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학업에 매진하자'..삼도2동 제주화교소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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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학업에 매진하자'..삼도2동 제주화교소학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9.15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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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華僑)란 중국에서 태어나서 다른 나라에 정착하여 그 나라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삼도2동 제주화교소학교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909번지
시대 : 대한민국(1957)
유형 : 교육기관

삼도2동_화교소학교

 

화교(華僑)란 중국에서 태어나서 다른 나라에 정착하여 그 나라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 또는 중국인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화교라는 용어는 1870~1880년대에 청국(淸國)이 조약에 기초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할 때 해외에 거주하는 상민(商民)을 정의할 필요에 따라 교거화민(僑居華民)이라는 네 글자를 사용했고, 이를 두 글자로 줄이고 순서를 바꾸어 화교라는 신조어를 만든 데서 비롯되었다.

그 이전에는 화인(華人=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인으로서의 혈연적·문화적 특성을 보유한 중국인을 지칭)이나 중국민(中國民), 중화인(中華人), 화민(華民) 또는 당인(唐人)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교(僑)는 교거(僑居), 즉 일시적인 체재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여기에서 비롯되어 귀교(歸僑=귀국화교)나 교무(僑務=화교업무), 교보(僑報=화교신문) 등의 파생어도 생겨났다.

화교란 말이 처음 생긴 것은 일본 요코하마에 살던 중국 상인들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화교는 동남아시아, 미국, 일본,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 등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수는 약 4천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로 광동, 복건계가 많지만, 최근에는 상하이나 베이징계 화교도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출신지와 거주 지역의 언어를 모두 사용하며, 최근에는 표준 중국어와 영어도 널리 쓰이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주로 광동, 복건 등의 화남 지방 출신이 많으며, 소수민족이면서도 자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현지의 정치, 경제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화교 중에서는 다른 국가에 오래 머물러 혼혈이 많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화교의 기원은 1882년 임오군란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당시 중국인 오장경(吳長慶)이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청국 군사 4000명을 데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이들의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따라 들어온 청나라 상인들로부터 화교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이어 1884년 인천 제물포항 주변에 청국조계지가 설정되면서 본격적으로 화교가 들어와 전국적으로 확산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 화교 사회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며 조선이 개항하면서 인천 등에서 노동자로 근무했다. 20세기 초반부터 요식업에 종사하는 화교가 늘어났다.

20세기 전반 원산에 화교가 많았으나 1931년 배화폭동(排華暴動) 이후 원산화교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화교직물도매상이 거의 몰락하고 남은 직물잡화상의 규모 역시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화교농민이 늘어나 1934년 말에는 화교상인과 비슷한 규모가 되었다.

대부분 중국 대륙에서 건너 왔지만, 도중에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해, 국적은 종전의 중화민국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9년 화교의 자녀들을 위해 한성화교소학이 설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화교가 경제적인 실권을 쥐는 것을 지속적으로 견제해 왔는데 1961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으로 화교들의 부동산 소유를 제한했고 1963년 화폐개혁 등으로 화교들이 모은 돈을 강제로 끌어냈다. 이렇게 화교 사회는 우리 정부의 각종 제도적 제한과 차별 대우 아래 위축되어 갔다.

그러다가 1998년 외국인에게 호의적인 정책이 시행되면서 2001년도에는 22,917명으로 점차 안정적이 되었다. 2013년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화교는 약2만이며, 가장 많을 때는 10만명까지 거주하였다.

제주에도 화교가 많은 편이다. 제주도에 화교가 들어온 것은 1920년부터 1950년까지이다. 처음에는 목공이나 석공 등의 기술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목적으로 계절이민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제주북초등학교와 제주도립병원 건축에도 일익을 담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대규모 정착은 중국의 공산화 과정에서 생겼다. 국공(國共) 내전을 겪던 1948년 공산당의 탄압 대상이던 중국 요녕성 장하현의 지주 가족과 친족 등 54명을 태우고 석승도를 출발하여 대만으로 피난하던 중 조난을 당해 1950년 8월 인천에 도착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다시 남하하던 중 완도 부근에서 미군 폭격으로 배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한국 군함이 인도적 차원에서 제주도로 예인하여 주었으므로 1950년 8월 생존자 22명을 태우고 제주에 도착했고, 산지천에 정박한 채로 중국인들은 밀가루로 꽈배기 등을 만들어 팔며 식량을 마련하고 부두 근처에 버려진 야채를 얻어다 먹으며 8년간 선상생활을 했다고 한다.

배는 1957년 해체됐다. 그 자손들은 중국음식점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제주 화교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고, 화교소학교도 짓는 등 자립하여 살고 있다.

1962년부터 시작된 한라문화제 개최 때부터 중국어로 가오지아오(高脚)라고 하는 사람 키만한 높은 막대기에 발을 묶어 걸어다니는 시가행진을 했는데 많은 제주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받았다. 이 활동은 주로 화교소학교에 모여 공동으로 연습하였다. 1984년까지 참가했는데 그 후로는 학생수가 감소하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노령화로 중단되었다.

화교소학교는 중국 사람은 중국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화교들이 함께 힘을 모아 1951년 본격적인 모금운동을 시작하고 제주도 전지역뿐만 아니라 서울, 인천, 부산, 목포 등 다른 지역의 화교들에게서도 성금을 모아 1957년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지었다.

1965년 대만의 승인을 받고 같은 해 현 위치에 제주화교소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인증받은 목판 허가증이 지금도 1층 교실 벽면에 걸려 있다. 처음에는 6학급으로 개설되었으나 2006년 현재 3학급만 운영되고 있다.

화교소학교의 교훈은 애국애민(愛國愛民)·돈풍려학(敦風勵學)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학업에 매진하자는 의미이다. 정식 수업은 대만 초등학교 교과서를 이용하며 중국의 역사와 지리는 물론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공부한다.

이로써 중국인 특유인 중화사상과 민족적 자부심을 익히고 화교공동체의 구심적 역할을 하도록 한다. 요즘은 중국어 교육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교화(校花)는 중국의 국화인 매화로 강인한 인내심을 상징한다.

2006년 현재 총 4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그중 유치부 1명, 2학년 2명, 6학년 1명이 재학 중이다. 교장 1명과 교사 3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시설로는 교무실 1실과 교실 3실을 갖추고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주 근대문화유산의 관광자원화 방안)

화교소학교 모수분 원장은 “화교소학교지만 정작 화교 출신 학생은 유치원생 2명, 초등학생 2명 뿐”이라고 설명했다. 모 원장은 “요즘은 전체적으로 출생률이 낮은 것이 화교사회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며 “현재는 54년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또한 모 원장은 “화교출신 학생 2명과 유치부 학원생 31명(화교 2명 포함)으로 학교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서 모 원장은 “특히 요즘 중국어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직접 부모들이 찾아와 학생들을 맡기고 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며 “학교 운영은 유치부 학원생들의 학원비로 운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과거에는 대만에서 화교소학교에 1년에 2천불 정도를 지원해줬지만 현재는 학교운영비 지원이 없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모 원장은 “제주화교소학교는 제주역사의 한 부분을 그대로 담아 놓은 그릇”이라며 “화교소학교를 통해 제주 사람들이 중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다.(미디어제주 050423)
《작성 1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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