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2)- '덕변록(德辨錄)'과 추사 선생 ‘충신당(忠信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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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2)- '덕변록(德辨錄)'과 추사 선생 ‘충신당(忠信堂)’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2.1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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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제주 대정현 유배 10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이서 계속)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사는 동안, 동계 선생은 특히 <덕변록(德辨錄)>이란 저술을 남겼다.

경사(經史)를 수집하고 채록하면서 은(殷)나라의 서백(西伯)으로부터 남송(南宋) 때의 진서산(眞西山)에 이르기까지 59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책명을 ‘덕변록(德辨錄)’이라 함은, 《주역(周易)》에서 이른바 ‘곤(困)은 덕(德)의 분변(分辨)이다’라는 말을 취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그의 ‘<덕변록>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기도 하다.

※ <참고자료> ○ <덕변록(德辨錄)>의 서문(序文)

【원문(原文)】

<그림 (8)> <덕변록(德辨錄)> 서문(序文) (1)

 

【판독(判讀)】

德辨錄序

余嬰釁明時 非所困而困焉于葛藟卼臲者 于今歲行之半矣 窮無不反 迷久思復 竊窺古人所以處困行險之道 庶幾尋煙染芬 以爲動悔有悔之鑑 於是裒集經史 採摭去事 上自西伯 下至眞西山 凡五十有九人 雖人品有高下 言行有是非 而要之動心忍

【해석(解釋)】

<덕변록(德辨錄)>의 서문

나는 밝은 시대인데도 재앙에 걸렸다. 곤궁에 처할 바가 아닌데 곤궁에 처하여 얽매이고 위태롭게 지낸 지 어언 반년이다. 곤궁이란 반전되게 마련이고, 잘못된 지 오래되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법이다.

삼가 옛사람이 곤궁에 대처하고 험난을 헤쳐 나간 도리를 살펴 그 향기에 젖어서 《주역》 곤괘(困卦)의 “움직일 때마다 후회하게 될 것이라 하여 후회하는 마음을 둔다.”는 것으로 귀감을 삼기로 하였다.

이에 경사(經史)를 수집하고 지나간 일을 채록하였으니, 위로 서백(西伯)으로부터 아래로 진서산(眞西山)에 이르기까지 59명이다. 비록 인품(人品)에 높고 낮음이 있고 언행(言行)에 옳고 그름이 있으나, 요컨대 마음을 경동시키고

【원문(原文)】

<그림 (9)> <덕변록(德辨錄)> 서문(序文) (2)

 

【판독(判讀)】

性操危慮深之跡 則皆可以爲後人師戒者也 編成一秩 名之曰德辨錄 取易所謂困德之辨也者辭也 嗚呼 困者 人之所難處也 剛者 過於矯激而有違寡怨之戒 懦者 淪於汚諂而未免入谷之恥 不激不諂而不失其所亨者 其惟君子乎 子程子曰 時當困而反亨身 雖亨 乃其道之困也 又曰 學者 學處患難貧賤 若富貴榮達 卽不須學 余之集成此錄者 其亦學處患居賤之道 而求以不困乎道而已 第恨荒僻之鄕 書籍尠少 末能博採廣取 又無明師友相與講正而筆削之 豈敢與外人觀 只欲私藏而自省云爾 萬曆己未夏五月旣望 八溪鄭某 書于大靜之叢棘中

【해석(解釋)】

성질을 참으며, 마음을 항상 긴장하고 환난을 깊이 염려했던 자취가 모두 후세 사람들의 사표(師表)가 되고 경계(警戒)가 될 수 있는 자들이다.

한 질의 책으로 엮어서 만들고 이름을 <덕변록>이라 하였으니, 《주역》에 이른바 ‘곤(困)은 덕(德)의 분변이다.’라는 말을 취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아, 곤(困)이란 사람이 처하기 어려운 것이다.

강경한 자는 너무 과격한 데 지나쳐서 원망을 줄여야 된다는 경계를 어기고, 나약한 자는 지저분하고 아첨하는 데 빠져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부끄러움을 면치 못한다. 과격하지도 않고 아첨하지도 않으면서 형통함을 잃지 않는 자는 오직 군자일 뿐이다.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시기가 곤궁한 때를 당하여 도리어 형통하다면 몸은 비록 형통하더라도 그것은 도가 곤한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배운다는 것은 환난과 빈천에 대처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니, 만약 부귀와 영달이라면 배우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하였다.

