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사직단 개축, 제주향교 계성사 창건..오등동 방선문 목인배마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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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사직단 개축, 제주향교 계성사 창건..오등동 방선문 목인배마애명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9.27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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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흉년 뒤처리를 백성의 입장에서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오등동 방선문 목인배마애명

위치 ; 제주시 오등동 방선문(들렁귀) 안 동쪽
시대 ; 조선(1854)
유형 ; 마애명

오등동_방선문목인배마애

 

牧使 睦仁培 子 裕錫 甲寅 四月 日(목사 목인배 자 유석 갑인 사월 일)
사각형 선을 그리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다.

목인배(睦仁培, 1794년~1877년)는 사천(泗川)이 본관이고, 자는 치익(稚益), 호는 가은(嘉隱)이다. 증조부는 병조좌랑을 지낸 목지경(睦趾敬)이고,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목조덕(睦祖德)이고, 부친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목안중(睦安中)이다.

순조22년(1822)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19위에 합격하고, 순조29년(1829)에 왕세자가 시행한 삼일제(三日製)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전시(殿試)에 바로 응시하는 허락을 받아 동년 정시(庭試) 문과에서 병과(丙科) 28위에 급제하였다.(위키백과,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사헌부장령, 충청도사, 정언, 봉상시정(奉常寺正)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철종4년(1853)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하여 철종6년(1855) 8월까지 1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부임 직후 제주성 남문 밖에 있던 사직단을 개축했으며, 제주향교 계성사를 창건했고 그 상량문을 직접 썼는데 최근에 그 원본이 발견되었다. 또 젊은 인재들이 학문에 힘쓰도록 여러 제도를 시행했으며 그 결과 문과에 3명, 무과에 9명이 급제하는 결과를 얻었다.

철종10년(1859)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고종10년(1873)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호군(行龍驤衛護軍)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올랐다. 철종1년(1850) 증광시(增廣試)의 시관(試官)을 맡았으나, 이 시험이 파방(罷榜)이 되면서 유배(流配)를 갔다가, 2년 후에 다시 사관으로 복직하였다. 고종14년(1877) 5월 2일에 사망하였다.

형 목인재(睦仁㘽)와 동생 목인회(睦仁會)도 각각 사마시와 문과에 등과하여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헌종9년(1843) 3월 27일 正言인 睦仁載·睦仁培가 濟州牧使인 李源祚에게 보낸 답신(간찰)이 전한다. 상대방의 서찰을 받고 반가움에 눈이 맑아지고, 또한 평안하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위안이 됨을 말하고, 제주의 풍광은 어느 것 하나 詩의 소재가 되지 않음이 없으니 공무 중에 틈틈이 시를 읊조리는 것은 西湖의 公事라고 하였다. 달빛을 타고 시를 읊조리면 南樓의 맑은 흥취가 얕지 않을 것이니, 天台의 擲金이 三峽의 漱玉에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섬나라가 상대방의 빼어난 학문에 힘입어 문물이 흥할 것임을 칭찬하고, 훗날 맑은 풍광을 읊은 시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오면, 많은 문인이 당신을 찾아뵙고 그 시를 볼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이처럼 된다면 당신의 명성은 文垣에 자자할 것임을 강조하고, 끝으로 한강 가에서 읊은 시로 제주의 풍광을 읊은 시에 화답할 수 있겠느냐는 말로 마무리하였다.(http://yn.ugyo.net/dir/)

비변사등록 철종5년(1854) 11월 28일(음) 기록에는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제주목사 목인배(睦仁培)의 연분장계를 보니, 아뢰기를 제주가 정의(㫌義)보다 낫고 대정(大靜)이 정의보다 못한데, 3개 읍을 통론하면 가까스로 평년작이므로 신환(新還)과 구환(舊還)을 일시에 함께 독촉하는 것은 민력을 손상시킬 것 같으니, 구환을 우선 그대로 정지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섬의 농사가 이미 어느 정도 안정적이라 백성들의 일은 충분히 늦춰 줄 만하니, 신환과 구환을 함께 독촉하는 것은 따르게 하여 보호하는 정사가 아닐 듯합니다. 구환은 근례에 따라 그대로 정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고 하여 제주의 흉년 뒤처리를 백성의 입장에서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아들 유석(1835∼1899)은 고종13년(1876)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3등(三等) 42위로 합격한 기록이 있다.
《작성 17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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