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9)-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갑인봉사(甲寅封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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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9)-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갑인봉사(甲寅封事)'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2.07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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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제주 대정현 유배 10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동계 정온

 

【절문(切問:간절히 물어봄)】

○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이 대정현에 귀양 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 <갑인봉사(甲寅封事)>란 어떤 내용이 담긴 상소문인가?

○ 동계(桐溪)는, 광해군 때 북인(北人)의 실세였던 정인홍(鄭仁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어째서 스승과 다른 노선을 가게 되었는가?

○ 헌종(憲宗) 8년(1842)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안으로, 이원조(李源祚) 목사가 세운 ‘동계정선생유허비(桐溪鄭先生遺墟碑)’ 내용은?

○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동계(桐溪) 선생과 함께 해배(解配)된 노씨부인(盧氏夫人)의 제주 유적지인 대비공원(大妃公園)은 어떤 곳인가?

○ 동계 선생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을 배경으로 펼쳐진 척화파(斥和派)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더불어 청(淸)에 항전(抗戰)을 주장하다가 마침내 자결까지 시도한 배경은?

○ 동계(桐溪)의 현손(玄孫; 4세손) 정희량(鄭希亮)이 이인좌(李麟佐)와 함께 벌인 무신난(戊申亂) 여파로 거창의 초계정씨(草溪鄭氏)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위기에서 살아남게 된 배경은?

 

○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과 관련된 대표적 유적지는?

(1) 동계 정온 선생 고택(거창 강동마을)

(2) 모리재(某里齋) 및 화엽루(花葉樓)(거창 덕유산)

(3) 묘소 및 용천정사(龍泉精舍)(거창군 가북면 용산리)

 

일제강점기 때(1932) 조두석 앞에서 행해진 오현단(五賢壇) 제사
(*사진출처 - 《제주100년》)

 

 

1.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은 어떤 인물인가?

 

제주 오현(五賢)의 한 사람인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서 절개와 충절로 이름난 대표적 선비이다.

선조 2년(1569) 2월 6일에 선생이 안음(安陰) 고현(古縣) 역동리(嶧洞里)에서 부(父) 진사(進士) 유명(惟明)과 모(母) 정부인(貞夫人) 진주강씨(晉州姜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셨다.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호는 동계(桐溪)이며,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자신의 호를 ‘동계(桐溪)’라고 함에 있어서는, ‘역양고동(嶧陽孤桐)’에서 따와 스스로 지었다고 하는데, 부친의 호가 역양(嶧陽)이다. 역양(嶧陽)이란 본래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역산(嶧山)의 남쪽이라는 뜻인데, 거창에도 역동(嶧洞)이란 마을이 있다.

역산에 오동나무가 많이 자라는데, 이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면 아주 좋은 소리가 난다고 알려져 있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보면, “역산 남쪽에 우뚝 자란 오동나무를 조공한다.〔嶧陽孤桐〕”라고 하였다.

 

동계의 시문 중에 ‘역양고동(嶧陽孤桐)’이란 시가 있다.

 

“우뚝하고 무성한 오동나무여[落落梧桐樹] /

역계의 북쪽에서 외롭게 자랐구나[孤生嶧水陽]. /

거문고로 쓰이기를 구하지 않고[不求琴瑟用] /

오직 지엽이 창대하길 바랄 뿐이네[惟願葉枝長]. /

노목이 되어 봉황이 깃들 만하니[垂老堪棲鳳] /

가을을 만나 서리를 피하려 하리[逢秋肯避霜]. /

마음을 아는 이를 만나지를 못하여[知心嗟未遇] /

밤마다 달빛만 부질없이 간직하네[夜夜月空藏]. /

시냇물에는 차가운 옥이 흘러내리고[溪水流寒玉] /

외로운 오동은 푸른 줄기 빼어났네[孤桐挺碧莖]. /

구름과 비를 머금어 잎은 젖어있고[葉含雲雨濕] /

허공의 달이 걸려서 가지는 밝구나[枝掛桂蟾明]. /

바람이 이르면 거문고 소리를 내고[風至琴聲奏] /

서리가 내리면 봉황새가 우는구나[霜侵鳳鳥鳴]. /

누가 장차 맑은 조정에 천거하리오[誰將薦淸廟] /

물가의 모래에서 스스로 늙으리라[自許老沙汀].”

 

어린 시절, 부친의 스승이기도 한 갈천(葛川)임훈(林薰) 선생을 비롯해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맥을 잇는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광해군 2년(1610)에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엔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는데, 바로 이듬해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게 된다.

 

2.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상소문 <갑인봉사(甲寅封事)>

‘봉사(封事)’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누설되지 않도록 밀봉(密封)한 상소문을 두고 이름이다. 갑인(甲寅, 1614)년은 광해군(光海君) 6년에 해당하는데, 이해 2월에 영창대군이 증살(蒸殺) 되는 일이 발생했기에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은 목숨을 건 직언 상소문을 올리게 된다.