내가 이 <덕변록>을 집성(集成)한 것 역시 환난에 대처하고 천한 자리에 거처하는 도리를 배워서 도(道)에 곤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궁벽한 고을에 서적(書籍)이 많지 않아서 널리 채집할 수 없고, 또 서로 강론하여 바로잡아서 산삭(刪削)을 가할 현명한 사우(師友)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어찌 감히 외인(外人)과 함께 볼 수 있겠는가. 단지 사적으로 보관해 두고서 스스로 반성하고자 할 뿐이다.

만력 기미년(1619, 광해군11) 5월 16일에 팔계(八溪) 정온은 대정(大靜)의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서 이 글을 쓰다.

 

○ 유배지 대정현에 세워진 ‘동계정선생유허비(桐溪鄭先生遺墟碑)’

<그림 (10)> 동계정선생유허비 (앞면)

 

<그림 (11)> 동계정선생유허비 (뒷면)

 

현재 제주도 대정읍 관내에는 ‘동계정온선생유허비(桐溪鄭蘊先生遺墟碑)’가 세워져 전한다.

현종 8년(1842)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건의로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가 동계 정온 선생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기리기 위해 유배를 살았던 ‘막은골’에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은 후에 대정현 성문 밖 동쪽으로 옮겼다가, 1963년 보성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겼으며, 1977년 이후로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비문 판독】

<앞면>

‘桐溪鄭先生遺墟碑(동계정선생유허비)’

<뒷면>

先生謫廬遺墟在大靜之東城 夫知縣宗仁 因其址闢書齋 俾居儒士 夫土人爲政而知所先後可嘉也 余莅主首 謁先生于橘林祠 修邑志得先生一律詩一跋文 表而載之 又命工竪石於其墟 嗚呼 先生德義名節與天地並立 齋之諸生 能知愛護玆石 於爲士也無愧 余先生外裔也 慕先生公耳 何敢私

崇禎後四壬寅 星州 李源祚 謹書

【비문 해석】

선생이 귀양 와서 살던 집터는 대정현의 동성(東城) 쪽에 있다. 대정현감 부종인(夫宗仁, 1767~1822)이 그 터에 서재(書齋)를 열었기에 유사(儒士)들이 머물렀다. 부 현감은 본래 제주 토박이로서 정사(政事)를 펼쳐나감에 있어 그 앞뒤의 사정을 잘 알아차리기에 그지없이 가상(嘉祥)하다.

내가 제주 고을의 수장(首長)으로 부임해와 귤림사(橘林祠)에 들러 선생의 위패에 참배를 드린 바 있고, 제주읍지를 편수(編修)할 때에 선생이 지은 율시(律詩) 한 수와 발문(跋文) 한 편을 얻어 그 책에 게재해 드러낸 일이 있다. 게다가 석공에게 명하여 그 터에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아 아! 선생의 덕과 의리, 명분과 절의는 천지와 더불어 나란하다는 점을 서재(書齋)의 여러 유생(儒生)들도 잘 알 것이다. 그러기에 이 비석을 좋아하고 보호하게 될 것이며, 선비로서 부끄러움도 없게 할 것이다.

나는 외가 쪽으로 보면 선생의 후예(後裔)가 된다. 그러나 선생을 경모(敬慕)함은 어디까지나 공적인 일일 뿐, 어찌 사적인 감정의 발로이겠는가.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네 번째 임인(壬寅, 1842)년에

성주(星州) 이원조(李源祚) 삼가 씀

 

※ 참고로 비문 우측면에는 감독자[監董]로 전(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인관(李仁觀), 별감(別監) 김정흡(金鼎洽)이 명기되어 있고, 좌측면에는 참관인[看役]으로 유생(儒生) 강서호(姜瑞瑚)와 유종검(柳宗儉)이 명기되어 있다.

 

<그림 (12)> 추사(秋史) 선생이 남긴 ‘충신당(忠信堂)’ 편액(소장처 – 거창 동계총택)

 

한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이 헌종 6년(1840), 대정현에 유배를 와서 동계(桐溪)정온(鄭蘊) 선생이 위리안치된 바 있는 그곳에 다시 터를 잡아 거의 같은 기간 유배를 생활을 보냈음도 우연치고는 기막힌 인연이라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세월의 간격이 225년이란 긴 터울이 있긴 하지만, 그때까지 대정현 사람들에게 남아 전해지는 동계 선생의 선비다운 기상과 유배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추사 선생은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을 끝낸 뒤 일부러 거창에 있는 동계고택(桐溪古宅)을 찾아가서 ‘충신당(忠信堂)’이란 현판을 써주고 갔다고 전한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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