 집성촌은 섭지코지(1)-혼인지(2)-온평리(3)-성산일출봉(4)-성산시흥리(5)-구좌종달리(6)-우도(7)이고 제2 집성촌은 화북(1)-삼양(2)-도련(3)-조천(4)-봉개(5)-대흘(6)-명도암(7)으로 1234567 별자리 순으로 마을이 조성돼 있다.

한편, 제주도 마을에 초가집의 안채와 바깥채도 북두칠성의 “자루와 주걱”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바람길을 터주며 안과 바깥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북두칠성을 밥이나 국을 뜨는 “주걱( Rice Paddle)과 자루(Sack)”를 연상한데 비해 서양에서는 큰곰(Brown Bear)의 모습이나 밭을 가는 삽(Shovel)과 같은 기구를 상징했다.

탐라의 북두칠성에 관한 자료는 1530년 (중종 25) 이행(李荇) 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된 ‘칠성도(七星圖)’ 기사가 최초의 기록이다.

「칠성도: 주성 안에 있다. 돌로 쌓은 옛터가 있다. 삼성이 처음 나와서 삼도를 나누어 차지하고 북두칠성 모양을 본떠 대를 쌓아 나누어 살았다.

그 때문에 칠성도라 부른다(七星圖=在州城內石築有遺址三姓初出分占三徒倣北斗形築臺分據之因名七星圖) 이후 등장하는 사료들은 대부분『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을 정도로 사료로서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위 기록을 시작으로 탐라도의 북두칠성에 대한 자료는, 임제의『남명소승』(1577), 홍천경의「결승정상량문」(1599), 김상헌의 『남사록』(1601), 이원진의 『탐라지』(1653), 이형상의 삼성묘상량문」(1702), 18세기 초로 추정되는 「제주읍성도」, 김정의 「수축월대칠성도」 (1737), 신광수의 『탐라록』(1764), 이원조의 『탐라지초본』(1843), 19세기 전후한 시기로 추정되는 홍종시의「제주 성내고적도」(1979), 김석익의「파한록」(『심재집』,1923), 「매일신보 기사 및 사진」(1926.5.11일), 담수계의 『증보탐라지』(1954)가 시대별로 존재하고 있다고 강문규선생은 말하고 있다.

 

Ⅴ. 결 론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타원형 탐라지도에서 보듯, 동쪽 끝 성산포 시흥리(始興里)가 올레길 1번에서 출발하고 돌고 돌아 시흥리 왼쪽 끝마을 인 구좌 지미봉(地尾峰) 종달리(終達里)가 26번 종점이다.

제주도 지도, 은평포구

 

 

시흥리와 종달리가 거의 붙어있어 출발점과 종점이 같다.

천부경(天符經)의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은 끝이고(始卽終), 끝이 시작(終卽始)”. 즉 올레길 1번인 성산 일출봉(日出峯) 시흥(始興)에서 시계방향으로 출발해서 올레길 7번 서귀포와 성산포에서 반시계방향으로 출발해서 종달리를 지나 올레길 16번 애월 고내까지 고,양,부을나의 집성촌 들이 듬성 듬성 산포 되었는데 특징은 짐승사냥과 나무 열매 채취, 바닷가 미역채취, 고기잡이를 하면서도 식량을 더 해결할 수 있는 농사를 짓기 위한 들판과 마실 물을 찾았고 물가 근처를 끼는 곳에 집성촌이 들어섰다.

성산포 혼인지

 

특이한 곳이 모슬포 인근 서광서리는 고을나의 집성촌, 남송이오름(해발 340m)과 넙게(Crab)오름이 동네를 받치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들짐승이 많이 살고 독수리도 많았던 유명 사냥터. 넙게오름 8부정상에 분화구인 굼부리(火口)가 있고 굼부리에 고을나가 살았다고 추정되는데, “흙비 내리니 장독대 두껑 닫으라” 란 전설이 내려온다.

