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9)-죽음의 길 앞에서 묘지명을 써주기로 한 약속을 지킨 우암(尤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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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9)-죽음의 길 앞에서 묘지명을 써주기로 한 약속을 지킨 우암(尤庵)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1.0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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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증주벽립(曾朱壁立)’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9. 죽음의 길 앞에서 묘지명을 써주기로 한 약속을 지킨 우암(尤庵)

우암(尤庵) 선생이 생전에 남긴 어록(語錄)은 대부분 그의 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 총 215권 102책이란 방대한 저술 속에 잘 담겨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신도비(神道碑) ‧ 유허비(遺墟碑) ‧ 묘갈명(墓碣銘) 등 비지문류(碑誌文類)가 600여 편이나 될 정도로 많은 양을 차지한다.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전무후무한 기록이라 할 만하다. 비지문은 한 가문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담은 역사와 선비로서의 자존을 알리는 바로미터(barometer)이기에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자랑이자 선현을 기리는 학문적 접근방식의 하나로 활용되곤 했다.

그가 최후로 남긴 비지문이 바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묘지명>이다.

우암이 83세의 고령임에도 제주도 유배를 떠났다가 석 달여 만에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 정읍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얼마 전 기사환국으로 진도에 유배 되었다가 사사(賜死)를 당한 김수항(金壽恒)의 자식들이 그의 유언을 전하길, “만일 우암 선생이 나보다 뒤늦게 돌아가신다면 나의 묘지문을 우암 선생께 부탁하라.”라고 했다는 내용을 전함이다.

이에 김수항의 둘째 아들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무려 5만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형인 김창집의 이름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 내용 가운데, “주희(朱熹)가 아니었다면 굴원(屈原)의 뜻이 다 밝혀지지 못했을 것이다.”란 점을 내세우며, 김수항(金壽恒)의 뜻을 온전히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뿐임을 강조함이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제 죽음을 앞둔 팔순 노인더러 묘비명을 써달라고 하는 부탁에 그는 대강 쓰지 않고 정성을 담아 완성해 건네주었다.

 

<그림 (14) >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초상화(천리대 소장본)

 

이로부터 엿새 뒷날 아침, 금부도사 권처경(權處經)이 사약을 가지고 정읍으로 내려왔음을 《숙종실록(肅宗實錄)》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참고자료] <문곡(文谷) 김공(金公)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

