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8).. ‘최고의 충신(忠臣), 의리를 지킨 절사(節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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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8).. ‘최고의 충신(忠臣), 의리를 지킨 절사(節士)'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1.30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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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참고자료> ○ 청음(淸陰) 김선생(金先生) 목석거(木石居) 유허비문(遺墟碑文) *현재 이 비석 아래쪽 부분의 글자가 대부분 마멸되어 이를 판독하기가 어렵다.

그런 부분은 이희조(李喜朝)의 《지촌선생문집(芝村先生文集)》을 참조해서 추가했다. 여기 【판독(判讀)】의 글에서 ( ) 안의 굵은 체의 글씨가 이에 해당한다.

 

<그림 ()> 청음김선생목석거유허비(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
- 이희조(李喜朝) 찬(撰) ‧ 이정신(李廷臣) 서(書)

 

【판독(判讀)】

直安東府西四十里有山 曰鶴駕 其下盖有淸陰金先生遺墟云 崇政丙子冬 虜入寇 上幸南(韓 先生自)楊州石室聞變 追赴力陳死守之義 及議乞降 詣廟堂 哭裂國書 不食六日 又自經幾殊 丁丑正月(晦日 上)出城 先生痛哭拜送 仍出自東門 至安東之豐山止焉 盖以有兩世祖墓也 已又深入西薇洞 扁(其居曰木石) 著豊岳問答 以見志 戊寅 臺諫柳碩李烓等 論以遣君請流竄 只 命削官 尋敍復 己卯上疏 (請勿助兵犯) 大明 庚辰 虜以先生北去 幽之北館 辛巳 使出住義州 癸未 又拘入瀋陽 先生終不少屈 乙酉 (始放還 丙戌 擢)拜左相 己丑 孝宗即位 命以肩輿入 闕 先生欲贊成復雪大業 不幸狼狽而歸 以壬辰六月(二十五日) 卒於石室 春秋八十三 後五十八年 吾堂姪李君正臣 守安東 見先生舊居 鞠爲茂草 慨然歎曰 先(生 我東方)伯夷 而鶴駕 是先生之首陽 豈可使採薇遺跡 泯沒如此耶 遂立一小石 鑱其面曰 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 仍屬余記其右 余嘉其意 不敢辞 遂書其事 俾刻之 先生諱尙憲 字叔度 諡文正 本安東人 高麗(太師宣平) 即鼻祖 至今祭于社 銘曰 退之頌伯夷曰 崒乎泰山不足爲高 昭乎日月不足爲明 明道銘顔樂亭(曰 水不忍)廢 地不忍荒 嗚呼正學 其何可忘 余今於先生亦云 惟此一木一石 嗟百世之後 勿毁勿傷

崇禎紀元後八十三年庚寅三月 日立

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李喜朝撰

通訓大夫安東大都護府使李正臣書

【해석(解釋)】

안동부(安東府)에서 서쪽으로 40여 리(里) 되는 곳에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학가산(鶴駕山)이다. 그 산 아래에 청음(淸陰) 김선생(金先生)께서 머물렀던 곳이 있다.

숭정(崇禎) 인조(仁祖) 14년 병자(丙子, 1636)년 겨울에 오랑캐 군대가 남한산성으로까지 쳐들어왔을 때 그때 선생은 양주(楊州)의 석실마을에 계시다가 이런 급보를 전해 받고서 한달음에 달려가 임금께 나아가서 목숨을 걸고 성을 지켜낼 것을 강력하게 간언(諫言)했다.

그러나 묘당(廟堂)에서 이미 항복하기로 의논이 모아졌기에 선생께서는 통곡하시며 그 항복문서를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엿새 동안이나 단식하면서 스스로 죽을 결의를 다졌다. 정축(丁丑, 1637)년 정월 그믐날에 이르러 임금이 타신 수레가 항복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선생께서는 통곡하며 배송하신 뒤 곧바로 동문으로 나와 안동의 풍산(豐山)으로 낙향하셨다. 두 선조의 묘소가 있는 소산 마을의 청원루(淸遠樓)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깊숙한 곳 서미동(西薇洞)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편액(扁額)으로 ‘목석헌(木石軒)’이란 당호를 내걸고 초당(草堂)에 거처하셨는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 <풍악문답(豊岳問答)>이란 글을 쓰시면서 의지를 내보이시기도 했다.

무인(戊寅, 1638)년에 대간 유석(柳碩)과 이계(李烓) 등이 상소해 아뢰기를, 임금을 버리고 달아난 김상헌의 죄를 물어 유배형에 처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삭탈관작(削奪官爵)만 행하라는 명을 받았다가 이내 복관되었다.

기묘(己卯, 1639)년에 상소를 올려, 오랑캐들이 대명(大明)을 침입할 적에 조선에서 군사를 파견해 돕지 말기를 청하였다.