남송이오름이 원래 이름은 “나르는 수리(비취飛鷲 Flying Eagle).”이고 곶자왈(수藪)에, 오설록 녹차밭, 영어교육도시, 신화공원이 들어선 제주 제일의 신도시다. 독수리 둥지(‘텅애’ 제주사투리)는 남송이오름 앞 ‘생기(生氣)’ 동산물에 있다.

인도에서 탐라까지 수로 만리길을 건너온 발타라존자에 의해서 각 마을에 인도 풍속이 전래 됐다.

예를들어 집 올레에 세 개의 정낭(錠木 Gate) 오늘날 스마트폰 010 원리와 DNA 유전자 코드 원리, 돗통시(변소), 쇠똥을 말려 땔감으로 사용, 장(葬)났을 때, 대나무를 쪼개서 돼지고기를 꿴 적(인도인은 숟갈 없이 멘손 가락으로 식사에서 비롯됨) 등이다.

현재 제주에 고씨 집성촌은 한경면 고산리, 안덕서광리, 구좌한동리, 조천리이고 양씨는 애월 상가리, 남원 신예리이며 부씨는 구좌 하도리 등 성산포를 중심으로 촌락이 형성됐다.

Sea Silk Road의 불교 전래 연대는 855년 전으로 본다. 발타라존자가 BC 563-483년 사이에 탐라에 온 시점에다 우리나라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에 불교가 전래 됐으니, 372+483년=855년으로 추정된다. 855년 년대는 추후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

 

부록: 한라산 漢拏山 (漢 한수 한 拏 붙잡을 나(라) 山 메 산!950m) 어원해석

제주도(濟州道) 중앙(中央)의 주봉. 산 위에는 둘레 3km, 지름 500m의 대(大) 분화구(噴火口)였던 백록담(白鹿潭)이 있고, 산허리에서 산기슭에 걸쳐서 368 개의 측화산(側火山) 오름이 있다.

화산체(火山體)는 주(主)로 제3기 말에서 4기 초의 암류와 그 후의 현무암(玄武巖)으로 이루어졌으며, 1002년과 1007년에 분화(噴火)하여 많은 용암(鎔巖ㆍ熔巖)을 분출(噴出)시켰는데 지금은 휴화산(休火山)이다.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치며, 북쪽 기슭에 있는 삼성혈(三姓穴)은 도민(道民)의 창조(創祖)인 세 신인(神人)이 용출한 곳으로 유명(有名)하다.

참나무ㆍ산벚나무ㆍ단풍나무(丹楓--) 등(等)의 모목을 비롯하여, 삼대(三帶)의 식물(植物)이 울창하다. 학술(學術) 연구(硏究) 자료(資料)의 수집(蒐集) 장소(場所)이다.

박용후의 제주도 옛땅 이름 연구(1992년,제주문화)에 의하면, 漢拏의 한(漢)은 은한(銀漢: 은하수)를 말하고 나(拏)는 끌거나 손으로 잡는다는 뜻으로 은하수를 끌어 잡을 수 있다는 뜻으로 산이 높은 것을 뜻한다로 알고 있다.

사실은 그게 아니고 한라(漢拏)는 거꾸로 읽으면 라한(拏漢:일체번뇌를 끊고 께달음을 얻어 중생의 공양에 응할만한 불교의 성자:Arhat, 참조 1. 전주 황방산 서고사(黃尨山·西固寺)(십육나한 중 제3존자 가낙가발리타사(迦諾迦跋釐惰闍), 제5존자 낙거라(諾距羅), 제7존자 가리가(迦理迦), 제14존자 벌나파사(伐那婆斯), 제16존자 주다반탁가(注茶半託迦 다섯나한의 탱화 나한전(拏漢殿), 뜻은 ‘물을 찾아라’이다. 중산간 마을에 물이 귀했다.

마을마다 봉천수(奉天水, 돌 위에 빗물을 받아 모아 식수로 사용)를 마셨다.  서울 북한산 삼천사 나한전을 보인다.

