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실학적 학풍 형성..오등동 방선문 한정운(韓鼎運)마애 차벽상운(次壁上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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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실학적 학풍 형성..오등동 방선문 한정운(韓鼎運)마애 차벽상운(次壁上韻)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9.2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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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공신정(지금의 기상청 자리에 있던 정자), 1808년 연상루(제주성 동문루) 중수

오등동 방선문 한정운(韓鼎運)마애 차벽상운(次壁上韻)

 

위치 : 제주시 오등동 방선문(들렁귀)

시대 ; 조선(1807 혹은 1808)
유형 ; 마애명

오등동_방선문한정운마애_차벽상운
 오등동_방선문한정운마애_차벽상운모조



次壁上韻
亂石沉雲合 幽花向日開(란석침운합 유화향일개)
仙人不可見 我輩祗空來(선인불가견 아배지공래)
韓鼎運

벽에 걸린 시에 차운(次韻)하다
널려진 바위들은 구름 속에 잠겼고 그윽한 꽃들은 해를 향해 피었네.

어디에도 신선은 뵈이지 않으니 그저 우리들의 헛걸음이었던가!

沉 가라앉을침, 祗 공경할지

제주목사를 지낸 한정운(韓鼎運, 1741~?)의 시(詩)이다. 차벽상운을 제목으로 썼는데 이런 제목은 먼저 있는 시에서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짓는다는 뜻으로 고유한 제목이 아니라 일반명사로 쓰이는 말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차벽상운이란 제목으로 된 시가 많다.

이 시는 평성(平聲) 회(灰)로 압운하였는데 이는 김치(金緻) 판관이 새긴 〈斵石非神斧 渾淪肇判開 白雲千萬歲 仙俗幾多來〉에서 開와 來라는 운을 따라서 쓴 것이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는 다른 시들과 풍격(風格)이 비슷하지만 전구(轉句)와 결구(結句)는 농담처럼 썼다. 한정운은 산방산 암벽에도 마애명을 남겼다.

한정운은 순조7년(1807) 3월부터 순조9년(1809) 1월까지 제주목사로 근무하였으며 그 동안 1807년 공신정(지금의 기상청 자리에 있던 정자), 1808년 연상루(제주성 동문루)를 중수하였다. 연상루 중수상량문은 당시 유명한 서예가 오점(吳霑), 진사 김양수(金亮洙)가 각각 지었다고 한다.

순조실록(1807년 8월 10일)과 비변사등록(1807년 8월 10일)에 제주목사 한정운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데 표류해 온 사람들이 말이나 글이 전혀 통하지 않아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구국에서 온 사람을 통하여 이들이 여송국(필리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유구국 사람들에게 이들을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타국인을 태우지 않겠다고 하여 조정에 처분을 물었는데 조정에서도 유구국 사람에게 딸려 보내라고 하였으나 이미 그냥 떠나 버렸기 때문에 표착인들을 보내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또 비변사등록(순조7년(1807) 음력 12월 3일)에는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제주목사 한정운(韓鼎運)의 재실(災實)에 관한 장계를 보니, 분등(分等)은 거론하지 않고, 몇 가지 행해야 할 일을 순풍을 기다렸다가 바다를 건너게 되면 때늦을 염려가 있을까 하여 전례를 원용해 한편으로 거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장계를 올린다고 하였습니다. 행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신환과 구환을 한꺼번에 독촉하면 백성의 힘을 상할까 하니 구환은 다시 그대로 정퇴하는 것이고, 그 하나는, 도망갔거나 사망했거나 늙고 병들어 그만두어야 할 군병을 각 해읍에 엄중 신칙하여 채워 넣게 하고 예에 의해 합조(合操)를 거행하는 것입니다. 장계 내용을 보면, 순전히 풍년이 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흉년을 면한 것보다는 나음을 알 수 있으니 섬 주민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입니다. 후록한 두 가지 조항을 먼저 거행하였고, 또 연례로 청하는 바이니 역시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하는 기록이 있어 흉년에 주었던 환곡의 상환을 독촉하지 않겠다고 하여 허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정운은 조선 후기 실학파의 중요한 학맥인 성호학파(星湖學派, 이익(李瀷), 안정복, 윤동규, 신후담, 이기양, 이병휴, 권철신, 이중환, 이가환(李家煥), 권일신(權日身), 정약전(丁若銓), 정약용, 이벽(李檗), 李承薰)에 속하며 양명학을 수용하여 실학적 학풍을 형성한 인물이다.

강원도 영월부사 재임시 越妓瓊春殉節之處라는 고경춘순절비의 글씨를 쓴 것으로 보면 명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작성 17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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