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절박한 현실 앞 무장대 선봉 선 이세진 스님..해안동 서관음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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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절박한 현실 앞 무장대 선봉 선 이세진 스님..해안동 서관음사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10.2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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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로 내려올 때 모시고 온 불상이 문화재로 지정된 월계사 소장 목조아미타불좌상이다

해안동 서관음사 터

위치 ; 해안동 2239, 2244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불교유적(폐사지)

해안동_서관음사터 건물

 

해안동_서관음사터 우물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제주불교는 식민지 불교의 잔재를 극복하고 자주적 불교 건설에 앞장서야 함은 물론 과거로부터 민간 신앙과 습합된 채 전해 내려오던 구태를 벗겨내고 정법을 회복시켜야 할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서부터 강원 설치, 인재 양성, 모범 총림의 건설 등을 내세우며 한국불교의 정통성 회복을 염원했던 이세진(1910~1949) 스님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제주불교 혁신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제주불교의 혁신을 주도한 스님들 상당수가 제주4·3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고, 세진 스님 역시 총살당하면서 그들이 추구했던 정법의 구현의 빛을 잃고 말았다.

1910년 8월 25일 제주도 한림읍 저지리에 아버지 이찬백과 제주시 산천단 인근에 살던 어머니 김덕신 사이에서 태어난 스님은 이미 불가와 인연이 깊은 분이었다. 외할아버지인 김달권과 외삼촌 김형근이 스님이었으며, 어머니 김덕신 역시 불교에 심취해 있던 분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1915년 어머니와 인연 있던 전라북도 정읍 내장사의 백학명 스님에게 보내져 절에서 생활하다가 1920년 무렵에 기본 교육과정 이수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1924년 제주공립보통학교(현 북초등학교 전신)를 졸업하고 1926년 12월에 이르기까지 한경면 저지리 한문을 배운 후, 18세기가 되던 해인 1927년 11월 내장사에서 백학명 스님의 상좌인 한고벽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리고 곧바로 1929년 7월까지 내장선원에 머물게 되는데, 내장선원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선농(禪農)불교의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왜곡된 불교 교단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학명 스님이 일으켜 세운 선원이었다.

이세진 스님은 1929년 백학명 스님이 입적하자 내장사 생활을 정리하고 대원강원으로 소속을 옮겨 그곳에서 사교과, 대교과 그리고 수의과를 이수(강원의 학제(學制)는 사미과(沙彌科)·사집과(四集科)·사교과(四敎科)·대교과(大敎科)의 4과정과 수의과(隨意科)가 있다.)하게 된다.

대원강원은 근대불교 교육의 선구자로 불리는 한영정호 스님이 이끈 전문강원으로 일제의 침탈에 맞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탄생했다. 이곳에서 교육을 통해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스님의 사상은 더욱 확고해질 수 있었다.

김봉수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았으며, 1930년 백양사에서 유금해 스님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정식 스님이 된다.(제주문화유산답사회 구담 글)

1934년 6월 내장사로 돌아와 가까운 백양사를 오가며 대선법계와 중덕법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후 세진 스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이일선 스님을 만나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37년 3월에는 금강산 표훈사 중향강원 강주로 부임하였으나 마침 이일선 스님이 제주에 파견되어 제주불교의 미래를 개혁하기 위한 사업에 돌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을 결심하게 된다.

1939년 2월 이세진 스님은 마침내 한림 포교당 포교사로 부임받으며 제주에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주도로 내려올 때 모시고 온 불상이 문화재로 지정된 월계사 소장 목조아미타불좌상이다.(제주문화유산답사회 구담 글)

그리고 그 해 4월 제주불교연맹이 발족하자 스님은 이 불교연맹의 교육부장을 맡아 개혁의 전방에 나서게 되었다. 제주불교연맹은 관음사 시내 포교당인 대각사에서 승가교육을 실사하여 50여명의 학인을 배출하고, 제주불교 통일기구로서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다.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일본이 정국을 전시 체제로 돌리면서 1941년 비구 수계식을 끝으로 해체되었다. 이처럼 대각사의 승가교육이 시대의 조류를 밀려 좌절되자, 스님은 불교가 시대와 권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경제적 자생력을 갖춰야 한다는 내장선원에서의 강령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신념의 발로가 결실을 맺은 것이 1942년 제주시 해안리에 창건된 서관음사였다. 서관음사 터는 많은 자료에서 도평동이라고 하고 있으나 도평동과 경계인 해안동 2239번지이다.