【원문(原文)】

嗚呼 此國東門之外栗北里 去石室大墓幾里而近者 文谷金公衣履之藏也 崇禎己巳 主上將有大處分 亟進用承順之人 則其諸類乘勢媒孼 公始謫珍島 其四月九日 承後命以終 壽命甲子一周也 臨命 意氣安閒 處置後事 訓戒子孫 纖悉無遺 又用朱子故事 追作高山一曲 八卦亭詩 以寓景慕栗 牛兩先生之意 其持守之固 涵養之深 不可誣矣 嗚呼 今日何處得來 公安東人 文正公石室老先生之 孫同知諱光燦之第三胤 妣延安金氏 考牧使琜 祖延興府院君懿愍公悌男也 老先生身任天下綱常 名聞華夷 第考其根基 則文公小學也 文公論眞正大英雄 必以戰兢臨履爲言者 益驗焉 公受家庭學 最主於小學敬身一篇 老先生在安東 書寄九容四勿以勉之 其所期待深且遠矣 公自少終日危坐 未嘗箕踞 肩背竦直 不少跛倚 以爲外面有些罅隙 則心志從而走失 文辭典雅 務去靡麗 老先生嘗識之曰 有用之文也 十七 出試泮宮 大學士澤堂李公取置上游曰 可以變近世文體也 明年 魁司馬試 間數年 不就場屋 留意性理諸書 以自培養 二十三 擢謁聖文科第一 朝廷賀得人焉 二十八 中重試陞通政 三十一嘉善 三十四資憲 辛亥 陞崇政 壬子 拜右議政 時年四十四 其間所履歷 無非極選 始爲臺諫 論事忤旨 及後筵講 恩顧日隆 其主文衡也 時論翕然 爭相速肖 以故至於入相而仍兼不遞 累拜吏判 登明選公 人不敢訾議 其爲相 自以爲無經濟才 古大臣事業 固不敢望 而至於輓近爲宰相者 君德闕失 不以爲己責 而一付之臺閣 此非輔弼匡救之義 故專以是自任焉 顯廟專任許積 然察公貞亮 可屬大事 故賓廳議禮之後 仲氏及諸官多被譴罰 而公旋拜左相 至於顧命之際 所以勉諭慰安者 極其丁寧 今上初服 禮貌愈隆 及賊鑴肆兇 或有不遜語侵及東朝 公以爲此關國家倫紀 不可不一爲上言之 以冀開悟 遂極論鑴 宇遠 嗣基等誣悖狀 群憾蝟起 反以公爲離間兩宮而遠謫南荒 先是明聖母后夜與上同御便殿 垂簾引積 痛哭而反復敎諭 因曰 予欲閉口不食而死 此出於至誠惻怛 而終無一人出而謝罪者 其心可謂路人所知也 庚申 楨 柟 堅 挺昌謀逆事覺 其黨或誅或竄 而鑴則上特命誅之 又囚其諸子 時公自謫所膺命主讞 率多平反 及如元楨赫然爲諸賊援引 則公以情節未著 卽請放釋矣 及後復出賊招 事益狼藉 雖欲救解而不可得矣 當是時 明聖聖母爲言金相累年竄逐之餘 按獄明允 少無乘快洩憤之意 可尙也 爾時奸兇旣誅 群賢彙征 咸以公爲領袖 上亦尊禮優異 公亦鞠躬盡瘁 聚精會神 以成元祐小康之治 而時議遽已掣肘矣 蓋誅除之功 實出士類中戚畹 而浮薄喜事之輩 務以深詆峻攻爲功 公以爲彼有安社稷之功 姑無顯然罪過 甚以排擯爲不韙 少輩恨公不與己同 始不快於公矣 昔宋相趙汝愚紹煕處置 實有名實逆順之勢 故朱夫子以爲大變 而然其捨死生安宗社 爲不世之功 故承命入朝 誠心協同 共奬王室 況今勳戚以忠討逆 非趙公所遭之比 然則今之攻公者 自謂賢於朱子耶 由是益與時輩背馳焉 及璽 瑛之獄 言者持金益勳益急 至或致疑於獄情 公以爲璽 瑛逆節 本無可疑 益勳詗察 實有所受 今以發告之不審 遂疑此獄爲無實 而欲深罪益勳則不可 於是時議益譁然 遂並攻與公同意者 輾轉乖激 以至尼尹之爭而極矣 蓋賊鑴始疵退 栗 牛三先生而轉斥朱子 遂至於不諱孔聖 此實斯文之亂賊 而尼尹挺身黨助 時亦陽擠陰護 愚不自量而痛觝之 公矜余才弱敵強 時有營救之言 時輩之不悅於公 於是尤甚 公受敎於老先生 以爲機關籠絡 心術之不正 調停彼此 事爲之深害 蓋朱子嘗曰 宋元憲籠絡之事 吾所不能 建中之調停 致亂之道 公之家法淵源 本來如此 故常以司馬公天若祚宋必無此事爲心 而以范忠宣陰爲他日自全之計爲戒 此其所以動與時議相背 而特被奸黨所仇嫉者也 夫朱子聖人也 公從朱子道而不獲其利 豈朱子之道非耶 公容貌端秀 每朝會 垂紳搢笏 張拱儼立 廷中咸目屬以爲人中之鸞鵠 虜使亦起敬稱贊云 推此以言 則家庭孝敬之篤 閨門倫理之正 人亦可以無間焉 嗚呼 劉 梁之死 天下悲之 呂 蔡之禍 至今冤訟 然知當時用事者何如人 則諸公之死 榮也非辱也 況今宣母被誣 聖姒廢辱 兩賢見黜於聖廡 公以此時死之 顧不亦榮乎 老先生嘗以詩贈我 勉以朱子之學 余亦竊觀其自爲者 要不出此矣 以故老先生諸孫 皆喜朱子書 而公尤服習 余嘗妄編大全箚疑而就正焉 則公樂與之證訂删潤而疵纇寡焉 公之所學 據此可見矣 朱子臨簀 授諸生眞訣曰 天地之生萬物 聖人之應萬事 直而已矣 翌日又曰 道理只是如此 但當堅固刻苦 此豈非孔孟人生直 以直養之正法耶 公之一生言行 無所屈曲回互者 其有得於此耶 其有得於此歟 銘曰

