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경찰의 활동 과장 보고..남원1리 제2구경찰서 남원지서(移轉)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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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경찰의 활동 과장 보고..남원1리 제2구경찰서 남원지서(移轉)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11.02 0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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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대와 접전을 벌였으면 벌였다고 썼을 텐데 그렇게 쓰지 않아

남원1리 제2구경찰서 남원지서(移轉) 터

위치 : 남원읍 남원리 1339-2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건물(경찰서) 터

남원1리_1339_2남원지서터표석
남원지서_터

 

1923년 제주경찰서 경찰관주재소를 의귀리 1532번지에 신설하고 순사부장 이하 3명의 순사를 배치하고 면내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1925년 4월 5일에는 주재소를 남원리 1243번지로 이전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 조국이 광복되면서 제주경찰서 남원지서로, 1945년 10월 21일에는 제22구 경찰서 남원지서로, 1946년 12월 14일에는 제2구 경찰서 남원지서로 개칭하였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4월 3일 새벽 남원지서를 습격한 무장대는 10명이었으며, 99식 총 2정과 일본도, 죽창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무장대에게 첫 희생을 당한 사람은 대청단원으로서 지서 경비를 거들던 협조원들이었다.

협조원 방성화는 무장대가 지서 안으로 뛰어들면서 쏜 총알을 복부에 맞아 사망했고, 다른 협조원 김석훈은 각목과 칼에 맞았으나 가까스로 도망쳐 목숨을 구했다.

이어 무장대는 고일수 순경을 붙잡아 칼로 살해했다. 무장대는 마지막으로 지서 무기고를 부숴 미제 카빈 총과 공기총, 탄알 등을 탈취한 후 사라졌다.(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1948년 10월 28일에는 지서의 서녘 밭에서 남원면 중산간마을 주민 등 20~30여 명이 경찰에 의해 희생당하였다.(남원읍역사문화지)

1948년 11월 7일에는 당시 중산간 지역에는 경찰의 치안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을 때였는데 9연대 군인들이 남원면 의귀리·수망리·한남리를 토벌하는 데 남원지서 경찰들도 합류했다.(4·3은 말한다④)

1948년 11월 28일 아침 7시에 무장대가 남원지서를 습격했다. 당시 지서에는 응원경찰 20명을 포함해 약 30명의 경찰이 있었다. 무장대가 성담으로 둘러싸인 지서를 포위하자 경찰은 무장대가 물러갈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장대는 여러 시간 동안 마을을 휩쓸며 주민 30명 가량을 무차별 살해하고, 대부분의 집을 불태웠으며 식량을 약탈했다. 무장대는 같은 시간에 위미지서도 습격했다. 경찰보고를 인용한 미군측의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11월 28일 새벽 무장폭도 약 200명과 비무장폭도 500명이 남원리와 위미리를 공격했다. 보고에 따르면 주택 250채가 폭도들에 의해 방화되었으며, 민간인 50명이 사망했고, 민간인 70명과 경찰 3명이 부상당했다.

경찰이 폭도들에 반격을 가했으나 탄약 부족으로 철수해야 했다. 경비대 1개 중대와 경찰 30명이 서귀포에서 증파되어 폭도들을 공격했다. 최근 접수된 보고에 따르면 이 작전으로 폭도 30명이 사살되었고 3명이 생포되었다고 하며, 경찰은 1명이 부상당했다.〉

이 보고서는 경찰의 활동을 과장하여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경비대와 경찰이 증파되었다는 것은 이미 무장대가 퇴각한 다음인지 마을 안에서 약탈하고 있던 시간인지 시점이 확실하지 않다.

무장대와 접전을 벌였으면 벌였다고 썼을 텐데 그렇게 쓰지 않은 것을 보면 무장대가 퇴각한 후에 병력이 도착했을 것이다.

지서에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탄약부족으로 철수했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고, 무장대가 마을을 마음대로 활개치고 다니는 동안 나오지도 않았는데 30명을 사살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1949년 2월 13일에는 서귀포경찰서 남원지서로 개칭하였다.(4.3평화재단이 작성한 연표에는 2월 23일로 되어 있음)

1957년 10월 5일에는 남원리 82번지에 볼록슬레이트 건물을 지어서 지서를 이전하였으며,
1989년 12월 20일 지서의 구건물을 철거하고 콘크리트 슬래이브 건물을 신축하였다.

1991년 8월 1일에는 서귀포경찰서 남원파출소로 개칭되어 오늘이 이르고 있으며 관할 구역은 남원읍 관내 전지역이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남원지서 터에는 지금은 의원이 들어서 있고 도로변에 희생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지서를 둘러 쌓았던 성담은 흔적이 없다.
《작성 17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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