세진 스님은 본래 초가집이 있던 해안리 품 안엣 법당과 객실 한 채를 짓고 나머지 터에 기와공장을 세워 운영에 들어갔다. 기와공장은 세진 스님과 그 뜻에 동참한 청년 스님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협력으로 운영되었으며 스님은 이곳에서 생산된 기와를 직접 시장에 가지고 나가 판로를 개척하고 판매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강원을 설립하여 교육에 나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인 고제선 스님이 이곳 강원에서 1942년 12월부터 1945년 9월까지 내전 초등과와 중등과를 수료하기도 했다. 자체의 생산 활동을 통해 자립적 불교 강원을 세우고 승가의 자립을 이룩하고자 했던 스님의 꿈이 형상화된 것이다.

이렇게 서관음사의 개혁 운동이 불교계에 잔잔한 파급을 일으키며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이 개혁 세력들은 제주4·3에 연루되어 모두 희생되었는데 대표적인 스님이 바로 이세진 스님이다. 해방 이후 서관음사는 제주불교승려대회의 중추적 세력이었던 오이화, 이일선, 원문상 스님 등이 빈번하게 왕래하며 제주불교의 앞날을 고민하던 장소였다.(카페 무량심의 선방)

해방 이후 불교계는 제주사회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의 대회준비위원장으로 의안결정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일선은, 4·3사건 발발의 원인이 되는 1947년 '3·1절 기념 투쟁 제주도 위원회' 활동은 물론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하였다.(혜향문학회 카페)

이러한 근대제주불교를 이끌었던 주역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서관음사에서 이뤄진 승속의 지식인들이 시국토론 분위기는 이세진 스님으로 하여금 풍전등화의 기로에 놓인 제주의 문제에 적극 동참하게 만들게 된 계기가 됐다.

제주불교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함께 이세진의 혁신 사상 즉, 승과 속의 경계를 떠나 대중의 삶 속에서 불법을 찾고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려 했던 스님의 사상이 제주4·3이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무장대의 선봉에 서게 된 원인이라 보인다.

이세진 스님은 1948년 봄, 시위대 진압경찰의 무자비한 만행을 피해 마을 장정들과 함께 입산을 결행한다. 스님의 입산 목적은 무장대 활동을 위한 것이었다. 활동은 약 1년이다. 이 시기에 스님이 활동한 지역과 활동 내용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막연히 산왕, 무장대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등의 증언뿐이다.

당시 관음사에서 출가하기 위해 행자생활을 하고 있던 김광순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무장대의 도당사령부가 1949년 2월 관음사가 불태워지기 직전까지 경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증언자가 기억하고 있는 수뇌부는 15명 안팎이었다.

인민유격대장 이덕구와 이세진 스님, 그리고 장교로 보이는 몇 명의 군인과 민간인들이었다. 이들은 관음사에 남아 있던 승려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별채에서 생활하며 의식주를 해결했다.

이러한 가운데 1949년 2월 대규모 관음사 전투에서 무장대가 패하고 관음사가 전소된다. 토벌대는 1949년 1월 실시된 한라산 공습과 함께 관음사 일대에 은신해 있던 무장대를 습격하고 대부분 소탕하고 그 일대를 점거하게 된다. 그리고 1949년 2월 12일 관음사를 접수한 토벌대는 관음사를 방화, 전 건물을 전소시켰다.

4·3무장대의 핵심세력인 도당사령부는 관음사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3월, 하산하게 된다. 이때 스님은 포로로 붙잡혀 무장대의 활동을 마감하게 된다. 수갑을 찬 채로 잡혀온 스님은 제주시에 있는 주정공장에서 고문을 받는다. 몇 달 동안 수용생활을 하던 스님은 총살되기 직전 가까스로 이일선 스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죽음을 모면하게 된다.