死有惡時 亦有榮時 嗟公之時 吾不敢知之

【해석(解釋)】

아, 동문(東文) 밖 율북리(栗北里)는 석실(石室 *김상헌(金尙憲))의 대묘(大墓)에서 몇 리 떨어진 곳인데, 그곳은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김공이 묻힌 곳이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懿宗)의 연호) 기사년(1689, 숙종15)에 상이 앞으로 큰 처분을 내리려고 급히 승순(承順)하는 사람을 진용(進用)하였는데, 그들의 동류가 형세를 타고 일을 꾸미었다.

공은 진도(珍島)로 귀양 갔다가 그해 4월 19일에 사약(賜藥)을 받고 졸하니 환갑 되던 해였다. 죽음에 임하여 의사와 기운이 편안하고 여유가 있어 뒷일을 처리하고 자손에게 훈계하기를 자세한 일이라도 빠뜨리지 아니하였고, 또 주자(朱子)의 고사를 인용하여 고산일곡(高山一曲)을 추작(追作)하고 팔괘정(八卦亭) 시를 지어 율곡(栗谷)ㆍ우계(牛溪) 두 선생을 경모(景慕)하는 뜻을 보이니 그 지조의 굳음과 함양(涵養)의 깊음을 속일 수 없었다. 아, 오늘날에 어디서 다시 만나 보랴.

공은 안동인(安東人)이다. 석실(石室) 노선생(老先生)의 손자이며 동지(同知) 휘(諱) 광찬(光燦)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 연안 김씨(延安金氏)의 아버지는 목사(牧使) 내(琜)이며, 조(祖)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의민공(懿愍公) 제남(悌男)이다.

노선생이 몸소 천하의 강상(綱常)을 담당하여 이름이 화이(華夷 *중화(中華)와 변방 국가)에 떨쳤는데 그 뿌리를 살펴보면 주 문공(朱文公 *문(文)은 주희(朱熹)의 시호)의 《소학(小學)》이니 주 문공이 논한, “진정한 대영웅은 반드시 전전긍긍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거나 살얼음을 밟는 것같이 한다.” 한 말이 이에서 더욱 증명된다.

공이 가정(家庭)의 학문을 받았는데 《소학(小學)》의 <경신편(敬身篇)>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노선생이 안동(安東)에 있으면서 구용장(九容章)과 사물장(四勿章)을 써서 부쳐 격려하였으니 그 기대한 바가 깊고도 멀다.

공은 어려서부터 온종일 걸터앉지 않고 꿇어앉았으며 어깨와 등이 똑바르고 조금도 몸을 기대거나 기울이지 않으면서 ‘외면에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심지(心志)를 잃게 된다.’ 하였다. 문사(文辭)는 전아(典雅)하고, 화려함을 힘써 없애니 노선생이 일찍이 ‘쓸모 있는 글이다.’ 하고 인정하였다.

17세에 반궁(泮宮 *성균관)에 나아가 시험을 보았는데 태학사(太學士 *대제학(大提學)) 택당(澤堂 *이식(李植)) 이공(李公)이 상등(上等)에 뽑아 놓고 말하기를, “근세(近世)의 문체를 변형시킬 것이다.” 하였다. 다음 해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고, 그 후 수년간은 장옥(場屋 *과거 시험장)에 들지 아니하고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책에 뜻을 두고 스스로를 배양(培養)하였다.

23세에 알성 문과(謁聖文科)의 제일(第一)로 뽑히니 조정에서는 인재를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28세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통정(通政)에 승직되고, 31세에 가선(嘉善), 34세에 자헌(資憲)이 되고, 신해년(1671, 현종12)에는 숭정(崇政)에 승직되고, 임자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나이 44세였고, 그사이의 경력은 모두 현요직(顯要職)이었다.

처음 대간(臺諫)이 되어 일을 논의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렀으나 그 뒤 경연(經筵) 강의에서 은총이 나날이 높아졌다. 문형(文衡)을 주관할 때 시론(時論)이 화합하여 서로 다투어 본을 받았기 때문에 재상이 되어서도 그대로 겸임하고 갈지 않았으며, 여러 번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등용하고 뽑아씀이 밝고 공정하니 사람들이 감히 헐뜯는 의론을 하지 않았다.

