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오현(五賢)의 인물 중 충암(冲庵) 김정(金淨)을 첫 번째로 꼽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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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오현(五賢)의 인물 중 충암(冲庵) 김정(金淨)을 첫 번째로 꼽는 이유?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0.1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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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한라산 정상 백록담 암벽에 새겨진 ‘김정(金淨)’ 석각명(石刻銘) ※사진제공-백종진

 

【절문(切問)】

○ 오현(五賢)의 인물 중 충암(冲庵) 김정(金淨)을 첫 번째로 꼽는 이유?

- 제주 오현의 인물들 중 가장 이른 시기인 조선조 초기(1520년 8월)에 유배인 신분으로 제주 땅을 밟아 약 1년 2개월 남짓 생활하다가 후명(後命)함(1521년 10월)

-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 <수정사중수권문(水精寺重修勸文)> ‧ <우도가(牛島歌)> ‧ <임절사(臨絶辭)> 등의 제주 관련 글을 남김

- 당시 제주민의 무속적 풍습에 젖은 현실태를 지적하고 이를 바꾸려고 애씀

 

○ 충암(冲庵)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은 왜 유명한가?

- 16세기의 제주인의 생활상 및 제주 자연의 실상을 조명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적 가치가 높음

- 제주도민(濟州島民)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그 삶을 향상시키려는 애민의식의 발로

- 감귤의 품종 등 제주 토산물에 대한 설명을 육지의 것과 비교 설명함

 

○ 충암(冲庵)은 당시 한라산(漢拏山)을 직접 올랐을까?

- 조경(趙絅, 1586~1669)의 《용주일기(龍洲日記)》의 기록 : “옛날에 김 충암공(金冲庵公)은 탐라로 귀양갔을 때 반드시 한 달에 두 번은 한라산(漢拏山)을 올랐는데, …”

 

○ 오늘날 충암(冲庵)의 유적을 찾는다면 어디에 무엇이 남아있는가?

- 제주 오현단 내 유허비, 귤림서원, 판서정(判書井) 터

- 대전 충암 고택 및 묘소, 충북 보은의 충암 생가, 전북 순창의 삼인대(三印臺)

 

○ 충암(冲庵)은 우도(牛島)를 찾지도 않고 어떻게 <우도가(牛島歌)>란 시문을 지을 수 있었는가?

- 방성(方姓)이란 인물이 들려주는 우도 동굴의 신비한 이야기를 듣고서 칠언고시(七言古詩, 총 33구)의 장편 시문을 남김

 

1.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1521)

○ 충암(冲庵) 김정(金淨, 1486~1521)은 어떤 인물인가?

김정(金淨, 1486~1521)은 조선 전기 이조정랑, 순창군수,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원충(元冲)이며 호는 충암(冲庵)이고 보은 출신이다. 김호(金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처용(金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 허윤공(許允恭)의 딸이다.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 ·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 이어 병조정랑 · 부교리(副校理) · 헌납(獻納) · 교리 · 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왕의 구언(求言: 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기도 했다.

그 뒤 응교(應敎) · 전한(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 · 부제학 · 동부승지 · 좌승지 · 이조참판 · 도승지 ·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1520년 8월에 제주도로 건너가 위리안치되었는데, 그리고 이듬해인 1521년 10월, 그곳에서 사사(賜死) 되었다.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2개월 만의 일이다.

그러고 보면 김정에게 있어서 제주도는 바로 자신의 최후 유배지이자, 그의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곳이 되는 셈이다. 그 뒤로 1545년(인종 1)에 복관(復官)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한편 충암의 비극적 최후의 삶에 대해 학계에선 종종 초(楚)나라 굴원(屈原)에 비유하곤 한다. 후명(後命)으로 죽음 앞에서 읊은 그의 <임절사(臨絶辭)>가 굴원이 남긴 <어부사(漁父辭)>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충암에게 내린 시호(諡號)인 ‘문간공(文簡公)’에 대한 글에 보면, “널리 배우고 많이 들음을 ‘문(文)’이라 하고, 평소 행함에 거경(居敬)을 근본으로 삼아서 반드시 옳은 것만 가려 신중히 행함을 ‘간(簡)’이라 한다.”고 하였다.

 

※ 귀양 차 제주로 떠나기에 앞서 해남 바닷가에서 머물며 지은 충암 선생의 시 3구

 

○ 題路傍松三首 /길옆 소나무 아래서 3수를 짓다

 

(1) 枝條摧落葉鬖髿 / 가지는 꺾인 채 솔잎은 여인의 흐트러진 머리

斤斧餘身欲臥沙 / 도끼로 남은 몸 찍어 모래 위로 눕히려 하네.