경진(庚辰, 1640)년에 노차(虜差) 용골대가 선생을 북쪽으로까지 호송해서 북관(北館)에 감금하였다.

신사(辛巳, 1641)년에 의주(義州)로 옮아갔고, 계미(癸未, 1643)년에 심양(瀋陽)으로 끌려가서 구금되었으나, 선생께서는 끝끝내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을유(乙酉. 1645)년에 비로소 방면되어 귀국하시게 되었는데, 이때 9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혔던 소현세자도 함께 귀국했다.

병술(丙戌, 1646)년 3월에 좌상(左相)에 제수(除授)되었는데, 이의 공식 명칭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이다.

기축(己丑, 1649)년에 효종(孝宗) 임금께서 즉위했는데, 임금께서 명을 내리시길, 견여(肩輿)를 타고 궁궐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선생께서는 청(淸)나라에 대해 복수해서 치욕을 씻는 북벌(北伐)의 큰 사업에 대해 찬성하셨었지만, 불행히도 낭패로 끝나면서 돌아와야 했다.

임진(壬辰, 1652)년 6월 25일에 석실(石室)의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향년(享年) 83세이다.

그 후로 58년이 지난 뒤, 나의 조카인 이정신(李正臣) 군(君)이 안동의 부사(府使)로 부임해 와 선생이 살았던 옛 집터를 둘러보게 되었다.

잡초만이 무성하고 황폐해진 모습을 보고 감정이 북받쳐서 탄식을 자아내며 이르기를, “선생께서는 우리나라의 백이(伯夷)와 같은 인물이고, 가학산(鶴駕山)은 바로 선생에게는 수양산(首陽山)이 되는 곳이라.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사시던 그 유적을 어찌 이처럼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마침내 한 개의 작은 돌을 세우면서 그 앞면에다 글씨를 새겨넣기를, ‘청음김선생목석거유허비(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라 했다. 그 기문을 지어줄 것을 내게 부탁해오자, 가상한 그 뜻을 거절할 수가 없기에 흔쾌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드디어 그 사실들을 글로써 작성해 돌에다 새긴다. 선생의 휘(諱)는 상헌(尙憲)이요, 자는 숙도(叔度)이고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본관이 안동인(安東人)인데, 고려(高麗)의 태사(太師)인 선평(宣平)을 그 시조(始祖)로 모셔 이제까지 사당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이에 명(銘)한다.

한퇴지(韓退之)가 백이(伯夷)를 노래한 구절 가운데, “높은 태산도 높음이 되지 못하고[崒乎泰山不足爲高], 밝은 일월도 밝음이 되지 못한다.[昭乎日月不足爲明]”라고 했다.

또한 정명도(程明道) 선생이 안락정(安樂亭)을 명(銘)한 글에 “물을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도 차마 황폐시키지 못한다. 오 올바른 배움이여, 그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水不忍廢 地不忍荒 嗚呼正學 其何可忘]”라 했다.

나도 이제 선생께 또한 같은 말을 전하리라. “오직 이곳의 한 그루의 나무와 한 덩어리의 돌이라도, 백세(百世)의 뒤에 함부로 허물거나 손상치 말아야 할 것이라.[惟此一木一石 嗟百世之後 勿毁勿傷]”

참고로 안동의 학가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 초옥을 지어 목석헌(木石軒)이란 편액을 달아놓고 지내면서 지었다고 하는 <풍악문답(豊岳問答)>이란 글의 내용은 《효종실록(孝宗實錄)》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이렇다.

“묻기를,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을 나갈 때 그대가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는 털끝만큼도 구차스러워서는 안 된다.

나랏님이 사직에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간쟁(諫爭)하였는데 쓰이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역시 신하의 의리이다.

옛사람이 한 말에,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르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臣之於君 從其義 不從其令]」라고 하였다.

사군자(士君子)의 나가고 들어앉는 것이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 예의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명령대로만 따르는 것은 바로 부녀자나 환관들이 하는 충성이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적이 물러간 뒤에 끝내 문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뜻은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변란 때에 초야에 낙오되어 호종하지 못했다면 적이 물러간 뒤에는 의리로 보아 마땅히 문안을 해야 하겠거니와, 나는 성안에 함께 들어갔다가 말이 행해지지 않아 떠난 것이니,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어찌 조그마한 예절에 굳이 구애되겠는가. 자가기(子家羈)가 말하기를 「겉으로 따라나온 자는 들어가는 것이 옳고 계손씨(季孫氏)를 적으로 여겨 나온 자는 떠나는 것이 옳다.」고 했으니, 옛사람들은 출입하는 즈음에 의로써 결단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묻기를 ‘자네가 대의는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그 말은 옳으나, 대대로 봉록을 받은 집안으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조종조의 은택을 생각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내가 의리를 따르고 명령을 안 따라 이백 년의 강상(綱常)을 부지하려 하는 것은 선왕께서 가르치고 길러주신 은택을 저버리지 아니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나라가 평소 예의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하루아침에 재난을 만나 맹세코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임금에게 다투어 권하여 원수의 뜨락에 무릎을 꿇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사대부를 볼 것이며 또한 지하에서 어떻게 선왕을 뵙겠는가. 아, 오늘날 사람들은 또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했다.”