재상이 되어서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경제(經濟)의 재주가 없으니 옛 대신의 사업은 감히 바라볼 수 없으나 근래의 재상된 사람들이 군덕(君德)의 궐실(闕失)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지 않고 하나같이 대각(臺閣)에 떠맡기니 이것은 보필(輔弼)하고 바로잡는 의(義)가 아니다.” 하고, 오로지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현종은 허적(許積)에게 전임하였지만, 공이 바르고 성심이 있어 큰일을 부탁할 만함을 알았기 때문에 빈청(賓廳)에서 예(禮)를 의논한 뒤 중씨(仲氏 김수흥(金壽興))와 여러 관리가 많이 귀양 가거나 벌을 받았는데도 공은 도리어 좌상에 임명되었고, 고명(顧命) 때에도 매우 정녕하게 면유(勉諭)하고 위안하였다. 금상(今上)께서도 처음 즉위하여 더욱 융숭하게 예우(禮遇)하였는데 적휴(賊鑴 *윤휴(尹鑴)를 말함)가 흉포를 자행하여 혹 불손한 말로 동조(東朝 *명성왕후를 말함)를 헐뜯으므로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국가의 윤리 기강에 관계되는 것이니 일차 주상에게 말하여 깨닫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윤휴(尹鑴)ㆍ홍우원(洪宇遠)ㆍ조사기(趙嗣基) 등의 무패(誣悖)한 형상을 극론(極論)하니 군중의 감정이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도리어 공을 양궁(兩宮 *숙종과 모후인 명성왕후)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하며 남쪽 끝으로 멀리 귀양 보냈다.

이보다 앞서 명성모후(明聖母后 *현종비 김씨)가 상과 함께 편전(便殿)에서 수렴(垂簾)하고 허적(許積)을 접견하면서 통곡하며 반복하여 교유(敎諭)하고 이어 이르기를, “내 음식을 전폐하고 죽고 싶다.” 하였으니, 이것은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인데 끝내 한 사람도 나가 사죄함이 없으니 그 심사는 길 가는 사람이라도 알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경신년에 정(楨)ㆍ남(枏)ㆍ허견(許堅 *허적의 서자)ㆍ오정창(吳挺昌 *정(楨)ㆍ남(枏)의 외숙)의 역모를 꾀한 사실이 발각되어 그 당이 혹 처형되고 혹 귀양 갔는데 윤휴는 상이 특명하여 죽이고 또 그의 모든 아들을 가두었다.

이때 공은 적소(謫所)에서 명을 받고 옥사를 주관하면서 거의 평반(平反)하였고, 이원정(李元楨)ㆍ유혁연(柳赫然) 같은 자는 여러 적도와 호응하였으나 공은 정상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고 석방하기를 청하였는데 뒤에 다시 적도의 공초에 나와 일이 더욱 심하여 비록 구하여 풀어 주려 하여도 할 수 없었다.

이때 명성모후(明聖母后)가 이르기를, “김상(金相)이 여러 해 귀양 다녔는데도 옥사(獄事)를 밝고 진실하게 처리하고 조금도 통쾌하게 분풀이하는 의사가 없으니 가상하다.” 하였다.

이때 간흉(奸凶)은 이미 벌을 받았고 군현(群賢)이 무리 지어 나아가니 모두 공으로 영수(領袖)를 삼았고, 상도 특별히 예우함이 우이(優異)하니 공 역시 몸과 마음을 다 바치어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의 소강(小康) 치적을 이루었으나 시의(時議)에 견제받았다. 대체로 벌주고 제거한 공(功)은 실로 사류 중의 외척에서 나왔다.

그런데 부박(浮薄)하고 일을 좋아하는 무리들은 힘써 깊이 욕하고 준열하게 공격하는 것으로써 공(功)을 삼았는데 공은 생각하기를, “저들이 사직(社稷)을 편안히 한 공(功)은 있어도 아직 두드러진 죄과(罪過)는 없으니 심하게 밀어서 쫓아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래서 젊은 무리들이 공이 자기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는다고 한(恨)하며 비로소 공을 불쾌하게 여겼다.

