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6).. 겸재 정선의 '석실서원(石室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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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6).. 겸재 정선의 '석실서원(石室書院)'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1.26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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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한편 장동김씨(壯洞金氏) 집안의 가계도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그림 ()> 장동김씨(壯洞金氏) 김문일가 가계도

 

(2)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의 묘소

청음 김상헌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번지에 소재해 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의 묘소와 함께 증조부(曾祖父)인 김번(金璠), 조부(祖父)인 김생해(金生海), 양부(養父)인 김대효(金大孝), 양자(養子)인 김광찬(金光燦)과 각 부인의 묘가 합동으로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청음 선생의 묘소는 그곳 가운데에 있다.

<그림 ()> 장동김씨(壯洞金氏) 김번(金璠)과 그 후예(後裔)의 묘

 

이곳의 안내도(案內圖)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곳은 안동김씨선조(安東金氏先祖) 분산(墳山)으로서 태사공(太史公) 휘(諱) 선평(宣平)을 시조로 하는 안동김씨(安東金氏) 후예(後裔) 중 조선시대(朝鮮時代) 한양(漢陽)의 장동(壯洞, 현재 서울의 궁정동 ‧ 청운동 ‧ 누상동 일대)에 복거(卜居)함으로써 장동김씨(壯洞金氏)라 불렸던 안동김씨 12세조 서윤공(庶尹公) 휘(諱) 번(璠)과 그 후예의 선영(先塋)이므로 ….”

그런데 그의 묘소 앞에는 여느 관인(官人)의 묘와는 다르게 당연히 있을 법한 우람한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지 않고, 다만 묘갈명(墓碣銘)을 적은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져 있다.

대개 신도비란 왕이나 정2품 이상 고관의 무덤 앞 혹은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알 수 있게 하고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청음이 생전에 자신의 무덤 앞에 신도비를 세우지 말 것을 후손에 명하였다고 한다.

다만 자신이 직접 지은 묘지명에 ‘자신이 행한 일은 한 점 부끄러울 게 없으며, 먼 후대에는 자기의 뜻을 알아줄 것’이라는 요지의 짤막한 구절만 써놓은 채 이를 돌에다 새겨 자신의 무덤 속에 파묻도록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청음 김상헌 선생은 효종 3년(1652) 6월 25일 양주(楊州)의 석실(石室) 별서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향년 83세였다.

<그림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의 묘소를 찾아 배례하는 필자

 

《효종실록(孝宗實錄)》(권8), ‘효종 3년(1652) 6월 25일’조에 실린 <졸기(卒記)>를 보면 이렇다.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좌의정(左議政) 겸 영경연사(領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세자부(世子傅) 김상헌(金尙憲)이 양주의 석실(石室) 별장에서 죽었다. (중략)

김상헌은 자는 숙도(叔度)이고, 청음(淸陰)이 그의 호이다.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고, 안색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오십 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였고, 어렵게 여겼다. 김류(金瑬)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叔度, *김상헌의 자)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 하였다.

광해군 때에 정인홍(鄭仁弘)이 죽은 바른 신하 이황(李滉)을 모함하여 욕하자, 이에 임금에게 변론하였다. 윤리와 기강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문을 닫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 <야인담록(野人談錄)>을 저술하여 뜻을 나타냈다. (중략)

병자년 난리에 남한산성에 호종해 들어가, 죽음으로써 지켜야 된다는 계책을 힘써 아뢰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보내 청나라와 화해를 이루기를 청하니, 상헌이 통렬히 배척하였다.

성(城)을 나가기로 의논이 결정되자, 최명길(崔鳴吉)이 항복하는 글을 지었는데, 김상헌이 울며 찢어버리고, 들어가 임금을 보고 아뢰기를, ‘임금과 신하는 마땅히 맹세하고 죽음으로 성을 지켜야 합니다.

만에 하나 이루지 못하더라도 돌아가 선왕을 뵙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는 물러나 엿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아니했다. 또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구하여 죽지 않았다.

임금이 산성을 내려간 뒤 상헌은 바로 안동의 학가산 아래로 돌아가 깊은 골짜기에 몇 칸 집을 지어놓고 숨어 목석헌(木石軒)이라 편액을 달아놓고 지냈다. 늘 절실히 분하게 여기고 탄식하는 마음으로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중략)

죽을 때 나이는 여든 셋이요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어지는 글은 ‘사신은 논한다.’의 글이다.

