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조천리 미밋동산(만세동산)에서 거사 발의..신흥리 김영배(김형배)지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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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조천리 미밋동산(만세동산)에서 거사 발의..신흥리 김영배(김형배)지사 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9.1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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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꽂은 다음 김시범이 독립선언서 낭독, 김장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신흥리 김영배(김형배)지사 묘

위치 ; 조천읍 신흥리 844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1944)
유형 ; 묘

신흥리_김형배지사묘
 



김영배는 1901년에 조천리 2607번지에서 김희식과 신청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김영배(金瑩培)로 기록되었으며 김형배(金瀅培)로도 불렸다.

신명사숙 교사였던 1919년 3월 조천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참여하였고 1944년 돌아가셨다. 아들 진일(鎭一), 진승(鎭升), 진평(鎭平)과 딸 동옥(東玉), 양옥(良玉)이 있다.

1919년 3월 1일부터 전개된 만세시위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의 염원이 담긴 전국적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전국적 규모의 독립운동인 만큼 제주에서도 만세시위는 펼쳐졌다.

제주의 만세시위는 서울보다 20일 늦은 3월 21일에 시작되었다. 제주도 만세운동은 조천출신 항일운동가 김시학의 아들인 김장환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입도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당시 서울 휘문고등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장환은 귀향하자마자 당숙인 김시범과 김시은을 찾아가 거사의 뜻을 설명하였고, 이 세 명이 조천리 미밋동산(지금의 만세동산)에서의 거사를 발의하였다.

그리고 3월 19일까지 14명의 동지를 규합하였고, 당시 조천에서 명망 높은 유림이었던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규합된 인원은 14명의 거사동지였다.

이들은 김시범· 김시은·고재륜(高載崙)·김형배(金瀅培)·김년배(金年培)·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백응선(白膺善)·김장환·박두규(朴斗圭)·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등이다. 거사를 위해서 김형배가 대형 태극기 4본을 제작하고 김시범, 백응선 등이 소형 태극기 300여장을 준비하였다.

거사는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네 차레에 걸쳐 전개되었다. 이윽고 만취(晩翠) 김시우(金時宇)의 소기일(小忌日)인 3월 21일이 되자 조천리 미밋동산에 14인의 동지와 더불어, 조천 마을 주민들과 인근의 신흥, 함덕, 신촌 등지 서당생 150여명이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은 다음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4인의 동지 중 김필원은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창호지에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써서 들고 조천주재소 서쪽에서 미밋동산으로 이동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에 시위군중의 규모가 커져서 그 수가 500명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제주경찰서 조천경찰관주재소에는 간타(神田) 순사부장과 순사 2명 보조원 2명 등 총 5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조천주재소의 경찰력으로 시위대의 행진을 저지할 수 없게 되자 급히 제주경찰서에 경찰증원을 요청하였고 30명의 순사가 도착하였다.

시위대는 미밋동산에서 조천 비석거리를 지나 제주성내를 향하여 시위행진을 강행하였고, 신촌에 이르러 경찰과 대치하였다.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엿으며, 13명이 연행되었으며 해산되었다. 이중에는 14인 동지 가운데 김시범·김시은·김용찬·고재륜·김형배·황진식·김장환·김경희·김희수 등 9명이 포함되었다.

3월 22일 2차 시위에는 백응선, 박두규, 김필원이 주도하여 200여명이 조천에 모여 전날 연행된 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펼쳤다.

그 과정에서 시위를 주도한 박두규와 김필원이 연행되었다. 그리고 3월 23일에는 백응선, 김두배, 이문천이 중심이 되어 3차 시위를 펼쳤는데, 조천 오일장터에서 함덕리로 시위행진을 강행하였는데 시작할 때 100명이었던 시위대는 함덕에 이르러서는 군중들이 가세하여 800명이 되었다. 이 날 이문천 백응선 등이 연행되었다.

3월 24일은 조천 장날이었다. 이날 김연배의 주도로 열린 4차 시위에는 1500여명의 군중이 참여,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날 시위에서 만세운동의 주동자 김년배도 검거되어 주동자 14명 전원을 포함하여 29명이 검거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소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으며,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결심판결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에는 동미회 활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9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조천 만세운동으로 검거된 자들 중 23명에 대해서는 1919년 5월 29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실형이 선고되었는데, 김시범과 김시은에 대해서는 징역 1년 형이 처해지고, 나머지 인사들에게는 6개월∼8개월의 비교적 가벼운 형량이 선고되었다. 제주의 항일 기운에 놀란 일제가 비교적 유화적인 방식으로 그 통치 전략을 바꿨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천 만세운동의 여파는 곧바로 서귀포로 전해져, 서귀포 삼매봉 만세운동과 서귀포 해상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후에 제주해녀 항일운동 등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오마이뉴스, 제주항일인사실기, 비문)

가족묘지에 모셔진 김영배 지사의 묘는 봉분 없이 평장으로 되어 있으며 1999년 북제주군수 명의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작성 17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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