옛 송(宋)의 재상 조여우(趙洳愚)가 소희(紹煕 *광종(光宗)의 연호) 연간에 처리한 일은 사실 명분과 실제가 순(順)함을 거역하는 형세가 있으므로 주자(朱子)가 대변(大變)이라 여기면서도, 그 죽고 삶을 생각하지 않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킨 것은 불세출의 공이 되므로 명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성심으로 협동하여 함께 왕실을 도왔다.

더욱이 지금은 훈척(勳戚 *김우명(金佑明)을 가리킴)이 충성으로 반역을 토벌하였으니 조공(趙公)의 입장과는 견줄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공을 공격하는 자는 스스로 주자(朱子)보다 어질다고 여기는 것인가. 이런 까닭에 더욱 시배(時輩)와 배치(背馳)하게 되었는데 허새(許璽)ㆍ허영(許瑛)의 옥사(獄事)를 말하는 자는 김익훈(金益勳)을 갈수록 심하게 몰아세워 심지어 옥사의 실정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공은 말하기를, “허새ㆍ허영의 반역한 죄상은 본디 의심할 것 없고 김익훈(金益勳)이 정탐한 것은 사실 부탁 받음이 있었는데, 고발한 것이 정확하지 못하다 하여 이 옥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김익훈(金益勳)에게 심한 죄를 주려 함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그래서 시의(時議)가 더욱 시끄러워져 마침내 공과 동의하는 자까지 함께 공격하여 갈수록 어그러지고 과격하게 되었는데 이윤(尼尹 *윤증(尹拯))의 논쟁이 더욱 극도에 이르렀다. 대체로 적휴(賊鑴)가 퇴계(退溪)ㆍ율곡(栗谷)ㆍ우계(牛溪) 세 선생을 헐뜯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아가 주자(朱子)를 배척하고 마침내 공자(孔子)까지도 휘(諱)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기에 이르러서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었다.

그런데 이윤이 그 당(黨)을 도우며 때로는 겉으로 배척하는 척하면서 몰래 보호하므로 내가 자신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였다. 그러자 공이 나의 재주는 약한데 적이 강함을 안타깝게 여겨 때로 구해 주려는 말을 하니 시배(時輩)들이 공을 더욱 좋지 않게 여겼다.

공이 노선생에게 배우기를, “술수를 부리는 것은 심술이 올바르지 못하고 이것과 저것을 조정하는 것은 일하는 데 매우 해롭다.” 하였고, 주자도 일찍이 말하기를, “송원헌(宋元憲)의 농락을 나는 하지 못하고, 건중정국(建中靖國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의 조정은 난을 불러오는 방법이다.” 하였으니 공의 가법(家法) 연원(淵源)이 본래 이러하였다.

그러므로 항상 사마 온공(司馬溫公)의, “하늘이 만약 송(宋)을 도운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한 말을 마음에 두고, 범충선(范忠宣)이 몰래 후일의 안전을 도모한 것으로 경계를 삼았으니, 이것이 시의(時議)와 서로 배치되고 특별히 간당(奸黨)의 원수같이 미워함이 된 것이다.

무릇 주자는 성인(聖人)이라 공이 주자(朱子)의 도(道)를 따르다가 그 이익을 얻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주자의 도가 나쁜 것일까.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하여 매번 조회(朝會) 때 띠를 매고 홀(笏)을 꼽고 공수(拱手)하고 엄연히 서 있으면 정중(廷中)이 모두 주목하며 ‘사람 가운데 난곡(鸞鵠)이다.’라고 하였고, 노사(虜使) 역시 공경하며 칭찬하였다 한다.

이것을 미루어 말한다면 가정의 효성과 공경의 독실함과 안방의 윤리가 올바른 것은 남들이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아, 유지(劉摯)와 양도(梁燾)의 죽음은 천하가 슬퍼하고 여자약(呂子約)ㆍ채계통(蔡季通)의 화(禍)는 지금도 원송(寃訟)하니, 그렇다면 당시의 책임자가 어떤 사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제공(諸公)의 죽음은 영화이지 욕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선모(宣母)가 무고당하고 성사(聖姒)가 폐욕(廢辱)을 당하고 양현(兩賢)이 성무(聖廡)에서 쫓겨났으니 이러한 때 죽은 공은 영화롭지 않겠는가. 노선생이 일찍이 시를 나에게 주어 주자의 학문으로 나를 권면하였는데, 나 또한 가만히 보면 그분이 스스로 한 것도 요약하면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노선생의 제손(諸孫)이 모두 주자서(朱子書)를 좋아하였고 공은 더욱 일삼아 익혔다. 내가 일찍이 망녕되게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편집하여 교정을 청하였더니 공이 기꺼이 함께 고증 산삭하여 흠됨이 적었으니 공의 학문을 여기에 의거하여 알 수 있다.