“‘문천상(文天祥)이 송(宋)나라 삼백 년의 정기를 거두었다.’고 했는데, 세상의 논자들은 ‘문천상 뒤에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3) 석실서원(石室書院) 터

석실서원(石室書院)은, 현재 안동김씨 분산(墳山)이 있는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남양주시 와부읍 수석동의 석실(石室)마을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현재는 그곳의 존재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철되어 없어졌기에 실제로 석실서원의 터를 비정(比定)함에 있어 어려움을 토로하는 학자들도 있는 형편이다.

안동김씨 가문 중 그 일문이 안동(安東) 풍산현(豐山縣)에서 한양으로 입성해 경화거족(京華巨族)으로 변모한 시기는 대개 김상헌의 증조부인 김번(金璠) 때라고 봄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백악산 밑의 현 궁정동에 집터를 마련함으로써 장동김씨(壯洞金氏) 일가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장동김씨의 별서(別墅)가 있는 곳으로 와부읍의 석실마을이 정해지면서 이곳이 장동김씨의 세거지(世居地)로 변모하게 된다.

석실서원이 건립된 배경은, 인조(仁祖) 때 서인(西人)의 중신으로 활동하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1561~1637)과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효종 7년(1656) 지방 유림의 공의를 모아 창건한 서원이다. 곧 김상용 ‧ 김상헌 형제의 연고지인 석실마을에서 이들을 추승하는 사묘(祠廟)를 설치하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석실서원의 위치를 고증해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인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중의 <석실서원(石室書院)> 그림이 현존하고 있음이다.

<그림 ()>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그린 석실서원(石室書院)(*소장처:간송미술관)

 

이 그림 속 왼쪽편으로 위치한 건물들이 석실서원이고, 화제(畫題)인 ‘미호(渼湖)’는 석실서원 및 삼주삼각산과 미사리 사이의 호수처럼 보이는 한강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그가 지은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에서 “아, 석실 선생(石室先生, * 김상헌)같은 분은 이른바, 천백년에 한 사람씩 나는 인물인데, 또 선원 선생(仙源先生, * 김상용)까지 있었으니, 한 가문의 천륜(天倫)이 성대하기도 하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림 ()>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초상화(천리대 소장본)

 

한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죽자 아우인 청음 선생은 형의 행장(行狀)인, <나의 큰형님 우의정(右議政) 선원 선생의 행장[伯氏右議政仙源先生行狀]>을 직접 지었다.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선생보다 열 살 아래였는데도 평소 병약하였으며, 선생은 기운이 왕성하고 음식을 잘 드셨으므로 백 세까지 사실 것으로 여겼다.

나 상헌은 세상 사람들에게 버려진 뒤 요행히 시골에서 오래도록 숨어 살 수 있었으니 선생께서 마침내 은퇴를 허락받았다면 말년의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이 어그러져 남은 생에 선생을 모시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몸이 병들어 쓰러져 시신이 쌓여있는 곳에 가서 선생의 시신을 찾아보지도 못하였다. 살아서는 형제간이었으나 죽어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행인처럼 되었으니, 하늘이여,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아, 애통하고도 애통하도다.”

애당초 석실서원에 처음 배향되던 인물은 김상용과 김상헌 두 사람만이었다. 그런데 그 후 향사(享祀)의 대상이 확대되는데, 당쟁(黨爭)의 양상에 따라 추배(追配)와 출향(黜享)이 거듭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숙종 21년(1695)에 예조참의 이징명(李徵明)의 건의에 따라, 김수항(金壽恒, 1629~1689), 민정중(閔鼎重, 1628~1692),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을 추가로 배향할 것을 임금께 상주하여 2년 뒤에 그들의 배향이 결정되었고, 숙종 36년(1710)에는 다시 추가로 김수항(金壽恒)의 차자(次子)인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배향되기에 이른다.

아울러 뒤이어 김수항의 3자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 김원행(金元行, 1702~1772), 김이안(金履安, 1722~1791)이 추가배향이 이뤄졌고, 최종적으로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배향이 결정되었다.

결국 석실서원의 배향 인물들이란 처음에는 서인(西人)계열로 시작해서 노론계로 이어졌으며, 노론 학맥의 분화과정에서 다시 낙론계의 이념적 공간으로 명성을 떨친 셈이 되었다. 그러다가 고종 5년(1868)에 단행된 대원군의 서원 혁파 대상에 올라 철폐되어 완전히 훼철되고 말았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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