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7).. ‘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청음 김선생 목석거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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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7).. ‘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청음 김선생 목석거 유허비)’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1.28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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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4) 청원루(淸遠樓) 및 목석거(木石居) (경북 안동시 풍산읍)

 

<그림 ()> 안동김씨 종택 전경(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소재)

 

병자호란 뒤에 청음 선생은 안동으로 낙향(落鄕)하였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가면, 안동김씨(安東金氏) 종택과 함께 청음 선생의 증조부 김번(金璠)이 살았던 청원루(淸遠樓)가 있다.

‘청원루’란 명칭은 북송 때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의 ‘향원익청(香遠益淸)’이란 말에서 따왔다는 설과 함께 ‘청(淸)나라를 멀리한다[遠]’란 뜻이 담겨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필자가 청원루를 찾았을 때는 보수공사 중이었음)

청원루에서 머물던 청음 선생은 그곳 소산리에서 북쪽으로 8㎞쯤 떨어진 서미마을로 거처를 옮겼는데, 학가산(鶴駕山) 자락에 초가삼간을 지어 ‘목석거(木石居)’라는 당호를 내걸었다.

학가산 봉우리 아래로 큰 너럭바위가 드러나 있는데, 일명 ‘중대(中臺)’라고도 불린다. 바위 전면에 ‘木石居(목석거)’란 세 글자가 암각(巖刻)되어 있고, 이에 덧붙여서 청음 선생 칠세손(七世孫) 되는 김학순(金學淳)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왔을 때인 경진(庚辰, 1820)년 음력 2월에 새겨놓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림 ()> 목석거(木石居) 바위 위 청음 선생 유허비각

 

본래 이 ‘목석거(木石居)’란 말의 출처는, 《맹자(孟子)》 <진심장(盡心章) 상(上)>편에 나오는 말이다.

“순임금이 깊은 산속에 살 때는 나무와 바위 사이에 거처하고 사슴이나 멧돼지와 상종하였으니, 깊은 산속의 야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舜之居深山之中 與木石居 與鹿豕遊 其所以異於深山之野人者幾希]”라고 한 대목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청음 선생은 사슴이나 멧돼지 대신에 원숭이와 학을 대두시켜 상종하였음을 시문에 밝히고 있기도 하다.

청음 선생이 지은 시 가운데 ‘서쪽 시냇가에 있는 초당(草堂)에서 우연히 읊다[西磵草堂偶吟]’란 칠언절구(七言絶句)가 있다. 바로 이곳 목석거에서 지은 시로서 그 특성을 잘 담아내어 표현하고 있다.

 

○ 서간초당우음(西磵草堂偶吟) - 청음(淸陰)

石室先生一角巾 / 석실 선생, 머리 위에 일각건(一角巾) 쓰고서

暮年猿鶴與爲羣 / 늘그막에 원숭이와 학, 무리 지어 놀았네.

秋風落葉無行跡 / 가을바람에 떨어진 잎, 흔적조차 없으니

獨上中臺臥白雲 / 홀로 중대(中臺)에 올라 구름 속에 드러눕네.

<그림 ()> 강린당(講麟堂) 내에 걸린 청음 선생의 중대시(中臺詩)

 

이 시를, 청음 선생의 7대손 김학순(金學淳)이 초서체의 글씨로 옮겨 쓴 시판(詩板)이 현재 강린당(講麟堂) 실내에 걸려 있다.

그런데 ‘목석거’란 글자가 새겨진 너럭바위 위에 비각이 세워져 있다. 바위의 크기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높이라서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도저히 올라가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곳 비각 속의 담긴 비문의 실체가 궁금해 호기심이 발동했다. 어렵사리 인근 마을에서 사다리를 빌린 뒤에 너럭바위 위로 더위잡고 올라가 직접 비문의 내용을 확인해 볼 심사였다.

<그림 ()> 청음 후손이 새긴 암각자
<그림 ()> 비문 탐색을 시도하는 필자

 

 

 

 

 

 

 

 

 

 

 

베일에 싸인 채 좀체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만 같았던 비문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황홀했다.

바로 ‘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청음김선생목석거유허비)’가 그것이다.

다만 비석의 하단 쪽 부분이 세월의 부침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심하게 훼손되어 있어 글자를 확인하기 어렵게 되었음이 진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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