주자가 운명할 때 제생에게 진결(眞訣)을 주었는데, “천지가 만물을 생성함과 성인이 만사에 응함은 직(直)일 뿐이다.” 하였고, 다음날 또, “도리(道理)는 다만 이러할 뿐이니 마땅히 굳게 각고(刻苦)하라.” 하였으니, 이 어찌 공자와 맹자의 ‘사람 삶은 곧다. 곧음으로 길러야 한다.’는 정법(正法)이 아니겠는가.

공의 일생 언행(言行)이 굴곡(屈曲)하고 회호(回互)됨이 없는 것은 아마도 여기에서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얻은 것이리라.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죽음에는 나쁜 때도 있고 / 死有惡時
영예로운 때도 있다 / 亦有榮時
아 공이 서거한 때가 어떤 때인지 / 嗟公之時
내 감히 알지 못하겠네 / 吾不敢知之

 

<그림 (15)> 송우암수명유허비(宋尤庵受命遺墟碑) (※전북 정읍시 우암로 54-1)

 

 

10. 우암(尤庵)의 사적지

(1) 우암사적공원(대전시 동구 충정로 53)

남간사(南澗祠)로 대표되는 우암사적공원은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흥농서당(興農書堂)과 남간정사(南澗精舍)를 세워서 많은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연구하던 장소이다.
 
특히 이곳에선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 정책을 강구했을 뿐만 아니라, 정절서원(靖節書院)과 우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종회사(宗晦祠)가 자리하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는 남간정사와 더불어 이직당(以直堂), 소제동에서 옮겨온 기국정(杞菊亭) 등이 남아있고, 선생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 목판이 장판각(藏板閣)에 보관되어 있다.

<그림 (16)> 남간정사(南澗精舍)

 

한편 자연주의 사상을 읊은 그의 시조시 한 수는 절로 풍류의 흥취를 자아낸다.

“청산(靑山)도 절로 절로, 녹수(綠水)도 절로 절로 /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간(山水間)에 나도 절로 /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2) 괴산(槐山) 송시열 유적(※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화양계곡은 속리산국립공원 내에 있는데, 충청북도 괴산 ‧ 청주 ‧ 보은 등의 주변에서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한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곳 화양동(華陽洞)이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 중 하나로 알려짐은 바로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萬東廟)가 있어서인데, 특히 우암이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된 사연은 이경억(李慶億)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그림 (17)> 화양구곡(華陽九曲) 중 4곡(四曲) - 금사담(金沙潭)과 암서재(巖棲齋)

 

그런데 그의 부친 이시발(李時發)은 통역관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군(援軍)을 잘 안내하였고, 특히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진압하는 등 공이 컸기에 선조는 그에게 화양동 일대와 진천군 초평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한다.

그러고 보면 화양계곡이 위치한 화양동 일대는 원래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소유지였던 곳이다. 이경억이 자신의 아호를 ‘화곡(華谷)’이라 지어 부름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임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경억은 돌아가신 자기의 부친과 조부의 비문을 써줄 것을 송시열에게 요청하게 되고, 이에 송시열이 이경억에게 비문을 써주면서 화양동을 자기의 거처로 삼을 수 있도록 대여(貸與)를 요청해 허락을 얻어낸다.

마침내 송시열이 화양동에 둥지를 틀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어찌 보면 이경억이 부친, 조부의 비문과 화양동 일대를 맞바꾼 셈이다. 실제로 진천군 초평면 양지마을에는 당시 송시열이 쓴 이경억의 조부 이대건과 부친 이시발의 비가 ‘쌍오비각(雙梧碑閣)’이라 하여 나란히 전해지고 있다.