望斷棟樑人世用 / 동량재 될 꿈 잘리어 도로 사람에게 쓰일 바엔

査牙堪作海仙槎 / 꼿꼿한 채 그대로 바다 신선 땟목이나 되리라.

 

(2) 海風吹去悲聲遠 / 바닷바람 불 때마다 저 멀리서 슬픈 소리

山月高來瘦影疎 / 산달 높이 솟아 솔 여읜 그림자 성글었네.

賴有直根泉下到 / 그래도 곧은 뿌리 땅 밑까지 뻗어있어

雪霜標格未全除 / 눈 서리 겪은 풍상 여전히 남았구나.

 

(3) 欲庇炎程暍死民 / 더위에 지친 나그네들 시원하게 해주려고

遠辭巖壑屈長身 / 먼 골짝 마다하고 긴 몸 휘어진 채 있구나.

斤斧日尋商火煮 / 날마다 도끼질하며 행상 땔감용으로나 찾게하니

知功如政亦無人 / 정승같이 그대의 공을 아는 이도 드물 것이라.

 

이런 풍류 시에 대해서 컬럼니스트 이규태의 《역사산책(歷史散策)》에 실린 ‘김정 유배지(金淨流配址)’란 글에 소개한 그 배경은 이렇다.

“옛 선비들은 참 멋이 있었다. 유람할 때나 출타할 때, 선비들은 풍류낫으로 불리는 낫 하나를 배낭에 꽂고 떠난다. 어느 풍취(風趣) 앞에 시흥(詩興)이 솟으면 이 풍류낫으로 소나무 밑둥을 펀펀하게 깎아 시판을 만든다. 필묵을 꺼내어 그곳에 시 한 수 써놓고 지나간다. 마치 나뭇잎에 이슬이 맺히듯 어느 시공에 방황하는 미를 이슬처럼 응집시켜 살아있는 나무에 결속시켜 놓고 떠나간다. ….”

 

【참고】

○ 현행복 칼럼(<제민일보> ‘아침을 열며’, 2020. 06. 15)

해남의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현 행 복 ‧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요마적에 공무로 전라남도 해남군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공무와는 별개로 나의 시선을 끄는 특별한 존재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청사 앞마당의 소나무 한 그루였다. 그 나무의 자태가 얼마나 늠름한지! 그 둘레가 너끈히 두 아름은 되어 보였고, 높이도 인접한 군 청사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우람했다. 그런데 이 나무의 수령이 오백년이 넘는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 순간 귀가 번쩍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내가 즐겨 애송하는 시문 가운데 충암 김정(金淨, 1486~1521)이 지은 <길 옆 소나무 아래에서 절구 3수를 짓다>란 시가 그 순간 연상되어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꼭 오백년 전인 조선조 중종 15년(1520년) 8월에, 충암 김정은 한해 전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된 채 제주로의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이때 제주로 향하는 배를 타려고 해남의 나루터에 잠시 머무르게 되는데, 아마도 이곳 관두량 포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 바닷가의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절구 세 수를 지었는데, 유배인의 처지라 그 행장이 변변치 못했기에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서 거기에 시를 써서 남겨놓았다고 한다.

“더위에 지친 길손들 시원하게 해주려고 / 먼 골짝 마다하고 긴 몸 휘어진 채 있구나. / 날마다 도끼질하며 행상 땔감용으로나 찾게 하니 / 진시황같이 그대의 공을 아는 이도 드물 것이라.”

이 시의 마지막 한 구절은 그 표현된 함의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진시황의 이름자인 ‘政(정)’자를 내세워 자신의 이름자인 ‘淨(정)’자를 메타포로 포장해 표현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의 본 이름은 ‘영정(嬴政)’이다.

사마천의 《사기》 <시황제본기 · 봉선서>에 보면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진시황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게 되자 인근 소나무 아래로 급히 몸을 피했는데, 비가 그치자 진시황은 그 나무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특별히 ‘오대부’란 벼슬을 내렸다. 현재도 중국 태산에 가보면 이런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고목의 소나무가 실재한다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속리산의 ‘정이품송’도 이와 비슷한 사례이다. 조선조 세조 때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임금이 어느 날 법주사로 행차하다가 가마를 가로막던 소나무 가지가 절로 올라가면서 통행이 가능해지자 임금이 특별히 그 소나무에게 정이품이란 벼슬을 하사했다는 내용이다.

수령 오백년 된 해남 고을의 한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새삼스레 오백년 전의 인물인 한 제주 유배인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의 소나무가 과연 오백년 전 충암이 쉬어갔던 그 소나무인지 그 진위여부를 단정할 순 없어도, 소나무의 공덕이 곧 한 인물의 공덕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동인으로 강하게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충암은 비록 유배인의 신분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음에도, 당대 제주인들의 생활상을 담은 <제주풍토록>이란 저술을 남겨놓았다. 이로 말미암아 오백년 전의 제주 사회상과 역사적 사실을 유추하고 재인식해냄이 가능해졌다.

