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배비장전의 무대..오등동 방선문(訪仙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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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배비장전의 무대..오등동 방선문(訪仙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9.19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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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다 바위에 새긴 마애명이 50여 군데에 있다.

오등동 방선문(訪仙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92호

위치 ; 제주시 오등동 1907번지
시대 : 미상
유형 ; 자연유산

오등동_방선문전경
오등동_방선문

 

제주시 오등동 한내에 있는 바위 문. 오등동과 오라2동의 경계 지점인 내(한내=漢川)에 있는 바위가 문처럼 뚫려 있어 사람이 지나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다.

예로부터 들렁궤라고 하였는데, 들렁궤는 구멍이 뚫려서 들린 바위라는 뜻을 가진 제주어이다. 들엄괴라 부르기도 하고, 한자 차용 표기로는 거암곡(擧巖谷) 또는 등영구(登瀛邱) 등으로 표기하였다.

이곳을 방선문 또는 방선루라고도 하는데, 방선문은 한자 뜻 그대로 신선을 찾아가는 문이라는 데서 붙인 것이다.

방선문이라고 명명한 사람이 누군지, 새긴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지은 장한가(長恨歌,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에 관한 서사시)에 방선(訪仙)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이 詩句를 인용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주변엔 기암괴석이 골짜기 양쪽에 우뚝 솟아 있어 마치 병풍같이 둘려져 있고, 두 줄기의 냇물이 합치는 곳에 깎아 세운 듯한 돌문이 있다. 봄이면 방선문 계곡은 진달래꽃과 철쭉꽃이 만발한다.

이한우가 정한 영주(제주)10경 중에 하나인 영구춘화(瀛丘春花)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 일대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다 바위에 새긴 마애명이 50여 군데에 있다. 도내에서는 선인들의 마애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마애명(磨崖銘)이란 자연상태의 바위나 벼랑에 글을 새겨 넣는 것으로 한시를 적어 넣은 영각(詠刻)과 이름만을 새겨 넣는 명각(名刻)으로 구분한다.

여기 있는 마애명의 내용은 대체로 관직명과 이름을 써 놓은 명각이 대부분이지만 몇 편의 漢詩(한시)가 있다. 가장 오래된 마애명은 광해군1년인 1609년 김치 판관의 것이고 대부분은 18∼19세기의 것이다.

김치 판관의 시는 開, 來를 운으로 하였는데 이후의 시들도 거의 開, 來를 운으로 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이 시를 지은 홍중징은 영조14년(1738)부터 1년 남짓 제주목사를 지낸 사람이다.

登瀛丘(洪重徵 作)
石竇呀然處 돌굴 입을 크게 벌린 곳
巖花無數開 바위 틈 사이로 봄꽃 만발하였네.
花間管絃發 꽃 사이로 봄노래 피어나면
鸞鶴若飛來 난학이 아스라이 날아든다네.

이런 시 외에는 사람 이름이 많고 사람 이름이 아닌 글자로는 訪仙門, 喚仙臺(환선대=신선을 부르는 자리) 등이 있다.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는 신선을 만나보는 누대라는 우선대(遇仙臺)가 있다. 우선대는 환선대에서 50m 가량 남쪽에 있고 해서로 썼다고 하나 마멸이 심하다고 한다. 필자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 밖에 이름만 새긴 마애명들이 많은데
瀛洲伯(목사) 김몽규와 그 아들 군관들 일행,
知州(목사) 심현택,
목사 심원택과 군관 일행,
목사 이괴와 판관·사인·군관 일행,
판관 고경준,
牧伯(목사) 이현택과 판관·현감·군관 일행,
耽羅命吏(목사) 박선양과 가족,
이원조,
여철영,
한길예,
남만리와 군수 홍우순,
최익현과 이기온,
목사 홍종우,
적객 윤상화,
목사 정관휘,
목사 강면규와 조카·군관 일행,
김필술 일행,
목사 홍규와 군관 일행,
목사 송구호와 가족 군관 일행,

판관 강인호,
防禦使(목사) 안경운과 아들·군관,
耽羅伯(목사) 박성협과 군관 일행,
이명준,
搜雲契 15인,
瀛洲伯(목사) 윤구연과 군관 일행,
府伯(목사) 윤득규와 가족·군관 일행,
風詠錄 18인,
판관 박창봉,
목사 김윤,
박종민,
도련사숙 대표 고평호,
김봉길 일행,
정동원,
심약 장봉미 왜학 유정희,
한백증,
한형진 외 2인,
허관 외 2인,
임귀춘 외 2인,
권세태,
참판 한학수 외 1인,
박인양,
박진문 외 4인,
목사 목인배와 子,
서동원,
윤진오 외 4인 등이다.

방선문 아래쪽에서 남쪽을 보면 두 갈래로 흐르던 시내가 이곳에서 합류하는데 이를 두고 이익태 목사는 제비꼬리라고 표현했고, 이원조 목사는 두 지류가 합해져 실로 꿰맨 듯 쌍을 이룸이 주머니의 주둥이를 묶어 놓은 것 같다고 표현했다.

면암 최익현이 유배생활을 마치고 한라산을 올랐는데 그의 문집인 면암집에는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라는 글이 있는데 이 글 중에 이곳을 지나간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을해년(1875, 고종12) 봄에 나라의 특별한 은전을 입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윽고 한라산을 탐방할 계획을 정하고, 사인(士人=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이기남(李琦男)에게 앞장서서 길을 인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중략)… 일행이 남문(南門)을 출발하여 10리쯤 가니 길가에 개울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들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드디어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벼랑을 의지하여 수십 보를 내려가니, 양쪽 가에 푸른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 큰 돌이 문 모양으로 걸쳐 있는데, 그 길이와 너비는 수십 인을 수용할 만하며, 높이도 두 길은 되어 보였다. 그 양쪽 암벽에는 訪仙門登瀛丘(방선문 등영구)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또 옛사람들의 제품(題品)들이 있었는데 바로 한라산 10경(十景) 중의 하나이다. …(중략)… 한참 동안 풍경에 취해 두리번거리며 조금도 돌아갈 뜻이 없었다. 다시 언덕으로 올라와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죽성(竹城)이라는 마을이 나왔는데 꽤 즐비한 인가가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큰 집 한 채를 얻어 숙소를 정하니 날이 저물었다. 하늘이 캄캄하고 바람이 고요한데 비가 올 기미가 있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최익현도 명각을 남겼는데 옆에 이기온(李基溫)이라는 이름도 나란히 새겨져 있다. 이기온은 제주시 오라동에 살았던 선비로 최익현과 친하게 지냈다고 하며, 고종18년(1881) 오라리에 사설학당인 문음서숙을 설립한 사람이다.

전설에 의하면 방선문은 신선세계로 통하는 문으로 신선세계와 인간세계의 경계로, 옛날 백록담에서는 매년 복날이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했는데 이때마다 한라산 산신은 방선문 밖 인간세계로 나와 선녀들이 하늘로 돌아갈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만 했었다.

그런데 어느 복날 미처 방선문으로 내려오지 못한 한라산 산신이 선녀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말았고, 이에 격노한 옥황상제가 한라산 산신을 하얀 사슴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 뒤 한라산 산신은 매년 복날이면 백록담에 올라가 슬피 울었고, 하얀 사슴의 연못이라는 백록담의 이름은 이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방선문 일대는 한국 고전문학 중 해학소설의 백미이자 판소리 열두마당의 하나인 배비장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제주에 부임한 목사를 비롯한 지방관리뿐만 아니라 유배인까지 많은 선인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고 그런 풍류의 장면이 배비장전에 포함되어 있다.
《작성 17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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