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전 마을 주민이 밥을 싸고 나와 축성..신흥리 탑알성창(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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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전 마을 주민이 밥을 싸고 나와 축성..신흥리 탑알성창(포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9.08 0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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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알성창은 신흥리 1-1번지 앞에 축조됐었으나 북쪽으로 현대식 방파제가 만들어졌다.

신흥리 탑알성창(포구)

위치 ; 조천읍 신흥리 1-1번지 옆 바닷가
시대 ; 조선(1897)
유형 ; 어로시설(포구)

신흥리_탑알성창흔적

 

신흥리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정유년(1897) 봄 3월에 함덕리 잠수들이 짝지어 섬여(剡嶼, 섬여의 차자 표기. 백모살동네(소금밭동네) 북쪽에 있는 첫섬여․샛섬여․막섬여를 이른다) 바다에 와서 미역을 몰래 채취하므로 동민들이 모여들어 미역 채취 기구를 빼앗았다.

이에 함덕과 우리 동네가 분쟁이 되어 서로 소장(訴狀)을 올리게 되었으니 고포동의 수창(首唱)은 통정 김근암 공이고 함덕리 수창은 한말득씨였다.

이에 목사 이병휘씨가 화평을 주창하니 옛개동네에서 말하기를 “우리 동네는 해변이 아주 가까워서 해마다 해수가 가옥을 침범하여 곤란이 막심하오니 성창을 쌓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이 성창을 함덕리로 하여금 쌓게 하여 주실 것을 엎드려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사또가 함덕리 주민에게 “불일내로 옛개동네 성창을 쌓아 주도록 하라.”라고 하니 함덕리 주민들은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전 마을 주민이 밥을 싸고 나와서 축성했으니 이것이 ‘탑알성창’이다.

그 때 우리 동네에서는 술과 떡으로 대접하였는데 이로부터 함덕리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도 감히 우리 바다에 접근하여 몰래 채취해 가지 못하였다.〉(북제주문화원, 신흥리지 103~104쪽)

※이병휘(李秉輝) 牧使兼判事 : 건양1년(1896) 5월 4일 제2대 제주관찰사겸제주재판소판사로 임명되어 제주에 도임, 광무2년(1898) 무술3월 방성칠의 난과 관련하여 떠남.

1932년 김정탁(金正卓)씨가 이 성창을 수리하는 데 일금 530원을 주어 신축하게 하니 비석을 앉게 할 자리의 앞․뒤면까지 축성하게 하였다.(북제주문화원, 신흥리지 157쪽)

탑알성창은 신흥리 1-1번지 앞에 축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이 포구로 쓰이지 않기 때문에 부서지는 대로 방치되어 있고 보다 북쪽으로 현대식 방파제가 만들어졌다.
《작성 17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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