 

전주 서고사 나한전 (사진 제공 이순종박사, 통신, 기계안전 기술사)

 

 서울 북한산 나한전

 

 

또한, 영실 기암과 오백 나한(靈室奇巖 五百羅漢)도 한라산 라한 등신불을 받들고 있다. 한라산 정상의 서남쪽 기슭에 해발 1,600여m의 위치에서 아래로 약 250m의 수직 암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영실에 있는 기암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곳이 영실기암이다.

나한(羅漢)은 바위에 나한, 나한(拏漢)은 사람 또는 의인화(擬人化)일 경우에 사용되는 말로 영실 기암과 오백 나한과 한라산의 나한(拏漢)을 들 수 있다.

'한라산'은'물을 찾으라'한 경귀.중산간에사는탐라백성들은 동산위 땅 속 수평 현무암 돌판위에 봉천수를 팠다.

소위 '동산물 봉천수'로 발타라존자 가르침에 응답,중산간에 모자란물문제를 해결했다. 오늘 날은 '삼다수' 청정수 로 수도물이 '콸콸' 나온다.

 

감사의 말씀:

본 논문에 연구에 motive를 주신 고(故) 李甲富 선친께 이 논문을 올립니다.

밤낮으로 눈만 뜨면 ‘하늘 천(天) 따지(地) 가물 현(玄) 누를 황(黃), 한 일, 두 이, 석 삼’을 외우다 3년전 95세에 돌아 가셨다. “큰 아들아, 이 말이 뭣 고?.” 나는 대답을 못했다.

그 뜻을 이 논고를 다 쓰고 나서 추고 과정에서야 알았다. 작은 오름이 368개, 마지막 한라산도 큰 오름, 합하면 369개라는 말을 오름 속 오름, 제주 오름은 한라산 포함 369=3(한1+두2+석3): 10의2승 10의1승, 10의0승, 이 Base.” 2,3은 소수(Prime Number). 한라산에 오름수(數)를 감춰 놓았다.

또 오름속은 반야심경이 뜻이 내포돼있다. 상즉불이(相卽不二)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인 반야심경 경구이다.

이유인즉 육신(1/2)과 정신(1/2)은 하나, 서로 합해지면 하나다. 오름도 제주 등고선 땅위에 오름의 반이 있고 땅속에 반이 있다. 368개의 오름인 큰 나한(羅漢)들이 한라산 백록담 등신불을 가운데 두고 호위(護衛)하고 있다.

본 논문에 많은 자문을 해 주신 이순종 박사(통신, 기계안전) 기술사님께 감사드립니다.(완)

 

 

이문호 교수 프로필

이문호

 

출생 1945. 1. 15. 제주특별자치도
소속 전북대학교(초빙교수)
 
학력 및 경력
 

학력 :1990 일본동경대 정보통신 공박,

       1980 전남대전기과 공박,

       1985 미국미네소타대전기과포스트닥,

       1972-1980, 남양MBC 송신소장,

       1980-2018,8 전북대  전자과 교수,통신기술사 현재 초빙교수

 

수상
2015년 미래창조과학부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
2013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상 학술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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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23-10-12 02:32:13
@ 이 논문으로 제주도의 이면을 알게되어 뿌듯하다. 끈기와 부지런함의 대명사로 불릴만한 통찰력에 탄복한다. 읽는 이에게 신토불이, 애향정신의 중요성을 느끼게 한다. 향토 예비군 정신이 솟구치기도하다. 우리나라 관광지 대표지 제주도, 역시 그 고장 사람의 부단한 노력으로 가꿔진 곳이다.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소질과 취미를 접목한 신토불이 정신이 멋지다. 한 시대의 역사를 꾸려가는 소중한 사료를 연구 발굴 개발하는 열정에 찬사를 아까지 않는다. 요소요소에서 협력 작품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한라산의 힘이라고 본다. 제주에서 수없이 많이 접한 고.양.부 성씨며, 사투리라고 썼던 고유어들, 천혜의 자연자원이 머릿속에 전광석화 처럼 스친다. 논문소개 내용의 곳곳이 그간 쌓인기억을 업그레이드하는 알찬 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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