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가. 사실상 소중한 기록문화의 유산을 제주민들한테 선사한 셈이다. 그런데 올해로 충암 김정 선생이 제주에 입도한지 꼭 5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건만 제주는 여전히 조용하다. 이런 소중한 업적을 남긴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 가치를 재조명하는 학술행사의 소식이 들려오기를 고대해본다.

 

○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의 내용

※ <제주풍토록>은 본래 충암이 제주의 풍속과 풍토를 그의 외조카에게 기록해서 보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린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보면, “공이 그 외조카에게 답한글로서 제주의 풍토를 기록해 모은 것이다.[公答其外侄書, 備錄濟州風土]”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 시작은 이렇다.

“이 고장의 풍토는 지역적 특색을 갖고 있고 일마다 매우 달라 걸핏하면 탄식하고 놀랄만하지만 볼만한 것은 전혀 없다.[此邑風土 別是一區 事事殊異 動可吁駭 一無可觀]”

이어서 기후에 관한 내용과 풍속에 대해 서술하였다. 곧 뱀 또는 잡신을 섬기는 미개한 풍속에 대해서도 지적해 비평하는가 하면, 제주 관리들의 탐학이 학문적 교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제주풍토록>의 주요 내용이란, 곧 제주도의 기후부터 가옥 형태, 잡신과 뱀을 숭배하는 풍습, 그로 인한 무당의 폐해, 언어와 풍속, 거친 인심과 관리의 포학, 지세와 토질, 동물과 조류, 어류, 쌀과 술, 소와 소금, 해산물과 토산물 등을 대개 육지의 것들과 비교해가며 다양하게 소개한 글이다.

예컨대 제주 토산물에 대한 설명에서 “길짐승으로는 단지 노루, 사슴, 돼지가 가장 많고, 오소리도 역시 많다. 이 밖에 여우, 토끼, 호랑이, 곰은 없다. 날짐승으로는 꿩, 까마귀, 부엉이, 참새가 있고, 황새, 까치 등은 없다.

산채로는 멸, 고사리가 가장 많고, 취나물, 삽주, 인삼, 당귀, 도라지 등은 모두 없다. … 해산물로는 전복, 오징어, 은갈치, 고등어 등 몇 종류가 있고, 이외에 낙지, 굴, 조개, 게, 새우, 청어, 은어, 조기 등의 천한 어류와 잡종 어류는 모두 없다.[獸但獐鹿猪最多 猯吾児里 亦多而此外狐兎虎熊等皆無 禽有雉烏鴟雀而无鸛鵲等 山菜蕺멸蕨最多而香蔬 츄ㅣ朮人蔘當歸桔梗等皆無 陸魚但銀口種而已 海族有生鰒烏賊玉頭刀魚古刀魚等數種 此外如絡蹄牡蠣蛤靑魚銀魚石首魚等諸賤種及雜種皆無焉]”라고 했다.

즉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하여 나열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게 한 특징이기도 하다. 아울러 귤과 유자를 모두 아홉 종의 종류로 나누어 제각기 소개하면서 여러 품종의 형태 및 맛과 약효를 묘사하고 있음도 특이하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특이한 몇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자.

“이곳 사람들의 말소리는 가늘고 드세어서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같이 날카로우며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많다. 머무는 기간이 오래 지나면서야 저절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어린애도 만어(蠻語)를 알아들을 수 있다.’라고 함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등에 지고 머리에 이지 않는다. 절구[臼]는 있으나 방아[舂]는 없고, 옷을 두드림에 다듬잇돌이 없으며(손으로 두드림) 쇠를 담금질할 때 풀무질하면서 발로 밟는 일이 없다(손으로 부채질 하여 불을 일으킨다.).[土人語音 細高如針刺 且多不可曉 居之旣久自能通之 古云 兒童解蠻語者 此也 負而不戴 有臼無舂 擣衣無砧 以手敲打 冶鑪無踏 以手敲橐]”

“한라산과 제주읍 땅에는 우물과 샘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다. 시골 사람이 오리(五里) 거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길면서도 그래도 가까운 곳의 물이라고 일컫곤 한다. 어떤 곳에서는 하루종일 고작 한 번이나 두 번밖에 길지 못하는 곳도 있고, 소금기가 많은 짠물 샘이 많다.

