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후대가 끊긴 가호만 5호..한남리 빌레가름(잃어버린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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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후대가 끊긴 가호만 5호..한남리 빌레가름(잃어버린마을)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11.13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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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명의 주민들 그 때의 비극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빌레가름으로 돌아오지 않아

한남리 빌레가름(잃어버린마을) 터

위치 ; 남원읍 한남리 937-1. 938번지 일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마을 터

 

한남리_빌레가름마을터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있는 제주4·3사건 관련 유적이다. 빌레가름은 한남리 본동에서 약 2㎞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1845년경 제주 고씨 네 형제가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었었다.

‘빌레가름’이란 지표면 바로 밑에 암반이 널려 있는 데서 유래한다.

빌레가름에 전해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260여년 전 제주고씨 시조 고을라 70대손 복성(福星) 삼읍유림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三邑儒林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와 진원(振遠) 향공진사도훈장(鄕貢進士都訓長) 부자가 서귀 서홍리에 살았는데 아들 진원이 정의현청 교수관으로 재직할 당시 서홍리와 성읍리 중간 쯤 되는 냇가 마을에 현(玄)씨 집성촌이 있어 종종 그곳에서 밤을 지내곤 한 인연으로 그곳의 한 규수와 혼인을 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어느날 갑자기 진원이 세상을 떠나니 현씨 부인은 친가에 의탁하고 살아가던 중 한 지관이 이르길, 한남리 아무터가 백년대계할 집터라고 일러줬다. 한동안 잊어버리고 지내다가 집안에 잦은 우환이 있어 가세가 기우니 1846년에 장성한 두 아들을 데리고 이주를 했다.

와 보니 사람 살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었다. 있느니 암반만 질펀할 뿐,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암반 틈에 서 있는 두 그루의 동백나무 밑둥에 짚을 둘러 <ᄎᆞᆷ>을 만들어 그 물을 마시며 개척하여 나가면서 주변에 동백나무 울타리를 조성하는 한편 아들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쳤다.

이에 이들이 장성하여 후손을 보니 벌족하게 되었고 유림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제주마을답사기]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첫번째이야기|작성자 훈장, 의귀초 16회 동창회 카페)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며 살아가면서도 유림촌으로 알려졌던 빌레가름 주민들은 4·3사건 발발 이후인 1948년 11월 7일 군경의 초토화작전으로 인명희생과 함께 가옥은 모두 불태워져 삶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렸다.

1948년 11월 7일 불시에 마을에 들이닥쳐 가옥을 소각하던 토벌대는 미처 피하지 못한 노약자 등 4명의 주민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또 산속 피난과정에서 토벌대에 발각된 주민들은 현장에서 총살당하거나 군부대에 끌려가 희생되었다. 약 24가호에 100여 명의 주민이 살았던 이 마을의 4·3사건 희생자는 25명으로, 주민 4명 중 한 명꼴로 희생되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이후 주민들은 ‘제안이곱지’ 등의 서중천 하천변 궤[작은 동굴]나 거린오름 뒤편 ‘고냉이든밧’ 등의 깊은 숲속에 몸을 숨겨 힘든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 4·3사건의 풍파 속에 흩어져 살아남은 한남리 주민들은 1953년 한남리가 현재의 리사무소로 재건되며 이곳으로 모여 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1953년경 한남리 본동에 성을 쌓고 재건했으나, 본동과 멀리 떨어져 있던 ‘빌레가름’은 복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해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서귀포신문 2002.04.04.) 2002년 4월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위원장 제주도지사]에서 ‘잃어버린 마을’ 표석을 세웠다.

지금은 대부분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옛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나무 숲이나 올레 등이 조금씩 남아 있고,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세워져 옛 마을 터임을 짐작케 할 따름이다.

한남리 937-1번지 지하수 관정 동쪽에 세워진 잃어버린 마을 표석 문안은 아래와 같다.


〈잃어버린 마을 빌레가름〉


이 곳은 1948년 11월 7일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남제주군 남원읍 한남리 빌레가름 터이다. ‘빌레가름’이란 지표면 바로 밑에 암반이 널려 있는 데서 유래한다.

1845년 무렵 제주 고씨 네 형제들이 처음 이 곳에 삶의 둥지를 튼 이래 24가호 130여 명의 주민들이 고나물[당시 식수원] 인근인 이곳에 고씨 집성촌을 형성하고 불모지를 일구어 보리, 조, 밭벼, 콩 등 농사와 목축을 생업으로 하여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4·3의 광풍은 이 마을에도 여지없이 불어닥쳐 마을이 전소되었으며, 주민들은 거린오름 기슭이나 서중천 주변에 흩어져 몸을 숨기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이 와중에 25명이 희생되었고 후대가 끊긴 가호만도 5호가 된다.

1953년 한남리가 현재의 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재건되면서 남아 있는 100여 명의 주민들은 그 때의 비극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빌레가름으로 돌아오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억울하게 희생된 고혼들을 신원하고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연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상생의 염원을 모아 이 표석을 세운다. 2002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작성 17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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