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법화사 서쪽, 조선 시대 과원 터..하원동 법화과원 터
상태바
[향토문화] 법화사 서쪽, 조선 시대 과원 터..하원동 법화과원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12.26 11: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헌에는 감천(甘泉)이라 표기되기도 했는데, 이 샘물을 과원에서 이용하였다

하원동 법화과원 터

위치 : 서귀포시 하원동 1048번지 일대. 법화사 서쪽 편 동산.
시대 : 조선
유형 : 생산기술유적(과원)

 하원동_법화과원터(디서문)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조선 시대 과원 터이다.

조선 중종25년(1530)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에는 제주과원은 전체 35개 있었으며 그 중 대정현(大靜縣)에는 6개 과원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법화과원(法華果園)은 대정현 법화사 서쪽에 조성되었다. 『탐라지(耽羅志)』[1658]에 의하면 당시 식재된 감귤 수종과 양은 유자 66그루, 유감 2그루, 석금귤 2그루 외에 새로 심은 각종 과수가 22그루가 있었다.

당시 주변에는 물맛이 좋은 샘[법화샘]이 있었으며 문헌에는 감천(甘泉)이라 표기되기도 했는데, 이 샘물을 과원에서 이용하였다 한다.

조선 시대에 본격적으로 제주과원이 조성되기 시작된 것은 중종21년(1526)에 제주목사 이수동(李壽童)이 중앙정부에 감귤을 진상하기 위해 서귀(西歸), 서방(別方), 수산(水山), 동해(東海), 명원(明月) 등 5방호소에 과원을 설치하고 감귤을 옮겨 심은 뒤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한 것에서 비롯된다.

효종4년(1653) 이원진(李元鎭)이 편찬한 『탐라지』 과원조(果園條)에는 대정현 지역의 과원으로 고둔, 법화, 동천, 병악, 별과원, 암림 등 6개소가 등장한다. 이후 대정현 지역의 과원 명칭은 변경되거나 폐원 또는 신설되었지만 법화과원은 20세기 초까지 유지되고 운영되었다.

18세기의 모습은 이형상의 『탐라순력도』[1702]와 『남환박물(南宦博物)』[1704]을 통해 그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19세기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서는 법화원(法華園)으로 명기하고 그 위치를 대정현 동쪽 40리에 있다고 기록되고 있으며 그 구체적 운영실상은 변동이 없다.

법화과원터 일대는 사유지로서 방풍림과 더불어서 새로운 감귤원이 조성되어져 있으며, 과원터 아래에는 새로 중창한 법화사가 있다.

제주도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가 감귤이다. 조선 시대 국가가 관리했던 과원터는 제주가 귤의 고장으로서 역사적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유적이다.

조선 시대 과원의 설치 및 변천을 통해 감귤을 포함한 과실의 재배 현황 및 진상 액수를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주민의 경제생활을 엿볼 수 있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과원 터 인근 묘소에는 法華果園旨라는 글자가 있어 1900년대 후반까지도 지명으로 불려 왔음을 알 수 있다.
《작성 18050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