그게 바로 유명한 <갑인봉사(甲寅封事)>이다. 당시 동계 선생은 장악원첨정 지제교(掌樂院僉正知製敎)로 재임하던 때였고 나이는 46세였다.

바로 한 해 전인 계축(癸丑, 1613)년 4월에, 서얼(庶孼) 출신인 박응서(朴應犀) ‧ 서양갑(徐羊甲) ‧ 심우영(沈友英) 등이 도적 떼가 되어 상인(商人)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다가 붙잡히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들 일당은 이이첨 등의 회유로 말미암아 조정의 뜻에 영합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부친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 이의(李㼁)를 추대하려 하였다고 고변하자 옥사(獄事)가 크게 일어났다. 이게 곧 ‘계축옥사(癸丑獄事)’이다.

이에 동계는 자신의 스승 정인홍에게 편지를 보내어 “여덟 살 먹은 철모르는 어린아이가 어찌 역모(逆謀)를 꾀하겠습니까.”라는 요지로 영창대군에 관한 일의 부당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갑인(甲寅, 1614)년 1월에는 기자헌(奇自獻)을 영의정(領議政)에, 정인홍(鄭仁弘)을 좌의정(左議政)에, 정창연(鄭昌衍)을 우의정(右議政)에 임명하는 인사조처가 행해졌고, 2월에는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이 영창대군을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더욱이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했다. 그러자 동계 선생은 곧바로 상소를 올려 이의 부당함을 알리고, 당장 강화부사 정항을 참수할 것과 더불어 임금이 패륜(悖倫)을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다.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의 부친인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을 역적이라고 해 죽였으며, 동생인 영창대군마저 죽이고 선왕의 공신과 현신들이 귀에 거슬리는 상소를 했다고 해서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 상태였는데, 임금에게 패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한 동계를 그냥 살려둘 리는 만무했다. 동계 또한 죽음을 이미 각오한 상태였다.

 

동계는 상소를 올리고 난 뒤 그 심회를 이렇게 시문에 담아 표현했다.

 

“간장을 깎아내어 짧은 소를 지은 다음[刳肝裁短奏] /

대궐 문을 밀치고서 궁중에 호소했네[排闥叫彤雲]. /

원통함을 씻음은 죽음 슬퍼함 아니고[昭雪非哀死] /

광명한 처사는 임금을 도우려 함이네[光明欲贊君]. /

일편단심이야 빛나는 태양과 같으니[寸心猶日皎] /

의심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으리라[群疑任他紛]. /

망령된 주장 조금이나 도움이 된다면[瞽說如毫補] /

미미한 이 한 몸 죽더라도 기쁘리라[微身死亦欣].”

 

 

광해군은 크게 분노했다. 이에 삼사(三司)에서도 그를 논핵하여 먼 지역에 안치하기를 계청하였는데, 임금은 비망기를 내려 더 엄중한 처벌을 내릴 것을 지시했다. 광해군은 이르기를, “삼사는 한 시대의 공론을 주관하는 곳이다.

지금 정온의 소장은 임금을 무시하는 부도덕한 말이 낭자한데도 겨우 안치로 과죄(科罪)하였으니 군상(君上)을 멸시하고 사당을 비호함이 심하다. 엄히 국문하여 구핵(拘覈)해서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란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이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려 임금이 덕의(德意)를 베풀기를 청하는가 하면, 우의정(右議政) 정창연(鄭昌衍)이 차자를 올려 임금이 노여움을 풀고 도량을 넓혀 가벼이 처리해주기를 간청했다.

<그림 ()>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초상화(일본 천리대 소장본) - 정온의 상소에 대해 성상께서 덕의를 베풀 것을 요구하는 차자를 올림

 

더욱이 영의정(領議政) 기자헌(奇自獻)은 친국(親鞫)하기를 원하는 광해군에게 아뢰기를,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고, 또 국문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애초 광해군은 그의 상소에 매우 분노했으나 간언하는 자를 죽였다는 여론을 피하고, 짐짓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을 교환케 한 다음 그 중론을 빙자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 대부분이 그를 죽이는 것이 불가하다고 말하고 오래도록 국청을 열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광해군도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때 좌의정 정인홍(鄭仁弘)이 차자를 올려 “정온의 상소는 도리에 어긋나므로 반드시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고무된 광해군이, 그를 심문하고자 해 공초(供招)를 받게 한 후, 결국 동계를 절도에 위리안치할 것을 명하였다.

동계는, 원래 정인홍에게 사사 받아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풍을 이어받은 대북파였으나 이로써 알력이 생겨 그와 갈라서게 되었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동계선생집(桐溪先生集) 서문[序]>을 쓴 용주(龍洲) 조경(趙絅)은 그 글에서 이르기를, “정동계(鄭桐溪)의 갑인소(甲寅疏)를 읽고 나서 두어 줄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역시 충신이 아니다[讀鄭桐溪甲寅疏而不泣數行下者 亦非忠臣也].”라고까지 갈파한 적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갑인봉사>란 동계의 상소문은 당시 전국의 유생은 물론이고 부녀자들까지도 언문으로 번역하여 읽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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