물을 긷는 데는 반드시 나무로 만든 목통(木桶)을 써서 등에 지고 나른다.(무릇 짐이 많으면 대개 여인들이 등에 짊어진다.)[漢拏及州邑地 泉井絶少 村民或汲水於五里 則謂之近水 或有終日一汲二汲而多鹽泉 汲必以木桶負行 凡卜物多 女負行 取多汲也]”

【참고】

○ 현행복 칼럼(<제민일보> ‘아침을 열며’, 2021. 12. 13)

목통(木桶)

현행복 •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지난 12월 3일(음력 10월 그믐날)은 충암(冲庵) 김정(金淨) 선생이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36세의 나이로 순절(殉節)한 지 꼭 5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이날 대전시 충암공 종가에선 경주김씨충암공파대종회가 주최한 추모 행사가 열렸는데, 기념식과 더불어 신도비 비각 준공식이 함께 마련됐다.

이날 행사장엔 충암공 17대 종손 김응일 회장을 비롯한 대전시 관내 주요 인사들이 내빈으로 참석했고, 제주에선 오현고등학교 총동창회 황용남 회장을 비롯한 출타 동문 여럿과 함께 필자도 이 대열에 일원으로 합류했다. 특히 이날 저녁에 거행된 불천위(不遷位)제사 땐 제주에서 미리 제수용으로 마련해간 한라산허벅술과 감귤이 제사상에 올려져 눈길을 끌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제주에서 귀양살던 적객(謫客)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들 가운데 충암 김정 선생만큼 그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이 큰 인사도 드물 것이다. 체류 기간이라고 해야 고작 1년 2개월에 불과했어도 충암 선생은 제주와 관련된 산문과 시문 여러 편을 남겼다.

그 가운데 특히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은 유명한데, 16세기 제주 섬의 풍토와 문화를 담아낸 기록이란 오늘의 시각으로 조명해봐도 500년 전 제주인의 생활상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내용이 사실적이며 생동감이 넘친다.

다만 그 기록 중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한 가지 의문 사항이 내 곁에서 늘 떠나지 않곤 했는데, 다름 아닌 물긷는 도구로 제시한 ‘목통(木桶)’이란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제주풍토록>에 보면, “물을 긷는 데는 반드시 ‘목통(木桶)’을 써서 등에 져 나르는데, 이는 물을 많이 길기 위함에서다.”라고 했고, 또 이에 부연하기를, “무릇 짐이 많으면 대개 여인들이 등에 지고 간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더욱이 이 ‘목통’에 대한 해석을 두고 지금까지 학계에선 ‘나무통’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 추세이다. 그래서 생긴 궁금증은 너무도 다양하다. 나무통으로 물을 길어 나르다니? 그렇다면 그 모양은 과연 어떤 형태일까? …

그런데 어느 날 향토사 관련 자료수집차 도서관을 찾았다가 서가에 꽂힌 《한국고전용어사전》이란 책을 아무런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그 책 2권에 실린 ‘목통(木桶)’이란 단어를 찾아내 펼쳐보는 순간, 어떤 해결책 같은 게 번뜩이며 내게 다가옴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목통이란) 향제 때에 제물을 씻는 용도로 쓰여왔던 대나무 통발로 만든 통으로 선공감에서 관장하였음’이라 했다.

요컨대 목통이 ‘대나무 통발로 만든 통’이라고 한다면 이는 과거 제주인의 일상 죽제품(竹製品)인 ‘구덕’을 지칭함과 다를 바 없다. 더구나 이 ‘구덕’은 그 쓰임새가 다양하고 편리해 여인들은 대체로 이를 등에 져서 이동하곤 했다. 예컨대 유아용 요람인 ‘애기구덕’, 부인들이 외출할 때 휴대하던 ‘곤대구덕’, 제주의 아낙들이 물을 길어 나를 때 허벅을 담던 ‘물구덕’ 등이 그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풍속’조에 보면, “등에 목통(木桶)을 짊어지고 다니고 머리에 이는 자가 없다.[背負木桶 而無頭戴者]”라고 했다. 이 기사의 ‘목통’ 또한 ‘구덕’으로 풀이해 볼 수 있음은 매한가지다. 이는 곧바로 “제주의 여성들은 ‘구덕’(짐)을 등에 지고 가지만 육지의 여성들처럼 짐을 머리에 이고 가진 않는다.”는 뜻으로 자연스레 옮아가게 마련이다.

다시 또 제주도에 소금이 나지 않는다는 지적은 무척 흥미롭다.

“가장 우스운 것은 땅이 큰 바다에 둘러 있으면서도 소금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서해안에서처럼 소금밭을 일구려 해도 바닷물을 끌어들여 경작하기가 마땅치 않고, 동해안에서처럼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기에 이곳 바닷물이 싱거워서 백 배의 공을 들여도 소득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도, 해남 등에서 소금을 구입해 와야 하니 민간에서는 소금이 지극히 귀할 수밖에 없다.[最可笑者 地環巨海而塩不産 欲煮田塩如西海 則無塩可耕 以取洽欲煮海塩如東海 則水淡 功百倍 而所得絶少 必貿於珍島 海南等處 故民間極貴]”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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