당시 이일선 스님도 군경에 주목을 받고 있었으나 육지에서 파견된 장교 중 그의 상좌 김우송을 만나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세진 스님의 석방도 김우송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석방도 잠시, 스님은 1949년 7월 관음사에서 사복경찰에 붙잡혀 결국 총살된다.(한금순의 세미나 자료 또는 제주불교 120627 이병철 기자의 글에 의하면 수장되었다고 한다.) 당시 나이가 40세였다.(카페 무량심의 선방)

오늘날 서관음사는 과연 절이었는지도 분간할 수 없다. 절터는 지금은 감귤원이고, 2층짜리 시멘트 건물 하나가 대숲 속에 남아 있다. 1층은 석축인데 2층은 시멘트로 마감했다. 제주불교(120627 이병철 기자 글)에 따르면 이마저 폐사된 뒤 1970년대에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당시와 같이 남아 있는 것은 절을 창건할 때 만들었다는 우물뿐이다.

우물에는 시멘트로 고정된 덮개가 있어 옆으로 낸 구멍에서 물을 긷도록 되어 있다. 속을 들여다보니 그리 깊지는 않으나 물은 깨끗하게 보였다. 과수원 주인인 고태영(2015년 70세) 할아버지는 50년을 지켜봤지만 물이 마르는 걸 본적이 없다고 하며, 예전에 가물었을 때는 시내에서도 이 곳 물을 길러 왔다고 한다.(제주문화유산답사회 구담 글) 이 우물의 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길 건너 아래 쪽 밭에서 조금씩 흘러나와 연못을 이루고 있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도평동 사지는 제주시 도평동 마을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 일대를 ‘괘남절’이라 부른다. 괘남절 일대는 나지막한 구릉이 형성되어 있고 동쪽으로는 개천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 도평동 서한 산업 건물 서쪽 끝 일대에서는 간간이 기왓장이 분포, 수습되는 실정이다. 사찰 건물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일대에는 커다란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절 경내를 구분 지어 주었던 돌담들이 서한 산업 건물 주위에서 확인된다.

1990년 여름 대각사 법무와 강창언이 서한 산업의 진입로로 향하는 도로 옆에서 큰 주초석 한 개를 발견하였다. 이 주초석은 크기와 형태가 수정사지, 일과리 사지의 것과 흡사했다. 도평동 사지에서는 무문 수키와 3점이 수습되었다.

서한 산업 바로 앞쪽 과수원 일대에는 절물이 있는데, 이 절물 바로 뒤편 약간 구릉진 곳에는 1942년 이세진에 의해 창건된 서관음사가 있었다. 이세진은 원래 초가집이 있던 이곳에 법당과 객실 한 채를 짓고 나머지 터에 기와 공장을 세워 운영에 들어갔다. 자체 생산 활동을 통해 자립적 불교 강원을 세우고 승가의 자립을 이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세진은 이후 4·3 사건에 연루되어 총살당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이세진을 ‘산왕’이라 기억하며, 옛 절터를 괘남절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도평동 사지는 서한 산업 공장이 들어선 지역 일대뿐만 아니라, 이세진이 머물렀던 절물 윗 지경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또한 도평동 마을에는 “괘남절 종소리가 서울까지 들린다”라는 말을 기억하는 마을 원로들도 있다. 이는 괘남절의 위상이나 크기에 대한 주민들의 증언을 대신하는 말로, 인근의 서천암과 관련하여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곳 도평동 사지 서관음사에는 서천암에서 옮겨온 불상이 모셔져 있었으나 4·3 사건 당시 사찰이 불에 타 없어지면서 그 행방을 모르다가 최근 서천암 터 밭주인의 증언에 따라 그 불상이 인근의 광령리 돌나무 식당에 옮겨져 보관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도평동 사지의 서관음사 터는 대나무 숲으로 변해 있다. 서관음사가 전소된 이후 이곳에 살던 주민의 옛 집이 남아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작성 17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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