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당산마을 설촌한 사람..고산1리 한장동 조광운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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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당산마을 설촌한 사람..고산1리 한장동 조광운공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1.08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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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을 처음 세우던 시기에는 마을 이름을 당산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고산1리 한장동 조광운공덕비

위치 : 한경면 고산1리 3716-1번지. 한장동 고구마창고 옆
시대 : 조선(1888년)
유형 : 공덕비(碣)

 고산1리_한장동조광운공덕비 옆뒤
고산1리_한장동조광운비석

 

趙光雲은 명월리 사람으로 차귀진 조방장으로 부임하였다가 수월봉 주변 지금의 고산리 3828-1번지에 정착하여 이 마을을 설촌한 사람이다.

사위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이 주변에는 나라가 운영하는 모동장이라는 목장이 있어 그 목장에서 키우는 마소가 농경지를 함부로 침입하여 농사를 망치는 일이 빈번하였다.

조광운은 차귀벵디에 농경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두모리, 신창리 사람들과 함께 고산 및 기타 지역 사람들을 동원하여 이 마을을 중심으로 차귀벵디 전역에 켓담(밭담)을 쌓았고, 자신을 캣감관으로 하고 그 아래에 밭을 지키는 캣초관을 두어 마소가 경지 안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겨울철에는 기러기, 두루미, 까마귀 떼가 보리밭에 앉지 못하게 하여 곡식에 피해가 없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이 지경의 농사 생산량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광운 사후에 고산 주민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운 것이다.

前助防將趙光雲이라는 글씨가 가운데에 큰 글자로 새겨져 있고 좌우에 작은 글자로는 無墻坪垈 勸人築墻 成功無比 立石以表라고 새겼다.

돌담이 없는 지대에 사람들로 하여금 담을 쌓게 하였으니 비할 데 없이 성공하였으므로 돌을 세워 그 뜻을 드러낸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立石以表라는 글자 위에 高山農民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書體가 다른 글자들과 다르고 새긴 깊이도 얕아서 나중에 추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뒷면에는 唐山農民이라고 되어 있어 이 비석을 처음 세우던 시기에는 마을 이름을 당산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운 시기는 光緖戊子十二月日이므로 1888년이다. 비석을 보호하는 돌 비각이 있고 다시 울타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다.

그의 증손자가 한장동에 살고 있다. 그러나 증손자나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쌓았던 밭담이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1970년대 경지정리 때 없어져 버렸을 것이다. 다만, 이와 관련된 지명으로 캣담케(웃건지논과 고구마창고 사이)라는 곳이 있어 이곳이 처음 담을 쌓았던 곳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작성 1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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