<그림 (18)> 화양구곡(華陽九曲) 중 2곡(二曲) - 운영담(雲影潭)

 

우암 사후에 특히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렀던 화양계곡에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가 이곳 화양계곡의 빼어난 경치를 두고서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 명명하고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이 각자(刻字)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고 보면 ‘화양구곡’이 자연스레 중국 송나라 때 주자(朱子)가 지은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을 연상케 한다. 화양천을 따라 3km에 걸쳐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며 제1곡 경천벽부터 제9곡 파곶까지 구곡(九曲)의 경관이 제각기 빼어나다.

결국 화양서원(華陽書院)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렀던 터에 세운 서원인 셈이다. 조선시대 기호학파 학자들이 많이 모여 학문 탐구는 물론 효종대(孝宗代)의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 정치의 산실이자 민족자존의 정신을 구현하던 곳이기도 하다.

더욱이 만동묘(萬東廟)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서 ‘재조지은(再造之恩)’과 ‘충효절의(忠孝節義)’를 상징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이름의 유래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고사성어에서 따온 것이다.

<그림 (19)> 화양계곡 암각명 ‘萬折必東(만절필동)’과 ‘화양서원(華陽書院)’

 

참고로 우암 송시열 묘소에서 이곳 화양계곡 입구까지는 8km 정도의 거리로서 자동차로 약 15분가량 소요된다. 계곡 입구의 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한 후 다시 도보로 1km 정도의 거리를 이동해야 화양서원에 닿을 수 있다.

 

11. 송자(宋子)로 추앙된 오현(五賢)의 한 사람, 성균관 문묘(文廟)에 공자(孔子)와 함께 배향된 인물

‘오현(五賢)’이란 이름은 비단 제주에서만 통용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서양에서는 이 말이 심지어 고대 로마시대로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곧 3세기 고대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끈 5명의 현명한 황제를 두고서 오현제(五賢帝, Five good emperors)라고 명명해 부르는 게 바로 그것이다.

눈길을 동양으로 돌려보면 중국 송(宋)나라 때 학자 주자(朱子)의 오현사(五賢祠)가 대표적 사례로 다가온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보면, 순희(淳熙) 6년 기해년(1179, 고려 명종9)에 주자가 지남강군사(知南康軍事)가 되어 염계(濂溪) 주 선생(周先生)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정(二程;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선생을 배향하고, 별도로 오현당(五賢堂)을 세워, 도잠(陶潛) ‧ 유환(劉渙) ‧ 유서(劉恕) ‧ 이상(李常) ‧ 진관(陳瓘) 등 5인을 제향하였다고 했다.

이에 조선의 선비들도 이를 본받아서 주자가 별도로 오현사(五賢祠)를 세운 사례에 의거해 따로 사당을 세워 당대 빼어난 선비 다섯 분을 제향하기 시작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참고로 송(宋) 이종(理宗) 때의 오현은 주돈이(周敦頤) ‧ 정호(鄭顥) ‧ 정이(程頤) ‧ 장재(張載) ‧ 주희(朱熹)를 꼽기도 했다.

조선조 선조(宣祖) 6년(1573)년 8월에 성균관 생원들이 올린 오현(五賢)의 문묘배향 상소문이 기록상 ‘오현(五賢)’의 시발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추향된 조선(朝鮮)의 오현(五賢)이란 (1)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2)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3)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4)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5)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선조가 후일 공론이 정해지기를 기다린 다음에 종사하자고 미룬 게 40년이 지났다. 광해군 2년(1610)이 되어서야 비로소 문묘에 종사하게 되었다.

광해군 시절 실세였던 북인의 정인홍(鄭仁弘)이 자신의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단점을 지적한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거론하며 오현의 명단에서 뺄 것을 주장하며 이들을 헐뜯기도 했다.

이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등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경기도 광주목사로 좌천되어 나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임헌회(任憲晦)는 《오현수언(五賢粹言)》이란 책을 통해, 이들 오현의 문집에서 명문을 발췌해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임헌회가 선정한 ‘오현(五賢)’의 다섯 인물이란, 곧 (1) 덕치(德治)로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2) 도학(道學)으로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3) 학문(學問)으로서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4) 예학(禮學)으로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5) 의리(義理)로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대표적 인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림 (20)>임헌회(任憲晦)의 <오현수언(五賢粹言)> 본문

 

결국 한때 송자(宋子)로 불리기도 했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제주 오현의 인물 중 그 일원일 뿐만 아니라, 이처럼 중앙 조정의 오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당당히 추앙의 대상에 등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우암 송시열 편> 끝)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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