위의 글 가운데, 특히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를 뿐 그 명령을 따르는 게 아니다.”라고 하면서 신하로서의 절의를 강조한 대목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한편 목석거(木石居) 옆에는 본래 서간사(西磵祠)란 건물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청음 사후에 후인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그림 ()> 서간사(西磵祠) 강린당(講麟堂) 전경

 

본래 이 사호(祠號)는 정조(正祖) 임금이 편액을 하사하면서 내린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10년 병오(丙午, 1786)> ‘2월 22일’조에 보면, 이렇게 실려 있다.

“영남 유생 김제묵(金濟默)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안동(安東) 목석거유허사(木石居遺墟祠)를 서원(書院)으로 승격하고 편액을 하사해 줄 것을 청하니, 이에 비답하기를, ‘선정의 관향이 안동부이고 이 지역에 물러가 살았으니, 안동부와 이 지역에 선정의 사당을 세워서 영남 사람들이 존경하는 생각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비록 서원으로 승격해 달라고 말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사당에다 편액을 하사하여 옛날의 경관을 바꾸지 않아야만 목석과 같이 살겠다는 선정의 평소 지조에 어긋나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 하고, 사호(祠號)를 ‘서간(西磵)’이라고 내려 주었다.

또 하교하기를, ‘서간사(西磵祠)의 편액을 하사할 때에 측근의 신하를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게 하라. 아침에 납언(納言)의 상소에 문충의 절의(節義)에 대한 대목에 이르러 감격된 바가 있었는데, 문정의 편액을 하사할 때와 마주쳤으니, 우연이 아니라고 하겠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날을 가려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림 ()> 강린당(講麟堂) 편액 – 좌측 낙관명이 김학순(金學淳)으로 보임

 

그런데 이 서간사(西磵祠)란 건물은 대원군의 훼철령에 따라 헐려 없어지게 되었고, 현재는 그 자리에 후학들이 세운 강린당(講麟堂)이 들어서 있다.

그렇다면 정조(正祖) 임금께서 특별히 어필(御筆)로 하사한 ‘서간사(西磵祠)’란 편액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곳 어딘가에 있을 법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게 보이지 않아 더욱 진한 아쉬움이 생긴다.

 

5. 나오는 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당대 중요한 활약상을 보였던 인물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으로 ‘졸기(卒記)’라는 게 있다.

그 졸기를 보면 한 인물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왔으며, 그 인물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어떠한지를 알려준다. 대개 졸기는 그 인물이 죽은 바로 그날에 실록에 실리게 마련이다.

청음 김상헌 선생은 효종 3년(1652) 6월 25일 양주(楊州)의 석실(石室) 별서(別墅)에서 향년 83세로 생을 마감했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 실린 청음 김상헌 선생의 <졸기(卒記)>를 보면, 그 내용이 지나치다고 할 만큼 청음의 살아생전의 모습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분량 면에서 보더라도 실록에 실린 다른 누구보다도 길게 작성되어 있다.

이에 반해 마지막 부분의 ‘사신은 논한다[史臣曰]’의 글은, 앞의 졸기의 내용과는 달리 대단히 짤막하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문천상(文天祥)이 송나라 왕조 삼백 년의 정기를 모두 거두어들였다.’라고 했는데, 세상의 논자들은 ‘문천상 이후로 그런 사람은 오직 동방의 김상헌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史臣曰) 古人謂 文天祥收宋三百年正氣 世之論者以爲 天祥之後 東方唯尙憲一人而已]”

문천상은 남송 말기에 활약한 충신으로서 원(元)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군사를 끌어모아 항전을 했고, 남송이 멸망한 뒤에도 저항하다 포로로 붙잡혀 연경(燕京)에 3년 동안 구금되었는데, 원(元) 세조(世祖)의 회유에도 끝내 거절하고 처형당한 인물이다.

그러고 보면 ‘청음 김상헌 선생이 문천상 이후로 오직 한 사람에 해당한다.’라고 한 표현은 조선의 선비 중에서 그가 최고의 충신(忠臣)이자 의리를 지킨 절사(節士)였음을 반증하는 찬사(讚辭)인 셈이다.

<그림 ()>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에 실린 충신 문천상 활약상(김홍도 그림)

 

그가 지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는 “아아, 백대 세월 흐른 뒤엔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리라.[嗟百世之後 人知我心]”라고 했다.

청음 김상헌 선생 하면, ‘춘추대의(春秋大義)’란 네 글자가 바로 떠올려질 정도로 그는 분명 조선을 대표했던 대학자이자 제주 오현(五賢)의 인물 중 한 사람인 것이다. <끝>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는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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