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신선과 속인들 얼마나 들락거렸던가!..오등동 방선문 김치(金緻)마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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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신선과 속인들 얼마나 들락거렸던가!..오등동 방선문 김치(金緻)마애명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9.21 0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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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판관 재임 중 제주의 행정 구역을 개편, 정리하였으며 관리제도를 확립하는 데 힘썼다.

오등동 방선문 김치(金緻)마애명

위치 ; 제주시 오등동 방선문(들렁귀) 안 서쪽 경사면 바위 위
시대 ; 조선
유형 ; 마애명
斵石非神斧 돌을 깎은 것은 신의 도끼가 아니라
渾淪肇判開 혼돈 속에서 애초에 쪼개 열렸으리.
白雲千萬歲 흰 구름만 천년만년 떠 있던 사이
仙俗幾多來 신선과 속인들 얼마나 들락거렸던가!
己酉秋 金緻 ◇ 기유년(1609) 가을 김치 ◇
斵 깎을착, 渾 흐릴혼, 淪 물놀이륜, 肇 칠(공격하다,비롯하다,시작하다,꾀하다)조

 오등동_방선문김치마애사진과탁본




글씨가 작은 편인데다 앝게 새겨서 글자 판독이 쉽지 않고 흙먼지에 덮여 있을 때도 많다. 이름(金緻) 다음에도 글자처럼 보이는 획이 있으나 무슨 글자인지 판독할 수 없다. 판독이 안 되는 이 부분과 합하여 金衡秀로 판독한 사람도 있다.

開와 來를 운으로 썼는데 이후 이곳에 새겨진 다른 사람들의 영각(詠刻)에도 開와 來를 운으로 썼다.

김치는 제주 판관이었다.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남봉(南峰) 또는 심곡(深谷). 아버지는 부사 김시회(金時晦)이며, 진주대첩의 주인공이며 영의정에 추증된 김시민(金時敏)에게 입양되었다. 조선 최고의 독서가이며 조선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득신(金得臣)은 그의 아들이다.

선조30년(1597) 알성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선조41년(1608)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전라도 흥덕현감을 지냈다.

이조좌랑 재임 중인 광해군1년(1609) 3월 이전(李錪)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부임하고 다음해 9월에 교체되어 떠났다. 제주판관 재임 중 제주의 행정 구역을 개편, 정리하였으며 관리제도를 확립하는 데 힘썼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서방리(東西坊里)를 설치하고 약정(約正)을 두었는데, 제주목은 중면·좌면·우면으로, 정의현은 중면·좌면·우면으로, 대정현은 좌면·우면으로 행정 구역을 나누어 면(面)에는 도약정(都約正) 1명과 약정(約正) 2명, 그리고 관리 3명을 두었다.

군대를 여섯 번(番)으로 편성하여 민폐를 없애는 데 공이 커서 민군(民軍) 모두가 환영하고 뒷날 선정비를 세워 그를 기리었다. 동래 부사로 재임 시에도 선정을 베풀어 동래부 유생들이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로 몰려 유배당하였다. 그 뒤 풀려나 동래부사를 거쳐 인조3년(1625)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학문에 정진하여 경서(經書)를 통달하였고, 특히 점술을 연구하여 천문에 밝았다.

문장이 뛰어나 제주에 있을 때에도 「한라산유산가(漢拏山遊山歌)」 등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 「등한라산절정시(登漢拏山絶頂詩)」는 오랫동안 도민의 입에 오르내렸다.

김치의 유한라산기를 보면 무수내-노루오름[獐岳]-삼장골[三長洞]-볼래오름[浦涯嶽]을 지나 존자암(尊者庵)에서 머물고, 영실(靈室)-수행굴[修行]-칠성대(七星臺)-정상 혈망봉(穴望峯)에 올랐다고 되어 있는데 내려오는 길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김치는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김치가 흥덕현감을 하고 있을 때 한 노파가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아들 둘이 갑자기 죽어 너무나 원통하다, 이렇게 함부로 사람을 데려가는 염라대왕을 불러 호통을 쳐 달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어이없는 주장이었지만 7일 밤낮을 울어대니 김치로서도 더는 말릴 재간이 없었다. 결국 김치는 비법을 써서 호출장을 만들고는 사령 고장금(제주 전설에서 유명한 저승사자 강림)을 불러다가 염라대왕을 잡아오라고 한다.

고장금은 죽었다고 생각하며 걱정했지만 현명한 아내의 도움(제주 차사 본풀이에서는 집안 신령들의 도움을 받는다)으로 염라대왕 호출에 성공한다. 염라대왕은 동헌으로 와서 본래 그 노파가 무고한 손님을 잡아서 재물을 빼앗고 죽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설명해준다.

그 원혼들이 그 집안의 아이로 환생했던 것이다. 김치는 죽어서 염라대왕이 되었다고 하고, 그 아들 김득신(金得臣)이 아버지 염라대왕의 도움을 받는 전설도 전해진다.
《작성 17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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